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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존중/Book

2018 독서목록

누비` 2018. 12. 30. 01:52

01.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2014) - 리베카 솔닛

언어에 대한 논의, 단어의 존재에 대한 의미가 중요하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현상이나 감정이나 상황을 가리키는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p.189)" 이 책의 저자가 맨스플레인(Mansplain) 이라는 단어를 창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지적하는 지점은 동일하고 명백하다. 권위주의, 힘, 신뢰성의 유무 등에 대한 지적 말이다. "자신이 잉여라는 생각과의 전쟁이고, 침묵하라는 종용과의 전쟁이다. (p.16)" 라는 말과 "여성들은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전쟁이다. (p.220)" 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현 상황을 정의한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성의 평등을 인정할 수 없는 기득권의 논리라는 주장이 인상적이었다. 위계와 전통을 부정하는 동성결혼이, 여성의 존재를 말살하고 권력을 지닌 남성만 존재하도록 하는 기존의 결혼을 부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외에 카산드라가 상징하는 신뢰성이나, 안전이별 등의 단어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무릇 페미니즘은 목소리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데 집중하는 운동이니까. (p.190)" 라는 것이 개인적으로 옳다고 굳게 믿는 페미니즘의 정의다.

02.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2015) - 벨 훅스

"페미니즘이란 간단히 말해서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p.25)" 저자는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 말대로 어렵진 않지만, 문장이 다소 장황하다. 이론 위주로 다각도에서 페미니즘의 여러 시도들을 다루는데, 여성이자 흑인인 저자가 제기하는 인종 관련 이슈도 고민의 여지가 많다. "제국주의-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와 결탁해 행동하고 있다는 현실 (p.116)" 을 지적하는데, 유색인종에 대한 언급은 있다가 없다가 해서 씁쓸했다. 교육의 문제도 언급한다. "페미니스트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p.37)" 이미 가부장제 및 성차별적 사고에 길들여진 성인에게도 교육이 필요하고, 지금 이 사회를 마주하기 시작한 아이에게도 올바른 교육이 필수불가결하다. "페미니즘 사상과 실천을 공유해야 페미니즘 운동을 이어나갈 수 있다. 페미니즘 지식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p.70)"


03.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2012,2014)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p.51)" 이라는 정의.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들을 부정하는 꼴입니다. (p.44)" 라는 지적. 이는 '페미니스트' 를 폄하하고 혐오하는 이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내용이다.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p.37)" 이 사회에서 여성은 권리가 무시되고 존재가 지워지며 종국에는 '사라진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결과물이기에, 근본적인 교육부터 바꿔내야 한다는 것을 절감한다.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p.23)" 고등학교 교재로 이 책을 사용하고 있다는 스웨덴처럼, 대한민국의 우리 역시 모두가 읽어봐야 하는 도서다. 


04.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2017) - 홍승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여성으로서, 지독한 공감을 공유하며 읽어내린 책이다.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하는 개개인의 페미니즘이 있으며, 페미니스트'들'은 사안에 따라 협력하거나 투쟁하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자정하며 살아가는 것뿐이다. (...) 진정한 페미니즘은 없다. (p.111)" 이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이 지닌 최고의 강점이라 믿는다. 중요한 개인과 그 개인들이 모여 이루는 사회.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건 지식을 쌓으며 '확신하는'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관념을 '의심하는' 과정 (p.164)" 이다. 그렇기에 어렵더라도 계속 '불편'해하며 문제를 인식하게 제기하고 반성하고 변화해야 한다. "내 사소한 생각과 말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폭력에 돌 하나 얹는 행위라는 걸 안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낮아져야 한다. 보다 더 예민해져야 한다. (p.243)" 그리고 경험을, 아픔을, 소리내어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 미투. 몰라서 미안하다고, 죄책감과 부채감을 지니는 여성들. 이 고통은, 올바르다. "고통을 응시하는 정직한 절망의 언어가 나를 살아있게 한다. (...) 내 글이 어떤 이의 삶에 당도했다는 기분이 돌아오기도 하니까. 그럴 때 나는 뜨거운 위안을 느낀다. (p.218)" 그리하여 요구한다. "나는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자유로우면 좋겠다. (p.17)" 

+덧. 2018년 한국 미투 지지선언.


05.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2016) - 린디 웨스트

근래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의제로 부각되는 것은, 여성 자신이 스스로의 권리와 주체성을 깨닫고 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내 몸이라는 사실을. 내 몸이 작아진다 해도 그것은 나고, 커진다 해도 그것 역시 나다. 내 안에서 날씬한 여자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나는 한 덩어리다. 마찬가지로, 나는 살덩어리로 된 인큐베이터 안을 돌아다니는 자궁도 아니다. (p.35)" 낙태는 찬반을 논할 필요가 없는 주제였음을, 그 자체로 여성의 권리라는 점을, 그 수많은 논술 및 교양 수업을 거치고 난 후에야 온전히 깨닫게 되어 몹시 유감이다. 자본주의와 사회 권력의 의도에 맞춰 한정되고 규정지어진 '표준' 은, 허구다. 거짓이다. 개인은 각자 다른 존재로서 실재한다. 그리고 코미디에 대한 지적. '강간 농담' 이라는 용어 자체가 토론의 주제가 된다는 것조차 놀랍고 참담하다. "그런 농담이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 잠복해있는 편견을 입증하고 거기에 불을 지필 수는 있다. (p.274)" 수많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그러한 위험' 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남성들의 선택적 무시는 얼마나 오만하고 위협적인가. "우리는 모두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우리, 그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나가자. (p.368)"

+덧. 옮긴이 정혜윤. "여성혐오의 중심에는 여성의 몸이 있다. 여성의 인간성을 여성의 몸과 분리시키고, 분리된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성적 대상이나 재생산의 도구로 호명하거나 폭력 행사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여성혐오다. (p.371)"


