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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in 샤롯데씨어터, 2020.03.11
류정한 드라큘라, 린지 미나, 강태을 반헬싱, 진태화 조나단, 이예은 루시, 김도현 렌필드, 이하 원캐. 류큘 자셋, 류린지 페어첫공이자 자첫. 아마도 페어 자막.
시츠 영상 속 린미나의 예쁜 음색에 기대를 많이 했었다. 드레스 리허설이 류린지였는지 오디에서 풀어주는 류큘 공연 사진도 전부 이 페어여서 더욱 기대가 커졌다. 그래서 이 관극이 너무 힘들었다. 다른 무엇보다 배우를 가장 앞세우는 공연예술의 후기에는 어지간하면 배우에 대한 불호를 기록하지 않고 삼켰지만, 대극장 주연 배우가 이 수준이라면 불호를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딱딱하고 감정 없는 첫 대사부터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비슷비슷한 표정, 친우의 비극에도 슬픔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발음에만 집중하며 드라큘라의 이름을 불러대는 비명까지. 유혹에 흔들리고 흔들림에 번뇌하는 미나의 고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날 무대 위에 미나는 없었다. 그저 고저도 강약도 없이 습득한 대본을 연습한 대로 밋밋하게 이어나가는 어설픈 배우뿐이었다. 엘리자벳사의 기억과 감정으로 주체할 수 없이 복받치는 처절함이 없으니, 미나의 2막 솔로 넘버들은 욕망에 흔들리는 루시의 솔로곡 감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체 미나와 루시가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더라. 영원히 빛을 떠나야만 하는 삶을 선택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 미나의 괴로움이 없으니, 새삼스럽게 제 운명에 탄식하는 드라큘라의 더롱거가 갑작스러울 정도였다. "신이시여 그가 가엾지 않나요" 라는 울먹임에도, 감정도 감동도 없는 엔딩곡을 들어야만 하는 내가 가엾다는 생각이 막을 틈도 없이 차올랐다.
개막한 지 어언 한 달이 되어가는데 아직도 노선과 연기가 잡히지 않은 이 배우가 앞으로 남은 세 달 동안 발전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상대 배우에 맞춰 노선 변주를 주는 류배우님을 보기 위해 후반부에 한 번쯤 더 보게 될 수도 있지만, 일단은 페어 자막을 결심했다. 사랑하는 배우 한 사람만 보기 위해 대극장 공연을 챙겨보기에는 관객인 내 시간과 체력과 재정, 무엇보다 마음이 그리 넉넉지 못하다.
이왕 불호후기를 시작했으니 다른 배우와 극에 대해서도 쓴소리 좀 더 얹겠다. 극악한 넘버가 많은 건 알지만 벌써부터 더블캐 배우들 목이 불안하다. 도현렌필드는 다 좋은데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미나에게 경고하는 마지막 대사가 하나도 안 들린다. 정확한 대사를 미리 찾아보고 간 이날 관극에서 처음으로 "배"라는 단어를 인지했다. 여기만 조금 신경 써주면 좋겠다. 예은루시와 수연루시는 호흡 조절을 배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말로 숨을 참으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정황상 분명한 최후를 맞이한 뒤에도 가슴과 배가 지나칠 정도로 확연하게 오르락내리락거려서 몰입을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배 위에 두터운 성경책이 올려져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움직임이 너무 심하다. 죄다 똑같은 이삭아더 표정연기도 불편하고, 과한 것도 자연스러운 것도 아닌 정모퀸시 몸동작도 어색하다. 원캐가 불호면 회전이 너무 힘들어요..
2막 첫장면 공동묘지 장면 왼쪽 기둥 중간에 틈이 있어서 묘지 안쪽 빛이 새어 나오고 있음을 무대팀은 인지하고 있는가. 넘버마다 들쑥날쑥하고 장면마다 답답하며 자리마다 달라지는 소리의 퀄리티를 음향팀은 알고는 있는가. 배우에게 박자조차 맞춰주지 못하는 어중간한 라이브연주에 대해 오케와 지휘자는 반성해본 적이 있는가. 프블 클라이막스와 잇츠오버 시작 직전 벌떡 일어나야 하는 드라큘라가 발을 디딜 침대 매트리스가 굳이 푹신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드라큘라가 펄쩍 뛰어오르고 펄쩍 뛰어내리는 제단이 굳이 그렇게까지 높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들이 각자 관리해야 하는 자잘한 소품은 너무 많고, 안전이 걱정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지는 플라잉관은 존재 자체가 불편하다. 좁은 샤롯데 무대에서 빡빡하게 움직이는 배우들의 동선은 중간중간 몰입을 방해한다.
