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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
in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020.08.12 7시반
이주영 수잔나, 손지윤 데이지, 오용 피터, 김현 마조리, 우범진 로버트, 송광일 에릭.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을 제재로 사용한 이 연극은, 다양한 시대를 관통하며 유기적으로 엮어낸 인물들을 통해 우아하고 효과적으로 주제를 내보인다. 각 시대마다 다르게 표현된 <인형의 집> 연출들은 각 시대가 지닌 고민과 문제와 고통과 비판을 담아낸 극중극으로써 활용된다. 치밀하게 짜여진 구성이 탄탄한 연극적 연출과 맞물리며 풍성하고 충만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극 중 인물들은 연극은 현실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기도 하고 (1959년 수잔나), 연극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며 (1988년 에릭), 연극을 올리기 위한 투자를 받기 위해 기꺼이 가식적인 만남에 응하기도 하는데다가 (2020년 남자), 고작 6명 뿐인 관객을 보며 연극의 무용성을 입에 올리며 자조하기도 한다. (2042년 수잔나) 연극의 효용에 대한 회의를 거리낌 없이 내보면서도, 시대를 비추는 거울로써 빛을 발하며 이 극은 스스로 연극의 가치를 증명한다.
※스포있음※
"누구나 자기자신이 되려면 그래야만 해."
1959년 무대 뒤 분장실. 1879년 발표된 희곡은 8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삶을 천명한 여성은 기괴한 원시인 취급을 받고, 그 삶을 동경하면서도 체제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은 끝내 자기자신을 죽여 타인의 소유물로 남는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노라를 지향한 두 여성, 수잔나와 데이지는 사회가 규정 지은 한계에 떠밀려 어긋나 버린다.
"그들을 소중히 여겨야 해. 우리들에게 희망을 주니까."
1988년 게이바가 아닌 술집. 차별을 거부하고 배척에 저항하는 선동가들은 평범하지 않기에 거슬리고 강한 확신을 가졌기에 불편하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우며 벽장 속에 숨은 채 침묵해서는 안된다고 부르짖는 이들은 바로 노라다. 불의와 부조리 앞에서 절대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 노라를 인생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다. 어느 시대든 차별과 억압은 늘 있어왔다는 건 비극이지만, 바로 그 시대마다 각기 다른 노라가 존재한다는 건 희망이다. 그들이 건네는 희망이 개개인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옹호하고 긍정하며 결국 모두를 자유케한다. 노라로써 게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과격하게 드러내던 아이바를 감당할 수 없었던 스무살의 에릭은 도망쳐 버린다.
"이 사람, 내 와이프예요."
2020년 무대 뒤 응접실. 온갖 경계들이 무너지고 공격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완벽한 평등과 정의에는 도달하지 못한 이 아노미의 시대에, 더이상 절대적인 흑백 논리는 없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국을 반영한 하얀 마스크와 역젠더프리를 통해 그려내는 복잡다단한 정체성은 유동하는 시대상을 여실히 담는다. 이제 담론은 더이상 페미니즘이나 퀴어에만 머무를 수가 없고, 투쟁으로 얻어낸 결실만을 누린 세대는 과거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알려고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에 맞서고 있고, 여전히 어딘가에선 성정체성으로 인해 총에 맞아 스러지고 있다. 아버지 에릭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선동가의 현실타협과 변화를 납득할 수 없던 클레어의 집요한 질문에 아이바는 결국 달아나 버린다.
"사랑해."
2042년, 다시 무대 뒤 분장실.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 타란툴라 장면의 탬버린은 극장으로 되돌아온다.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로 살아온 데이지가 온 마음을 담아 적은 문장은 세월의 흐름으로 흐릿해졌지만, 그 진심만은 유효하다. 보기엔 매혹적이나 실상은 거미의 독을 빼내기 위한 몸짓인 타란툴라의 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모든 소수자의 삶을 은유한다. 원하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 의대를 떠나려는 스물두살의 데이지와 연극에 회의하고 은퇴를 생각하는 배우 수잔나는 함께 공명한다. 21세기의 데이지는 20세기의 데이지로 돌아가서 20세기의 수잔나와 첫만남을 가진다. 미술을 가르치는 직업을 사랑하고 쇼팽을 아끼던 데이지가 하얀 치자꽃을 귓가에 꽂아준 수잔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마지막 장면.
극 속에 담긴 극중극의 <인형의 집>은 다양한 연출을 통해 시대를 반영한다. 59년은 고전적으로, 88년은 실험적으로, 20년은 원작을 비트는 걸 넘어 왜곡할 정도로 도전적으로, 그리고 결국 42년은 다시 희곡 본래의 모습 그대로. 42년 연출이 택한 회귀는,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한 고전의 힘을 말한다.
"나는 자유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꿋꿋이 제 목소리를 내던 "노라"들은 극우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1959년 데이지) 제도에 타협하는 꼰대로 변절하기도 하며 (1988년 아이바) 때로는 기적적으로 끝까지 그 선동가의 기질을 유지하기도 한다. (2020년 클레어) 그 노라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내며 어떻게 변하든, 시대의 변화에 따라 또다른 노라들이 또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다시 커다란 목소리로 외친다. 나는 자유라고. 침묵하는 모든 이들을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며. 그 노라들이 외치는 희망 덕분에, 이 세상은 퇴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끊임없이, 또 끊김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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