06. 여자다운 게 어딨어 (2015) - 에머 오툴

고착되어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성차별적인 사회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비꼬고 뒤집으며, '유희' 한다. "유희는 역설이다. (...) 유희는 체제 전복적이다. (...) 유희는 우리의 불평등한 문화에 비합리적인 밑바탕이 있음을 폭로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도구다. (p.378)" 할로윈데이에 남장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저자의 이러한 유희는, 그가 억압 받으며 주입된 틀을 스스로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행위주체 agency 는 개인, 즉 개인의 선택을 일컫는다. 구조 structure 는 사회, 즉 개인이 형성되고 행동하는 배경이 되는 맥락이다. (p.71-2)" 사회의 수많은 구조적 차별이 이 요소들을 정의내림으로써 시작된다. 여성은, 현대인들은, 지독히도 오래되고 불평등하며 비합리적인 차별을 아주 어릴 때부터 학습하고 내면화한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을 마주하면 생경함과 거부감에 휩싸여 도망치기도, 회피하기도 한다. "나는 여성이 의미 있는 인간 존재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에게서 의미 있는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을 배우고 있었다. (p.95-6)" 오직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생각을, 남성의 관점을, 듣고 보고 배울 수 밖에 없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생략되고 삭제된다. 이는 사회로부터 인정 받고 대중적인 논의를 이끌어낼만한 영향력이 있는 여성 철학자, 여성 정치가, 여성 작가, 그리고 기타 모든 분야에서의 '여성' 부재가 야기한 비극이다. "우리가 무력한 행동체계에 갇혀 있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 느낌, 행동이 미묘하게 강압적인 체제(구조)의 산물임에도, 우리가 그것들을 선택(행위주체)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p.388)" 이 문제를 이해하고 분노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비로소 '유희' 를 찾아내여 기존까지 답습되던 모든 것들에 대해 돌을 던질 수 있다. '몸' 의 자유를 누리고, 사회적 '금기' 를 거부하고, 다양한 언어를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 수많은 다양한 시도가 가능함을 이해하고 실행해야 한다. "언어는 개인적이면서 정치적이다. 언어는 우리를 빚고, 세상을 빚는다. 말은 곧 행동이다. 말은 기대를 만들어내고, 행동을 수행한다. (p.267)"

07. 이갈리아의 딸들 (1977) -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독서하는 기간 동안 '세상의 중심은 나고, 아무도 나를 모욕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할 수는 없어' 라는 당당함을 여러 차례 느꼈다. 독서와 자신감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지한 순간 무척 당혹스럽고 놀라웠으며, 종국에는 절망스러웠다.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차별과 그에 따른 '당연한' 사상이 얼마나 위협적이고 강렬한지 책 한 권으로 생생히 경험한 것이다. 이 책은 '움 Wom' 과 '맨움 Manwon' 이라는 단어를 비롯하여, 그저 '성별' 을 바꿔 이 세상의 온갖 억압을 미러링한다. 그 모든 문장들이 너무나 기발하고 위트 있고 생생하여, 오히려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전부 들어본 말이다. 상식처럼, 습관처럼, 당연시되는 언어와 행동이다. 익숙한 폭력이다. '단어' 가 지닌 함의와 역사성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걸맞는 용어를 창조하여 현실을 미러링한 저자의 통찰에 감탄했다. "맨움 운동의 원천은 삶 속에 있는 가장 심오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드러내는 것 (p.226)" 이라는 등, 소설 2부에서는 현대 페미니즘의 여러 운동을 짚어내는 '맨움해방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역사는 움들이 쓰니까. (p.253)" 라며 지금껏 차별 받는 위치를 의아해하거나 저항하려 들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해 놀라워하는 맨움들. 성관계를 포함한 움과의 모든 관계에 있어 항상 맞춰줄 뿐, 제 욕망이나 의지는 자발적으로 억누르는 맨움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가? "갑자기 그들은 '너는 성관계를 어떻게 하니?' 라는 단순한 질문이 사회가 총체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p.265)" 맨움해방주의자들의 대화와 깨달음들이 현실 속 페미니즘의 고민과 동일하기에 더욱 강렬하고 자극적이다. 강간, 가정폭력, 성폭력, 성추행, 차별, 억압, 괴롭힘, 하대. 모든 '여성' 들이 겪는 현실을, 이 책은 움과 맨움이라는 성반전된 사회의 존재로 갈음하여 보여준다. 이 놀랍고 엄청난 책이, 왜 한국의 현재 페미니스트를 비하하고 모욕하는 멸칭이 되어야 하는가. 이 책의 마지막은 첫 장과 동일한 장면을 '현실적' 으로 반복한다. 현실의 반전에서 다시 반전된 성구조. 주인공 맨움 페트로니우스의 소설이자, 동시에 지금 이 책인 <이갈리아의 딸들> 그 자체다.


08.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2010) - 우에노 치즈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이러한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를 '여성 혐오' 라고 한다. (p.37)" 페미니스트는 이를 거부한다. "사람은 '여성' 이 될 때 '여성' 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 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p.158)" 그래서 페미니스트는 예민하고 불편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책은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근간을 여러 사회적 이슈를 분석하여 해석한다. 호모소셜이라는 용어나 포르노, 매춘, 아동학대, 가정 내 부모와 딸 간의 관계, 사회 인식 등 현대사회의 모든 구조가 여성 혐오를 함의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남성만이 사회의 주체이고, 타자화된 객체인 여성은 남성의 인가 혹은 인정을 통해서만 사회구성원으로 실재할 수 있다. 남성의 여성 혐오와 여성의 '자기' 혐오가 지닌 의미와 위험도 놓치지 않고 지적한다. 매춘에서 여성 혐오가 어떻게 구조화 및 내재화 되는가를 설명한다. "買春을 통해 남성은 여성에 대한 증오를 배운다. 賣春을 통해 여성은 남성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 (p.249)" 여성을 대상화하여 그저 '삽입해야 하는 성기' 쯤으로 환원시켜 바라보는 남성 위주의 시선에 대해서도 해석한다. "포르노그래피에서 '시선' 의 소유자는 남성이고 그 시선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여성의 쾌락이라는 비대칭성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p.143)" 많은 여성들에게 포르노가 불편하고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호모소셜리티가 여성의 차별 뿐만 아니라 경계선의 관리와 끊임없는 배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남성됨' 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역으로 증명한다. (p.37)" 라는 분석이 날카롭다.


