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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 (2017) - 김은주
사유는 오직 남성만의 전유물이기에, 남성만의 영역으로 규정지어진 철학이라는 학문에서 여성은 내내 배제되어 왔다. 생각하고, 그래서 의문을 갖고, 그리하여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던 여성들은, 이질적이고 옳지 못한 존재로서 박해당하고 삭제되어왔다. 이 책은 20세기 '여성 철학자'들의 '철학'을 소개한다. 문장이 다소 어렵지만, 스피박의 지적처럼 "쉽게 읽히는 글의 기만성 (p.64)" 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개된 여성 철학자 여섯 명은, 기존 기득권의 것이 아닌 자신들만의 언어로 삶을 이해하고 인간을 바라보며 세상을 논한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인간과 삶, 죽음을 긍정하고, 기존 철학이 단정지은 단일성을 비판하고 거부한다.
"스피박은 (...) 서발턴(*)을 침묵에 빠뜨리는 인식의 폭력에 공모하지 말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인식의 폭력은 서발턴의 단일함을 전제하는 것이다. 서발턴은 결코 하나로 호명될 수 없다. (p.59,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서발턴, Subaltern : 지배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어 권력이 없는 하층계급을 지칭하는 용어
"스피박에 따르면, 세계에 대한 지식은 동일성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아는 바를 초과하는 것이다. (p.49)"
또한 도나 J. 해러웨이는 서구 과학의 남성중심주의를 "죽은 백인 유럽 남성들 (Dead White European Males) (p.108)" 라고 풍자한다. 절대적인 지식과 다른, 부분적이고 상황적인 지식을 제안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젠더 트러블>을 통해 젠더 계보학을 탐구한다. "젠더의 경계와 의미는 당대의 지배적 담론이 만드는 인식 가능성과 인정 가능성에서 얻어진다. 젠더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 (p.82)" 이다. 이들은 '다름'에 대하여, '경계인'으로서의 배타성을 깊이 있게 탐구했다. 단정적인 평가를 거부하고 관계성을 중시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비체(*)는 결코 억압하거나 대상화할 수 없으며, 경계구성체로서 언제나 우리의 삶과 함께한다. (p.162)"
(*)비체, 卑體, 아브젝시옹, abjection :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 위협적인 것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현상
전쟁을 마주하고 실존에 대해 고민한 시몬 베유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중력의 작용에 얽매여버리는 인간 실존의 강렬함에서 부조리는 생겨난다. (...)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 앞에서, 중력의 무게는 숨통을 짓누르듯 버겁다. 삶의 조건인 중력에 짓눌려 허무가 점점 부풀어오르는 그때, 중력의 삶에 대한 사유가 시작된다. (p.122)" 삶 앞에서 인간은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도, 주류층만이 아니라 비주류층도 말이다.
"여성은 단수로 말해질 수 없다. 여성은 복수다. (p.174)"
02. 제인 에어 (1847) - 샬럿 브론테
내용은 알지만 실제로 제대로 읽어본 건 처음이었다.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해가는 제인의 삶이 그 시대에는 다소 이질적이고 이상해 보였을지 모르겠으나, 어린 소녀가 자유를 갈망하고 스스로 삶을 일궈가는 모습은 매력적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각기 다른 맥락으로 폭력적이며 억압적인 시대상을 상징하기에, 제도권 안에서 제 감정이 원하는 길을 따라간 제인의 주체성이 조금은 허황되기도, 그래서 더 대단하기도 했다. 일인칭 시점으로 제인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문체가 발랄하고 재치 있다. 이 책을 읽던 독자가 버사 메이슨의 삶을 궁금해했다는 것이 놀라워서, 다음 책을 읽었다.
03.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1966) - 진 리스
<제인 에어>에서 갈등과 반전의 도구로써 치부되던 버사 메이슨을 궁금해하고, 나아가 그에 대한 서사를 창조하기에 이른 이 책의 저자의 새로운 시각이 몹시 흥미롭다. 광기의 원인이 무엇일까 관심을 가지고, 시대의 억압과 배척에 근간하여 마땅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남성에게 종속되어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의 현실과, 제국주의로 인한 인종적, 지역적 차별의 역사가 복합적으로 적용된다.
노예주로서 우월한 위치를 점했던 백인의 입장에서 끌어내려지고, 백인에게도 비백인에게도 배제당한 이방인으로써 고립되어버린 일생을 살던 앙투아네트 코즈웨이. 19세기 자메이카의, 문명과 동떨어진 대자연에게서 거북함과 불편함을 느끼며 자격지심을 쌓아 올리던 로체스터. 이해할 수 없는 문화의 차이는 찰나의 행복만을 맛 보여주었을 뿐, 파국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버사는 내 이름이 아니에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는 것은 나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는 거지요? 그것도 오베아예요. (p.208)" 화자가 앙투아네트와 로체스터를 넘나들기에, 이야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광기가 더 선명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그들은 사라지게 되는 거지. 그러나 다른 여자들이 그들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고 길고 긴 줄을 서 있는 걸. 저 여자도 그중 하나인 거야. 나는 기다릴 수 있어. 그녀가 단지 피해야 하고 가두어버려야 하는 하나의 기억이 될 때까지, 그리하여 모든 기억들처럼 결국 전설이 될 때까지, 혹은 거짓말로 치부될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 있어. (p.242)" 여성의 존재를 말소시키기에, 가부장제의 돈 있는 남성의 권력과 위치는 지독히 절대적이고 고압적이다.