스포있음
스토리에 대한 불호는 추후 리뷰에서 다룰 일이 분명 생길테니 몇 개만. 이 극은 드라큘라라는 고전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마땅히 설명되어야 할 이 인외의 존재에 대한 묘사가 부족하다. 트란실바니아의 드라큘라 성에 거울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은유적으로라도 설명을 했어야한다. 영원한 삶 대신 햇빛을 포기해야 하는 뱀파이어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는다. 무대와 소품을 사용한 연출을 통해 여러가지 염력을 보여주긴 하지만, "안개와 바람을 조종할 수 있다" 는 설정값을 대사 하나로 치워버리는 건 너무했다. 이외에도 최면을 통해 "세찬 물소리 들려와 / 뱃머리에 철썩이네 / 들판에 소 울음소리" 라는 힌트를 얻은 반헬싱의 대사에 개연성이 너무 부족하다. 배를 타고 트랜실베니아의 성으로 가고 있다는 동선은 렌필드를 통해 얻어낸 "항구의 배" 라는 말로도 이미 충분한 설득력을 지녔다. 초연 때는 이 새로운 힌트를 듣고 "저지대 지역을 통과하고 있어," 라는 등 현시점의 드라큘라 위치를 확인하는 대사가 있었다는데 그걸 왜 빼버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 모든 불호에도 불구하고 류큘만큼은 훌륭하여 감사했다. 회춘하기 전까지의 대사톤이 그날의 노선을 결정짓는데, 이날 류큘은 "잊혀진 시대에 잊혀지는 존재" 로써 지독한 허기와 외로움을 더는 억누를 수 없음에 "이 땅에서 이제 떠나갈 시간" 임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새 삶 새 땅 모든 욕망이 허락된 런던 그 어둠 향해"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며 세상을 정복하려는 의지를 내뿜는다. "삶의 유일한 빛" 이었지만 오랜 세월로 인해 깊이 침잠해버렸던 엘리자벳사를 향한 마음은 미나와의 만남을 통해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열정에 빠지면 통제가 잘 안되" 는 오만하고 위압적인 그는 미나의 고통에 처음으로 회의를 느낀다. "나는 미나를 사랑해.." 라며 흔들리는 두 눈동자 속에 담긴 허망함이 끝모를 어둠에 잠긴다. 미나가 마침내 빛을 버리기로 선택한 순간, 류큘은 400년 동안 갇혀 있었던 어둠을 더이상 감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날 구원해줄 사람은 오직 당신 뿐이야" 라고 말하는 류큘에게서, 5년 전 파리 오페라하우스 지하감옥의 류에릭이 선명하게 겹쳐보였다. 관 안으로 들어가 미나의 손에 칼을 직접 쥐여주며 다정하게 짓는 마지막 미소가 그의 온전한 구원을 실감케 했다.
첫공주보다 더 우아해진 위트비베이에서의 귀족인사도 좋았고, 기차역에서 탈선 드립에 실패한 후 "어렵네요, 여자를 웃게 하는 방법. 아무튼 연구해보겠습니다." 하는 애드립도 재미있었다. "날 저주해!!! 아아악!!!!" 하는 디테일은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다. 러빙유에서 "누가 알까요," 하며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지독히도 애달프다. "당신은!!! 이미 결혼했잖아," 하고 울먹이는 목소리. "당신의 자리를," 하며 제 옆을 오른손으로 가리키고 "찾아 돌아와요," 하며 부탁한다. 조나단의 목소리가 시작되는 순간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자신 대신 조나단 옆에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은 미나를 바라보며 아아아악, 소리지른다. 이날은 부케를 잘 받았는데, 내동댕이 치는 대신 손에 꽉 쥔 채 형형한 눈빛을 뿜어냈다. 거의 다 퇴장할 즈음에 내던지려고 하다가 그냥 그대로 들고 나가는게 시야에 들어와서 재미있었다.
이날 류큘은 너무 푹신한 침대 때문에 두 장면에서 휘청인 것과 피날레 장면에서 노래를 부르며 뒷걸음으로 관에 들어갈 때 망토 안 예쁘게 잡은 것만 아쉬웠다. 프블 회춘 전에 빨간 후드는 계속 벗겨지는데 의상팀이 관리 좀 해주면 좋겠고. 불호로 가득한 후기지만 마지막은 사랑스러운 내용으로 끝내야지. Fresh Blood 넘버 직후 암전이 내리면, 마무리 자세 그대로 양팔 위로 든 채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는 류큘이 귀여워서 매번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약처럼 갈망하게 되는 류큘, 곧 자넷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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