09. 붉은 선 (2017) - 홍승희

"흐물흐물하고 삐뚤빼뚤할 수밖에 없는 몸의 언어다. (...) 어쩌면 글을 쓰는 동안 아주 많이 치유된 것 같다. 망가진 걸 고치는 치료가 아니라 버려진 걸 줍는 치유. (p.10)"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쏟아내는, 금기시되어 왔지만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느끼고 경험하게 되는 섹슈얼리티 이야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페미니즘의 명제가 이 책에서도 성립한다. "집단적 폭력을 고발하고 공론화하는 일은 작은 일도, 사적인 일도 아니다. (...) 여성의 고통은 늘 작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받아왔다. (...) 내가 폭력의 시선과 표현 속에서 가만히 있는 만큼, 내가 방관한 폭력들이 더 딱딱한 돌멩이처럼 굳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p.103-4)" 이러한 깨달음이 개인으로 흩어져있던 여성들을 연대하도록 돕는다. "여성을 대상화한 게 아니라고 발뺌할 수 있는 권력은, 자신의 위치성을 모르는 의도된 무지에서 나온다. (p.105)" 가까운 관계에서, 폐쇄된 조직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이 내뱉는 변명에 대한 일갈이다. 이외에 저자의 경험에서 야기된 성노동자에 대한 날 것의 이야기와 생각들이 생경하기도, 이해되기도, 납득되기도 하여 고민의 여지를 남겼다. "폴리아모리스트도 성소수자로 분류된다. (...) 내 안에 무수한 소수자성이 있듯, 모든 고유한 관계는 소수자 서사일 수밖에 없다. 비체의 사랑은 고유하다. (p.265)" 라거나, "다양한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을 분류하고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 관계와 존재를 자체로 존중하고 존중 받기 위함이다. (p.272)" 라는 문장들이 인간 개개인이 지닌 서사성의 고유함을 유의미하다고 정의한다. "사랑은 수많은 관습의 폭격으로부터 지금 우리 서사를 지켜내는 저항이라는 걸. 지켜내는 걸 넘어 계속 확장해가는 정치적 행위라는 것을. (p.285)" 여성의 섹스, 욕망에 대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공유하며 오롯이 긍정한다. "차별과 억압은 성 역할에서 시작됐다. 섹스는 그 역할극의 발원지이자 종착지다. (p.295)" 라거나 "오르가슴은 두려움보다 강하고, 기존 질서보다 생생한 현재의 감각이다. 강간 서사와 섹스의 습관을 무너뜨릴 만큼의 거대한 힘이다. (p.43)" 라고 말이다.


10. 나쁜 페미니스트 (2014) - 록산 게이

페미니스트라 자칭하고 규정짓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회피하던 과거 위선의 경험을 공유한 책이다.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양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p.17)" 솔직하게, 차별 받는 것에 저항하고,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에 반발하면서, 때로는 비논리적이거나 부족할지라도 결코 페미니스트임을 포기지 않는 '나쁜 페미니스트' 로 살겠노라 공언한다. 강간을 유머로 소비하는 문화를 비롯하여 사회의 온갖 불평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때,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변화하려면 의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두 가지만 있으면 변한다. 그렇게나 간단하다. (p.49-50)" 가진 것을 내려놓기는 커녕, 가졌음을 인지조차 못하는 것은 큰 문제다. "소셜 네트워크는 부족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양심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헌신과 연민과 지지는 한정되어 있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p.232)" 여성이자 동시에 흑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지닌 저자는, <헬프> 나 <장고> 같은 영화들에 대해 신랄하고 유의미한 비판도 한다. 흑인의 입장에서 백인이 만든 흑인 주제의 영화를 보는 것은, 여성의 입장에서 남성이 만든 여성을 다룬 영화를 보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인간은 편협하고, 제 의견을 굳게 고수하며, 역지사지를 쉽게 행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러므로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고, 예민하게 관찰하여, 불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의 무지가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노력해야 한다. 구성원 모두가 이렇게 행동하는 사회는 얼마나 평화롭고 따뜻할지, 상상이나마 잠시 해보았다.


11. 자기만의 방 (1929) - 버지니아 울프

강연 형식으로, 동시대의 여성에게 버지니아 울프가 전하는 이야기. 강요된 익명성 속에서 누군가에게 귀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이야말로 분노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남성들이 기득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앞서서 분노를 선수쳤다. "아마도 여성의 열등함보다 자신의 우월함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p.64)" 남성은 여성을 거울과 같은 도구로 삼아왔다는 지적. 우월함을 스스로 증명해낼 수 없는 남성이, 열등한 존재라 여성을 폄훼하는 개인적, 사회적인 주입을 시켜왔다는 분석. 지금껏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성이 없었던 것은, 재능 있는 여성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여건 상 철저히 묵살되고 지워졌기 때문이라는 논리.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 과 '연 500파운드' 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곧 경제력을 뜻한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어요. (p.198)" 라며 진정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강조한다.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권하는 것은, 여러분이 실재의 현존 속에서 전해줄 수 있건, 없건 간에 활력 있게 보이는 삶을 살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p.203)" 또한, 경험의 공유와 역사의 누적도 언급한다.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다수의 경험이 존재하고 있는 셈이에요. (p.122)" 라는 것은, 인간 존재가 연속성을 유지하며 역사를 이어나갈 수 있는 근간이기도 하다. "여성이 열등하기보다는 남성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고질적인 욕망은 (...) 보이는 어느 곳에나 남성을 세워둬요. (p.102-3)" "여성들은 지난 모든 세기에 걸쳐 남성의 모습을 원래 크기의 두 배로 비춰주는 기분 좋은 마법의 힘을 지닌 거울로서 봉사해왔어요. (p.66)"