여성(독자)의 의문이 여성(이야기 속 조연)의 목소리를 끌어냈다는 점에서 독특하고 유의미한 작품이다.
04. 창조하는 뇌 (2017) - 데이비드 이글먼, 앤서니 브란트
반복적인 것보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특성에 대해 다양한 사례와 근거를 기반으로 설명한 책이다. "인간에게는 자신이 배운 사실을 뛰어넘을 능력이 있기 때문에 늘 주변 세계를 보는 동시에 다른 가능한 세계를 꿈꾼다. (p.17)" 이미 있는 것을 인지하여 더 나은 것, 나아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며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이어간다. 인간의 인지활동은 3B (휘기 Bending, 쪼개기 Breaking, 섞기 Blending) 라는 세 가지 전략으로 구성되어 있다.
벌집에서 멀리 날아가 보는 벌과 같은 창조자이자 선지자인 이들의 역할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고, 다양한 선택지를 상상하는 필요성에 대해 논하며, 실패가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 설파한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으로부터 출발하며, 사람들 간의 교류에서 촉발된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주변 원재로를 토대로 세상을 리모델링한다. (p.52)"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모든 것은 잊히고 사라진다. 셰익스피어 역시 언젠가는 대중적 인지도에서 밀려날 것처럼. "비영구성과 진부화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다. (p.160)" 새로움이 꼭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딜레마이자 도전이다. 실패를 지지하는 문화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익숙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적절한 지점 (p.141)" 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05. 예술의 쓸모 (2020) - 강은진
예술의 쓸모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없지만,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서 읽어보게 됐다. 가볍지만 공감 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금세 읽어 내렸다. 마크 로스코가 여러 번 언급됐는데, 니체의 예술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처음 알았다. "니체는 (...) 감상자에게 숭고와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는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말합니다. (p.245)" 그리하여 로스코의 그림 앞에서는 크고 맹렬한 감정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흘러가 버린 시간을 상실과 연결 짓지만, 사실 삶에 의미와 행복을 만들어주는 것 역시 지나간 시간 (p.319)" 이라는 말처럼, 일회성의 예술이 지닌 찰나성이 일상에 쌓여 누적된 행복으로 결국 나라는 사람이 완성되는 거겠지. 예술의 쓸모는 그 일상을 보다 찬란하고 아름답고 풍족하게 만들어 주는 것에 있다고 믿는다.
06. 개인주의자 선언 (2015) - 문유석
"우리 스스로를 더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의라고 생각한다. (p.23)" 세상은 변화했는데 인식은 전근대에 머물러있기에 개인 스스로가 주체로써 서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며 불행해지고 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 서로 다른 시대의 특징이 같은 시대에 나타난다는 말이다. (p.104)" 인간의 비합리적인 면까지 수용, 인정하여 양보와 타협을 통해 사회와의 균형을 지속해나가는 '합리적 개인'이 될 필요가 있다. 사회의 다면적인 부분을 명확하게 직시해야 한다는 것과 20세기 좌우 진영논리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고찰은, 명백한 옳고 그름이 없는 현실을 법정에서 계속 만나온 저자 개인의 경험 덕분이겠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p.201)" 조정위원회의 가치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편견 없이 합리적으로 구성원을 채택한 사례 역시 인상적이었다. 비관주의자이기에 도리어 기꺼이 담대한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사회의 본질을 알고 있는 동시에 그 사회에서 큰 실패나 배척을 당해보지 못한 경험이 근간이겠지. 수필 같은 짧은 단상의 글들을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었다.
