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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희망이 문을 닫는 시각에 

너는 기어코 두드린다

나의 것보다 더욱 캄캄한 희망 혹은 절망으로


(...)


네 절망이 문을 닫는 시각에 

나는 기어코 두드린다

너의 것보다 더욱 캄캄한 절망 혹은 희망으로


- 최승자 <희망의 감옥> 중



시발점이 된 이명행 성추행 폭로 이후, 약 열흘 간 공연계에서 터져나오는 성폭력 미투 증언들을 마주하며 가슴이 내려앉았고 분노에 목이 메였고 그 모든 감정이 담긴 눈물이 차올라 넘쳐흘렀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metoo 와 #withyou 운동의 진정한 가치를 비로소 온전히 깨달았다. 아픔과 고통의 경험을 소리 내어 말하고 글로써 공유하는 이 행위야말로, 외롭고 고독한 자학의 어둠 속에 홀로 남겨져있던 더 많은 목소리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는 가장 거대한 응원이었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가슴으로는 용납이 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수많은 개인들을 향해 건네는, 절실하고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따뜻하고 눈부신 위로였다. 피해자는, 여성은, 우리는, 도망가고 숨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분노할 권리가 있다. 화를 내고 미워하고 사죄를 받아낼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소중하고, 고맙고, 미안하다. 그떄 내가 먼저 겪고 부딪치며 공론화했더라면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까. (...) 이제라도 나는 용기를 내서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동참한다. 나 스스로에게도 꼭 해주고 싶었던 말을 그녀에게 건네고 싶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p.188-9)



피해자들의 아픔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사람은 응당 가해자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미처 알지 못해 미안하다고, 나 역시 방관에 일조한 것 같아 죄스럽다고 아파하는 사람은, 우리다. 그 공포를 알고, 그 아픔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았고, 그 고통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죄책감과 부채감을 지니고 그들의 상처를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 화나고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그렇기에 이 연대가 유의미함을 안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버릴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페미니스트인 뮤리엘 루카이저는 말했다. 한 여성의 시간과 몸의 서사에 세상 곳곳의 폭력과 차별이 배어있고, 그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불러낼 거라고. 아직 다 털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람들의 망설임이 눈에 보인다. 나 역시 그렇다. (...) 날 불러준 목소리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더 용기를 내는 날이 오길 바란다." (p.181)



가해자들은 파렴치한 행동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만 하기에, 권력이나 사회적 영향력 따위가 있는 그들을 향해 마지막까지 분노하며 행동할 것이다. 동시에 피해자들의 용기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끝까지 끌어안을 것이다. 시대가 변했고, 우리는 깨달았으며, 그리하여 현명해지고 견고해졌다. 아픔을 마주하고 불의를 똑바로 응시하며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불편해도, 상처 받아도, 슬프더라도.



"무언가를 공부하고 알아가는 건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화가 나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가담해왔던 세계를 직면하면, 나도 모르는 새 저질러왔던 폭력이 선명해지면서 자책과 후회, 부끄러움이 밀려와요. 동시에 내가 폭력인지 모르고 당하고 지나쳐왔던 일이 선명해지면서 분노와 슬픔이 밀려오고요. 그렇게 복잡한 감정 속에서 상처받는 게 아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어떤 조건에서도 '정상' 의 범위에서만 안주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당장 상대가 앎을 삶으로 잇지 못한다고 해도 일단 알게끔 해주는 건 중요한 일 같아요. 침묵이 평화가 아니듯, 모른다고 폭력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p.295)



더 이상 외면하고 덮어둘 수 없다. 그러기엔 우리 여성들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어쩌면 기록된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억압 받고 무시 당하고 존재가 지워져왔다. 그리하여 말한다. 우리는 실재한다고. 물건이나 수단이나 소유물이 아니라, 존중받아 마땅한 인간이라고.



"어떤 존재가 사회적으로 배제된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금기시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실재하지만 상상해야만 느낄 수 있는 존재들. (...) 더 듣고 싶다. 내가 아직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p.304)



말하자. 쏟아내자. 빛 아래 당당히 서서 분노하자. 우리의, 그리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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