12. 페미니즘을 팝니다 (2017) - 앤디 자이슬러

시장 페미니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자본주의에 편입시켜 본질을 숨기고 겉보기만 번지르르하게 변질시킨 것. "신자유주의의 조력자인 시장페미니즘의 목표는 체제의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돌리고 발랄한 태도로 그 개인들을 위한 상업적인 해결책을 나눠주는 것이다. (p.390)" 이제는 페미니스트라 자칭한느 것을 넘어, 실제로 사고하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상품을 구매하고 소비할 수 있는 권리가 페미니즘과 연결될 때 (p.24)" 시장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저들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저항이 非소비운동이다. 자본주의가 페미니즘을 이용하려 든다면 여성도 자본주의에 경각심을 주겠노라는 선언. "시장은 단순하고 매력적인 영역에만 페미니즘의 브랜드를 붙임으로써, 복잡하고 불편한 페미니즘의 문제들을 주변화하는 것이다. (p.133)" 라는 지적과 "선택이 시장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 선택의 의미는 모호해진다. (...) '선택' 이라는 단어로 개인적인 선택을 합리화하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을 비판하면 반페미니즘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비생산적인 행동이다. (p.294)" 라는 지적은, 미시적으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꿔야 함을 강조한다. "포위당한 환상의 영역 안에서 여자들이 얻는 자유란 꼭두각시 줄 몇 개를 잡고 흔들 수 있는 자유에 불과하다. (p.166)"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라 포장하지만, 실재는 또다른 코르셋에 불과한 자본의 논리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대중문화와 언론은 담론을 바꾸는데 기여해야 한다. (...) 이제는 누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고 말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페미니즘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심에 놓여야 한다. (p.224-5)"


13.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1914) - 에멀린 팽크허스트

민주주의 자체가 늦게 도입된 대한민국에서는, 1948년 첫 선거부터 여자와 남자가 구분 없이 모두 투표권을 지녔다. 그러나 이는 먼저 민주주의를 도입한 국가의 여성들이 길고 힘겨운 투쟁의 역사를 거쳐 비로소 얻어낸 값진 결과물 덕분이다. "여성에게는 단지 한 가지 정치적인 의제가 있을 뿐이며, 그것은 여성 자신의 선거권이라는 의제라고도 말했다. (p.214)" 라며 여성의 투표권 하나만을 목표로 다양한 형태의 운동을 진행한 팽크허스트 여사의 이 자서전은, 여러모로 충격적이고 자극적이다. 단식 투쟁을 하는 여성에게 강제로 급식하고, 시위대에게 물대포를 쏘는 등, 권력이 약자에게 행하는 폭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야만적이고 잔인하고 역겹다. "우리는 반참정권 세력 뿐 아니라 모든 중립적이고 행동하지 않는 세력에 대항해서도 전쟁을 선포했다. (p.94)" 라며 대중을 계몽시키고, 폭력을 두려워하거나 그에 굴복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투쟁한다. "폭력을 쓰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폭력에 우리를 내맡기는 것이 우리의 규칙입니다. (...) 우리는 법을 만드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 때문에 이곳에 와 있는 것입니다. (p.175)" 라는 가치관으로 투쟁하던 서프러지스트 (Suffragist) 들은, 귀기울이지 않는 정부를 향해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서프러제트 (Suffragette) 로 거듭난다. "공식적인 정치적 주장을 위해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돌멩이를 쓰는 방법만으로 충분하다면 우리는 그보다 더 강력한 방법으로 논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우리 몸을 다치면서 싸울 때보다 유리창을 깨면서 싸울 때 더 많은 진보를 이뤄냈습니다. (p.274-5)" 라며 돌멩이를 들어 창문을 깨고, 인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방화를 한다. 자본주의의 전신인 영국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재산권' 을 침해하는 방식의 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정치적 진보는 언제나 폭력과 재산 파괴 행위와 더불어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p.276)" 결국 이러한 폭력 투쟁을 선동한 죄로 재판정에 선 팽크허스트 여사는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변호한다.

"저는 심사숙고해서 법을 어겼습니다. 히스테릭하게 혹은 감정적으로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심각한 목적을 갖고 법을 어겼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게 될 때까지, 이 운동은 계속될 것입니다. 식민지의 여성들이 싸우듯이, 그리고 이 여성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문명화된 전세계에서 여성들이 싸우듯이 우리도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p.386-7)"

평생을 바쳐 결코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지도자가 있었기에 오랫동안 투쟁할 수 있었고, 참거나 숨지 않고 창문에 당당히 돌멩이를 던진 여성들이 존재했기에 마침내 여성의 참정권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인간이라는 가족의 절반인 여성이 이 세상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p.18)"


14. 어른이 되어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2017) - 이다혜

모든 문장들이 지독히 공감되어, 웃음과 조소를 떼지 못한 채 읽어내렸다. 지금은 불편하고 어렵고 혼란스럽고 힘든 게 마땅하다.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당연시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시정해 나가야 한다. "여성 독자들은 잘 이해한다. 많은 것들을 이해한다. (...) 늘 피해자가 생각하는 것이다. 왜 가해자가 가해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왜' 라니. 마치 이유가 있으면 그래도 된다는 듯이. (p.224)" 남성에게는 관대하면서 여성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한 사회. 여적여라는 불쾌한 단어나 명예남성이라는 정체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학습되고 주입된 남성의 시각 때문이다. 여성서사 작품들이 근래에 와서야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완벽한' 서사가 아니라고 비판하거나 심지어 불매까지 하는 일부 여성들의 자기검열은 옳지 않다. "여성을 대표하는 단 한 명의 여성은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많은 창작물에서 주도적인 캐릭터들이 남성이었기 때문에 남성 관객들이 당연하게 누려왔던, 캐릭터와 나 자신을 일치시키지 않으면서도 온갖 악행과 모험, 파국을 즐겨왔던 일을 나는 이제야 시작하는 모양이다. (p.60-1)" 여성 캐릭터들도 다양할 수 있고, 다양해야만 한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단일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족하고, 나쁘고, 악독하고, 못되고, 이상하고, 괴팍하고, 잔인하고, 미쳐버린,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여러분이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 다양한 직군에서 자기 일에 충실한 여러 연령대와 외모의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그렇게 서로의 역할 모델이 되길 바랍니다. (p.86)" 살면서 이렇게 연대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덧. 후기와 비평만을 주로 쓰는 스스로를 향한 인용. "친구가 세상을 경험하는 동안, 나는 여기 앉아서 그것을 듣고 보고 관찰하고, (...) 평을 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이다. 인생은 저기 있는 게 아닐까.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인생이 저기 있는 게 아닐지 몰라도 여기에는 확실히 없는 것 같아. (p.144)" 타인의 시선과 경험에 대한 생각보다, 나만의 시선과 나만의 경험에 대한 생각을 풀어내고 싶은데 참 어렵다. 