07. 선량한 차별주의자 (2019) - 김지혜
자신의 행동에 녹아있는 혐오와 차별을 인지하고 있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상적인 어휘 속에 담긴 배재의 역사와 차별 대상이 아닌 그룹에 속해있기에 절감하지 못하는 배척의 요소들은 사회 곳곳에 잔존한다. 아니, 존재감을 여실히 지니고 있다. "기울어진 공정성"의 관점을 지닌 이들이 말하는 공평은 평등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차별을 부정할 때가 아니라 더 발견해야 할 때다. (p.38)"
누적된 고정관념과 편향도 차별을 고착화하는 요인이다. "구조적 차별"은 차별하는 이도, 차별받는 이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사고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차별의 언어를 "전유"해버리는 소수자 집단도 있는데 (ex. 퀴어) 이는 "언어적 권력과 편견에 도전하며 의미를 전복시키는 (p.94)" 것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 역시 온전히 평등한 전제를 두고 있지 못하기에 편향을 강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차별이 존재하는 현재 상태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나머지 평등을 향한 변화를 불편해하는 경향도 무시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소수자로 만드는 중요한 성질 (p.137)" 인데, 이는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이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 (p.139)" 하기 때문이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p.142)" 변화를 위해서는 차별을 인지하고 불편해하며 나아가 거부하는 개개인의 의지가 필요하다. "차별이 구조화된 사회에서는 개인이 행하는 차별 역시 관습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p.186)" 동시에 제도적으로 차별 금지를 명시화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ex. 차별금지법)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 (p.205)"
08.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2014) - 존.M.렉터
'악'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책은 '대상화'가 악을 야기하는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라고 짚는다. "타인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타인을 총체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보다 못한 존재로 오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p.24)" 이러한 대상화에 기여하는 기질적 요인에는 무엇이 있는가. "문자는 우리를 상징과 추상의 영역으로 인도하고, 이를 통해 존재를 대상화하는 과정에 기여한다. (p.108)" 예를 들면 빨갱이라는 멸칭이 있겠다. "해당 집단의 총체성은 그 꼬리표를 통해 대변된다. (p.110)"
*대상화 - 일상적 무관심 (casual indifference), 유도체화 (derivatization), 비인간화 (dehumanization)
09. 페르세폴리스 (2000-03) - 마르잔 사트라피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그래픽 노블. 79년부터 94년까지 10대와 20대의 여성으로서 이란에서의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문화를 겪어낸 경험과, 오스트리아(유럽)에서 이란인이라는 이방인으로서 마주해야 했던 경계인의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있다. 외증조할아버지가 샤(황제)였으나 쿠데타로 쫓겨났고, 그럼에도 그의 아들인 외할아버지는 척살되지 않고 공산주의자이기에 감옥에 갇혔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부당함에 저항하는 사람이자 딸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부모의 아래에서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이 마르잔의 선택들을 가능케 했다. "나는 또다시, 나의 그 변함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배워야 한다' (p.336)" 여러 굴곡을 겪으면서도 무지에서 벗어난 상태에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개인. "우리의 공적인 행위와 사적인 태도는 정반대였다. 이런 불균형과 격차 때문에 우리는 정신적 분열을 겪게 되었다. (p.314)" 여전히 이슬람 원리주의자 치하에서 여성들은 고통받고 있다. 마치... 카불.
10. 중세Ⅰ (2019) - 플로리앙 마젤, 뱅상 소렐
오랜만에 유럽사를 들여다보고 싶어서 만화로 배우는 서양사를 읽어봤다. 성직자와 귀족, 농민이라는 세 계급으로 구성된 중세 유럽에서 종교 세력과 세속 귀족 계급 간의 견제와 갈등이 발생한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세속인들과 성직자들의 권력관계에서 정치 질서를 완전히 바꿔버린 중요한 변화였어요. (p.64)" 정치, 문화 모두에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는 것, 권력을 쥔 종교는 평화적이던 초심을 잃고 정복의 야욕을 권장하며 "무장을 한 채 예루살렘에 순례를 가는 십자군 (p.75)" 이라는 아이러니한 개념을 만들었다.
11. 별도 없는 한밤에 (2010) - 스티븐 킹
스티븐 킹 소설은 처음이었는데, 군더더기 없는 문체가 이야기의 쫄깃함을 더하고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을 깔끔하게 풀어냈다. 신선한 소재와 납득할 수밖에 없는 전개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리석은 고집으로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1922>는 쥐로 형상화된 죄책감과 공포의 농밀한 불쾌감 때문에 에드거 앨런 포가 연상됐다. 외면하고 침묵하고 싶은 자신의 비극을 두고서도, 파이프에 남겨진 두 여성에 대한 책임이 있다며 행동하는 <빅 드라이버>의 심리묘사가 좋았다. extension만을 제안하는 악마가 등장하는 <공정한 거래>의 소재가 흥미로웠고, 현실적인 선택을 위해 정상을 가장한 다아시의 <행복한 결혼 생활>도 긴장감 넘쳤다. 일상에 근접해있는 범죄들의 불편함을 현실감 있고 흥미진진하며 그럴싸한 이야기로 만들어냈다.
12. 13계단 (2001) - 다카노 가즈야키
사형제도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화두를 던지는 스릴러 소설.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가. 사형선고를 내리는 자와 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실행하는 자는 직, 간접적인 살인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 의무와 권한은 누가 부여하는가. 원죄, 즉 억울한 선고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자에게 사형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처형의 목적 중 하나인 반면교사의 사례와 경고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사적 복수의 위험성을 법이 제한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릴 수 있는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법치의 균형은 무엇인가. 처형대의 13계단 중 우리는 어디쯤에 서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