15. 빨래하는 페미니즘 (2011) - 스테퍼니 스탈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반적인 여성의 삶. 그 안에서 여러 고전들을 읽으며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고 페미니즘에 대해 지속적으로 환기하며 고민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성별과 무관하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닌 채 자란 10대, 20대와, 안정적이고 당연한 삶을 마주하는 어른으로서 느끼게 되는 괴리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해답이나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은 아니다. 대신 사유하고 고민하여 현실을 마주하자고 권한다. "역사는 각 세대에게 고유한 무늬의 입맞춤과 타박상의 흔적을 남기지만 여자들이 겪는 근본적 문제는 세대를 막론하고 동일하다. 시간과 공간과 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자는 자기 정체성의 경계를 타협해야 한다. (...) 페미니즘 고전은 우리 자신의 삶을 다른 여성들의 삶과 비교하고 대조해 볼 수 있는 기회와 예측 가능하고 관습적인 일상에서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해준다. (p.413)" 저자는 자신의 삶 하나를 이 책을 통해 내보이며 여성의 이야기를 하나 더 덧붙인 것이다. 다른 고전들처럼 말이다. 

+덧. 머릿말 정희진.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 이 과정이 진화다. (...) 페미니즘은 (...) 다른 모든 사상들처럼 인류 문명의 수많은 소산 중 하나이며 진화, 즉 적응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p.12)"


16. 쇼코의 미소 (2016) - 최은영

우울증, 베트남전 대량학살의 생존자, 인혁당 사건, 세대교체, 인종차별, 세월호.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소재들을 담담한 문체로 담백하게 풀어낸다. 책에 실린 단편소설 하나하나에 담긴 삶을 묘사하는 문장들이 감정을 밀어낸듯 건조하지만, 기저에는 그 삶들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이 물씬 묻어있다. 현실적이고 가까운 주변의 인생들이기에 더욱 공감되고 몰입하여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남성의 존재는 털어둔 채, 팍팍한 현실을 고되게 그러나 꿋꿋하게 마주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점에서 풀어내는 일관성이 따뜻했다. "자기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쪽에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p.293)" 라는 작가의 말을 기억할테니, 계속 좋은 이야기를 전하는 소설가로 남아주길 바란다. 


17. 현남오빠에게 (2017) -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여성 서사의 단편소설집. 연인이라는 미명 하에 "나를 한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 애정을 빙자해 나를 가두고 제한하고 무시해왔다는 것, 그래서 나를 무능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 (<현남오빠에게>, p.38)" 이었다는 깨달음. "그는 어떻게 그렇게 확신했을까. (...)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에 자기의 언어를 붙여 나를 설명하려 했을까. (<당신의 평화>, p.66)" 라는 의문과 문제제기.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어린 너와도 나눠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경년>, p.119)" 하는 자조적인 고해.

+덧. 발문 이민경. "여성의 이야기가 글로 쓰인 양은 여전히 낯설다. 지금의 견고한 세상을 이룬 말들에 비할 바 못할 만큼 적으며, 적어서 낯설다. 그러나 낯설기 때문에 자꾸만 그 견고함에 금을 낸다. 어느 한 군데 부드럽게 스며들지 못하고 충돌하므로 쉴새없이 균열을 만든다. (p.277-8)"


18. 뒤에 올 여성들에게 (2016) - 마이라 스트로버

전문직 여성으로서 살아낸 삶을 생생한 언어로 풀어낸 회고록. 이러한 삶도 존재했고,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 평범하게 편견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가, 경제학자이자 교수가 되는 과정 속에서 페미니즘을 마주하고 학문에 수용하여 끝내 개척하는 선구자에 이른다. "존재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관습을 비웃는 것은 불가능했다. (p.192)" 고 말하면서도, 저자는 훌륭히 눈앞의 역경을 마주하고 헤쳐나갔다. "나는 예외적으로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 성공이 널리 퍼지려면 사회와 고용주도 앞으로 걸어 나와 여성과 중간에서 만나야 한다. (p.385-6)" 그가 앞서서 일구어낸 이론은 페미니즘 경제학이다. "페미니즘 경제학의 핵심 사상은 시장의 프로세스나 소득보다 인간의 복지와 물적 충족에 주의를 기울인다는데, 노동의 젠더 분업이 경제적 분석의 근본적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있다. (p.350)"

+덧. 옮긴이 제현주.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모순을 직면하고, 때로는 그 모순을 잘라내느라 삶의 일부를 포기하고, 때로는 그 모순을 어쩔 수 없이 끌어안는 것을 의미한다. (p.9)" "우리가 때로는 모순을 그저 껴안고 못 본 척 할지라도, 결국은 끈질겨야 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 이 모든 모순 옆으로, 유일하게 오롯한 지지를 보내주며 힘을 싣는 동력이 있다면, 그게 바로 자매애라는 것도. (p.10)"


19. 나는 어떻게 너를 잃었는가 - 제니 블랙허스트 

1인칭 시점의, 안개 속에서 시작했다가 과거의 사건들과 연결되며 '진실' 로 이어지는 소설. 산후우울증으로 인해 자신의 아이를 죽였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엄마, 그의 남편, 그 속의 충격적인 진실.


20. 죽여 마땅한 사람들 - 피터 스완슨

진부하지 않은 전개와 흡입력 있는 문체가 결말까지 쉽게 내달릴 수 있게 만드는 소설. 주인공 릴리의 행동에 대한 당위성과 과하지 않은 수준의 우연들, 긴장감 넘치는 속도와 반전이 흥미롭다. 번역가의 지적처럼, '죽어 마땅한 (deserve to die)' 과 '죽여 마땅한 (Worth Killing)' 의 수동/능동 차이가 인상적이다. 생존을 위하여, 오롯이 존재하기 위하여, 방어기제로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 "난 후회하지도,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내가 저지른 살인마다 이유가, 그것도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p.421)"


21. 나오미와 가나코 - 오쿠다 히데오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보복살인을 당할까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여성의 공포를, 그대들은 아는가. 두려움에 침묵하고, 보호받지 못함에 절망하고, 저항조차 하지 못하여 무력하게 포기하는 것을,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가. 가정폭력에 지친 가나코가 바라는 건 고작 "밤이면 꼬박꼬박 잠을 자고 맛있는 물만 먹을 수 있으면 돼. (p.124)" 라는 평범한 일상이다. 살인이라는 용서 받을 수 없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정당방위조차 인정 받지 못하고, 언론의 여론몰이로 피해자가 되려 가해자로 오인받고, 동일 범죄에도 동일 수사가 진행되지 않는, 이 경악스러운 정신 나간 시대를 살아가는 약자 입장에서는, 이 극악무도한 범죄조차 막연하고 단순하게 단죄하기 어렵다. 가정폭력은 악독하고 무거운 죄다. "남자가 여자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광기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당사자들에게만 맡겨놓는다는 것은 방치나 다름없는 일이다. (p.45)" 고조되는 긴장감을 잘 풀어내고 개연성도 잘 담아낸 소설이어서 끝까지 흡입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22. 피로 물든 방 - 앤절라 카터

환상과 현실을 섞은 동화를 잔인하지만 아름답게 풀어낸 단편모음집.


23. 채식주의자 - 한강

맨부커 상을 수상하여 화제가 되었던 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라는 세 편의 소설이 이어지며 큰 줄기를 만들어낸다. 넘치는 비유와 감정을 명료하고 담백한 문체로 담아냈다. 꿈에 대한 서술, 1인칭과 3인칭을 넘나드는 시점, 이야기 내내 중심에 서있으나 오로지 대사와 행동 만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존재. 담담하게 극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역겨운데도 무던히 인물들을 관찰 혹은 목격할 수 있었다.


24. 얼음나무 숲 - 하지은

오랜만에 정말 재미있게 읽은 소설. 비현실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인물들의 행동과 감정이 매력적이었고, 서사의 흐름이 매끄럽고 전개가 유려했다. 인물들 간의 관계성을 잘 구축했고, 판타지적 요소를 신비롭게 풀어냈다. "고결한 여명의 주인이자 영원한 드 모르베르토, 아나토제 바옐. 그리고 그의 유일한 청중이었던, 고요 드 모르페. (p.426)"


25.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 나쓰메 소세키

고양이의 시점에서 인간의 비합리성을 유쾌하게 풍자하는 소설. 독특하지만 재미있다거나 쉽게 읽히지는 않았다. "교활해지는 것도 비열해지는 것도 표리일체인 호신용 갑옷을 두르는 것도 모두가 만사를 아는 결과요, 만사를 안다는 것은 나이를 먹은 죗값이다. (p.174)" 라거나 "세인의 평가는 때와 장소에 따라 내 눈동자처럼 변한다. (...) 사물에는 양면이 있고 양끝이 있다. 그 양끝을 뒤집어 흑백을 백흑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융통성이다. (p.226)" 라는 문장들이 당대 저자의 생각을 짐작케 했다.


26. 마티네의 끝에서 -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 특유의 문체가 담백하면서도 깊이가 있어서 그의 소설을 자꾸 읽게 된다. 다만 소재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 흐름 등이 문학적 효과라는 인상을 물씬 풍겨서, 소설 자체가 흥미롭지는 않았다. 괜찮은 문장이라는 생각에 표시해둔 부분이, 뒤쪽에서 반드시 다시 언급 되는 것이 신선했다. "그 사람은 신이 장난 삼아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 같은 재능을 가졌어. (p.82)" 라는 표현 같은 것.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바꿀 수 있다고도 말할 수 있고, 바뀌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죠. (p.36)" 라는 주인공 마키노의 말이 소설 전체에 수차례 등장하여 결말까지 영향을 미친다. 현재가 과거의 기억마저 마꿀 수 있다는 통찰이,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이었다. 이외에 마음에 드는 문장이 꽤 있었다. "'왜 그 때 그 자리에' 라는 것은 전쟁터의 감각이지. (p.76)" 라거나 "고독이란, 말하자면 이 세계에의 영향력이 결여되었다는 의식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타자에 대해 전혀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 (p.155)" 이라거나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각자 좌석 한 칸 분의 작은 정적이다. (...) 그들의 적극적인 소리의 포기는 두 연주자에게 남김없이 사용 방도가 위임되어 있다. (p.412)" 라는 표현이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대지진이라는 재앙 직후 "사망자들의 절대적 침묵을 원근으로 감지하면서 아직 살아있는 자들이 일종의 행운으로서 공연장에 들고 들어온 수많은 침묵을 공유하고 그것을 하나의 음악으로 변환해야만 했다. (p.459)" 라는 공연의 정의가, 예술의 존재의의를 재차 생각해보게 했다.


27. 꿈꾸는 책들의 도시 - 발터 뫼르스

'책' 을 소재로 이렇게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한 모험을 그려낼 수 있다니. 지하세계의 묘사와 독특한 종족의 이야기를 녹여내는 작가의 솜씨가 아주 매끄럽고 유려했다. 책을 먹고 사는, 책을 위해 존재하는 부흐링의 존재가 매력적이었고, 그림자제왕의 정체를 풀어내는 과정도 긴장감 있고 극적이었다. "어디에나 문자들이 널려 있었다. (p.154)" 거나 "문학적인 음악 (p.178)" 이라거나 "별들의 알파벳으로 쓰인 책들 (p.637)" 이라는 표현들이 담백하지만 매혹적이었다. 결국 모든 이야기는 이 문장으로 회귀한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p.43)" 


28. 안나 카레니나 1~3권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행복한 가정은 모습이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적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1권, p.9)" 인간의 존재와 근원을 무척 깊게 탐구한 톨스토이의 장편소설이다. 우울증과 불안, 공황장애를 앓는 인간의 감정기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능력에 내내 감탄했다. 농촌 지주 출신이자 '땅' 에 대한 믿음을 지닌 레빈이 작가를 대변하는 캐릭터였다고 생각한다. 종교와 인간의 이성, 숭고함과 절대선, 그리고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삶' 을 가장 담담하고 상세하게 풀어낸다. "그녀와 그 사이에는 그들을 묶은 사랑과 더불어 모종의 투쟁을 일으키는 사악한 영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3권, p.289)" 라거나, "난 그를 불행하게 만들고 그도 날 불행하게 만들고 있지. (...)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단지 서로를 증오하고 자신과 남들을 괴롭히기 위해 세상에 던져진 게 아닐까? (3권, p.402)" 등의 표현이, 본인들에게는 '세기의 사랑' 이었던 불안하고 위태로운 '불륜' 의 본질을 짚어낸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전부 제대로 보지 않으려고 실눈을 뜨는 것만 같았어.' (3권, p.149)" 라는 돌리의 표현이, 현실에서 도망치는 안나를 정확히 묘사했다. 당대 시대상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 소설이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29. 웃는 남자 1~3권 - 빅토르 위고

저자가 왜 이 작품보다 훌륭한 글을 쓸 수 없다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문장 하나하나에 위트가 있고, 그윈플랜이나 조시아, 우르수스 등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생동감 있게 구체적으로 존재한다. 묘사, 비유, 병렬식 문장, 시적인 표현, 논리적이고 막힘 없는 의견. 곱씹고 싶은 문장들이 흘러 넘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보통 밤이 내린다고 말하지만 어둠이 땅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밤이 피어오른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권, p.56)" "모든 존재는 추신으로 내용을 바꿔 버릴 수 있는 한 통의 편지와도 같다. (2권, p.136)" "물 위에 뜬 석유처럼, 희망은 큰 슬픔 위에서도 활활 타고 빛을 낸다. 표면에 떠오른 그 불꽃은 영원히 인간의 슬픔 위를 떠다닌다. (3권, p.107)" 조시아 여공작의 매력을 뮤지컬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대 곁에 있으니 나의 지위가 실추되는 것 같아. 얼마나 큰 행복인가! (3권, p.139)" 라거나 "내가 왜 너를 열렬히 사랑하는지 알아? 너를 경멸하기 때문이야. 네가 나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너를 제단 위로 모시는 거야. 높은 것과 낮은 것을 혼합하는 것, 그것이 곧 카오스이고 나는 카오스를 좋아해. (3권, p.142)" 라며 광기에 차 격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했으면서, 그가 실은 귀족이었음을 알자마자 내쳐버리는 조시아 캐릭터는 가히 독보적이다.


30.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 노라 에프런

솔직하고 담백하게, 저자의 확고한 취향을 담아 위트 있는 에세이 모음집.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가면서 인지하는 '현실' 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과정을 풀어내는 저자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우상으로 여기던 부모의 초라한 인간성, 변화하는 기술력을 대하는 자신의 나이듦.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른이 되며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왜소한 진실을, 유쾌하면서도 시니컬하게 마주한다. 사회 최전방에서 여성으로서 저널리스트가 되어 커리어를 쌓아간 저자의 행동력과 재능이 감탄스러웠다. 그 시대의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여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우아하지만 집요하고, 관대한 척하지만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31. 스페인은 건축이다 - 김희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 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다. 고작 일주일이라는 시간 안에 스페인을 오롯이 마주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기에 안타깝고 그립다. 세비야, 론다 등의 도시를 사진 몇 장으로 설명 없이 넘어가는 이 책이 아쉬웠고, 가보지 못한 톨레도와 들어가보지 못한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내부가 궁금하여 안타깝다. 이 아쉬움이 나를 다시 스페인으로 이끌어주겠지. 융합이야말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스페인의 정신이고, 건축 또한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복원건축과 재생건축의 차이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게 됐다.


32. 건축으로 본 뉴욕이야기 - 이중원

뉴욕의 길과 건물, 그 안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언어가 담백하지만 선명한 철학을 담고 있어서 몹시 흥미로웠다. 세로 Avenue 와 가로 Street 의 정렬, 그 대칭을 깨는 대각선의 존재가 빚어내는 X자 거리와 그 모서리의 랜드마크 격 건물들에 대한 내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911테러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채워지지 않는 물웅덩이의 의미도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아무리 쏟아져채워지지 않는 물은 남은 사람의 슬픔이 아무리 클지라도 소멸할 것이라는 메시지 (p.46)" 라는 건축의 의미가, '추모' 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유럽과는 사뭇 다른 광장의 개념도 신선했다. '사람이 모이는 곳' 이라는 넓은 광장이 아니라, 길이 교차하며 생기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맨해튼은 길을 먼저 세우고 건물을 세웠 (p.38)" 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거리의 시작은 호기심을 주고 거리의 끝은 기대감을 주어야 한다. (p.91)" 라는 표현에도 공감했다. 뉴욕을 방문하기 전에 이 책을 다시 읽어서 길을 허투루 걷지 않는 여행을 하고 싶다. "시간을 투자하는 건축을 하자. 시간을 담아내는 건축을 하자. 시간을 쪼개는 건축을 하자. (p.105)" 도시와 건축에 대해 접할 때마다, 매번 서울이 나아가야 할 바를 상상해본다. 길과 이야기가 있는 도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금 같은 형태의 개발은 지양해야 하는데.


33. 랜드마크; 도시를 경쟁하다 - 송하엽

세계 주요 도시에는 랜드마크가 존재한다. "랜드마크는 의미가 고정된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기대하게 만드는 건축물이다. (p.26)" 최초의 목적과 다르게 유지되며 랜드마크가 된 사례들이 있다. 한국 서울의 경우에는, 사유지의 사적인 목적을 위해 주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건축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올바른 의미의 랜드마크가 탄생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건축이 도시를 상징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만드는 랜드마크로 살아남는 과정과 그 결과 (p.10-11)" 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어서 유익했다. 가본 도시는 알고 있어서 즐거웠고, 가보지 못한 도시의 랜드마크는 궁금하고 흥미로웠다. "전쟁에 대해 책을 쓴 후지와라 기이치는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는' 작업은 '생각해낸다는 명분 아래 새롭게 알아가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p.92)" 기억하는 것은 계속해서 알아가고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34. 다시, 서울을 걷다 - 권기봉

일상적인 서울의 모습부터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들, 특히 근현대사의 역사적 기억을 담은 곳들을 언급하며 쉽고 편안하게 서울이라는 도시를 풀어낸다. 과거를 잊어버리고 피해자로서의 이야기만 부각하는 이율배반적인 접근을 비판하는 시선이 좋았다. 재일교포를 차별하는 일본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화교를 비롯한 소수자들을 무시하고 지우는 것, 지저분한 골목을 그저 제거의 대상으로 보고 경제 이득만을 쫓는 것, 전쟁을 '기념' 하는 오만함, 등의 지적들이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 "우리가 서울이라는 공간과 역사에 얼마나 무심한지 살펴보았다. (p.6)" 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고, "문화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이며 사회경제적인 산물이다. (p.6)" 라는 것이 이 책이 나온 이유였다.


35. 런던의 강들 - 벤 아아로노비치

마법이라는 판타지와 너무나 런던다운 현실이 공존하는 소설. 판타지 쪽은 꽤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런던이라는 공간을 서술하는 부분이 다소 지지부진하여 집중을 떨어뜨렸다. 시리즈로 풀어나갈 목적이 있었다면, 차라리 판타지적 요소에 더 집중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본다. 개연성과 디테일에 방점을 두는 스타일이라고 느껴졌고, 반전도 매끄러웠다. "어쩌면 모든 유령들이 (...) 도시의 구조 안에 갇혀 있는 기억의 패턴들일 뿐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세대의 런던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그 구조 안에 짜 넣으면서, 천천히 사라져가게 되는 그런 기억들 말이다. (p.382)" 


36. 소호의 달 - 벤 아아로노비치

시리즈의 두 번째 소설. 1권보다 깔끔하고 명확한 전개였다. 두 개의 다른 사건이 서로 맞물리도록 만드는 방식이 영드 추리물의 성격과 비슷했다. 스케일이 갈수록 커지리란 것이 보였지만, 크게 궁금하다거나 흥미를 자극하지는 못했다. 주인공 주변에 여성 캐릭터들이 꽤 나오지만, 전반적으로 도구처럼 소모되는 느낌이라서 유쾌하지 않았다.


37. 밴버드의 어리석음 - 폴 콜린스

한 시대에 큰 이슈가 되었지만 사기로 밝혀지거나,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었거나,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했거나, 등등의 이유들로 '실패' 하여 역사에서 잊혀진 사람들을 기록한 책이다. 당대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했음에도 후대는 이렇게 까마득히 모른다는 게 신기했지만, 생각해보니 이 시대에도 유사한 사례들이 수없이 많다. 오히려 쉽게 이슈가 되고 쉽게 잊혀지는 유동사회인 만큼 더 다양한 형태의 망각이 발생하게 됐다. "우리가 그 시대의 천재라고 간주하는 작가들은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시대에는 대들보로 여겨졌으나 먼지 속에 묻혀버린 작가도 있다.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어도 역사에서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달라졌다. (p.246)" 지구 안이 비어있다는 심스의 이론을 신봉했다는 에드거 앨런 포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몽상가는 죽었으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p.140)" 신념과 믿음이 지닌 집요함은 설령 그것이 '틀린' 것일지라도 그 자체의 유의미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값싼 모조품이 나타난다는 것은 어떤 예술 형태가 문화 속으로 깊이 침투했다는 의미이고, 패러디가 나타나면 그 정도가 훨씬 더 깊어졌다는 뜻이다. (p.107)" 훗날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 살아남는 것은, 무엇이 혹은 누가 될 것인가. 


38. 의심의 철학 - 이진우

간만에 읽는 철학책이어서 신선하고 자극적이었다. 익숙한 철학자들의 익숙한 논리를 편한 어조로 쉽게 풀어낸 책이다. "정답을 확신하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묻는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동사로서의 '철학함' 이다. (p.7)" 라는 서문이 좋았다. "이름짓기와 문장 서술의 언어적 행위의 순간에 세계가 비로소 존재하고 동시에 사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p.128)" 라거나 "자신만의 언어를 갖는다는 것은 그것으로 그려볼 수 있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어법은 한편으로는 세계관을 의미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 삶의 형식을 의미한다. (p.141)" 라는 언어의 본질에 대한 글들이, 고민하고 있는 '좋은 글' 에 대해 재차 사유하게 만들었다.


39. 모든 요일의 여행 - 김민철

익숙치 않기에 설레는 마음과, 금세 눈에 익어 적응해버리는 일상 같은 특별함. 저자의 직업이 카피라이터인 덕분인지 유난히 예쁜 문장들이 많았다. "빼곡한 달력에 틈을 벌려 겨우 여수에 내려갔다. (p.72)" 라거나 "끝끝내 꺾일지라도, 끝까지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어떤 희망은 의무다. (p.233)" 라는 글들. "적당한 방황과 적당한 고생과 적당한 낯섦이 그리워 수시로 끙끙 앓는 마음을 가졌다. 어쩌다 보니 여행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p.69)" 관광지가 아닌, 소박하지만 특별한 타인의 일상에 섞이고 싶다.

 

40. 심플플랜 - 스콧 스미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자기기만이라는 인간의 위선을 1인칭 서술과 고해의 방식으로 풀어낸 소설이다. 담백하지만 긴장감 있는 문체가 책장을 쉽게 넘기도록 한다. "한 번 크게 펄쩍 뛰어서 그런 간극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작은 발걸음들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정말이지 전혀 못 알아차렸다. 우리는 서서히 여기까지 왔다. (p.217)"


41. Y의 비극 - 엘러리 퀸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 것이며, 그 판단의 근거는 어떠한 기준으로 결정되어야 하는가. 추리 과정도 트릭도 깔끔한 추리 소설이고, 무엇보다 고민할 여지를 던지는 이야기이기에 독서가 흥미로웠다. 복잡하고 기교가 많은 속임수에 치중하기 보다는, 본질을 꿰뚫는 묵직한 질문을 남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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