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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Hedwig

헤드윅 (2019.10.20 2시)

누비` 2019. 10. 21. 23:50

헤드윅

in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2019.10.20 2시

 

 

 

 

마이클리 헤드윅, 유리아 이츠학. 마율 페어 서울 세미막.

 

 

그토록 사랑했던 언니가 2년 만에 돌아왔다. 그때처럼 준전관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서울공이 고작 세 번 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야 마주하게 됐다. 다시 만난 언니는 여전히 애틋하고 멋지고 아름다웠지만, 여러모로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자막의 존재가 무대 위의 언니를 훨씬 자유롭게 했고, 두 번째 도전은 한층 강렬한 표현과 묵직한 감정들을 가능케 했다. 지난 시즌에서 무척 사랑했던 디테일들 몇몇이 사라졌지만, 다채로운 애드립과 새로운 디테일이 새로운 헤드윅을 든든하게 받쳐줬다. 이미 만났던 캐릭터를 새로운 시즌에서 재회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반가움과 아쉬움과 기쁨과 감탄을 야기하므로, 이 모든 감정을 경험하게 해 준 마언니의 컴백이 무척이나 고맙다.

 

 

스포있음※

 

 

이날 마욤드윅은 본인의 히스테리컬함을 웃음 아래 숨기는 것이 몹시 능숙한 언니였다. 온갖 풍파들을 거쳐오며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과거라는 이름으로 깊숙이 묻어버린 채,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걸며 툭툭 내뱉듯 언급한다. 이전 시즌에서는 무던해 보이려 노력하고 있음이 감춰지지 않았는데, 이날은 가발과 눈 화장 뒤에 완벽하게 숨겨버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The origin of love 넘버가 지난 시즌에서는 몹시 철학적이어서 건조했다면, 이날은 이미 내면화된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느낌이었다. 풀컬러로 칠한 그림일기를 청각적으로 펼쳐내는 담백함이 마언니의 성정을 여실히 담아낸다. 클라이막스에서 "looking through one eye-" 하며 날카롭고 청명한 음색으로 길고 선명하게 직선으로 찌르는 마지막 음을 무척 사랑했는데, 이날은 쭉 지르다가 끝음을 안으로 둥글게 말아내며 선연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이 부분에서 왼쪽 손바닥으로 왼쪽 눈을 가리는 디테일도 없어졌다. 자신의 꿰뚫린 상처보다 이야기의 극적인 효과를 강조하는 마언니에게서 비극미보다 비장미가 강하게 느껴졌다.

 

 

The angry inch. 지난 시즌의 마언니는 모든 감정을 처음부터 다시 겪어내는 듯 치솟는 검붉은 피에 완전히 물들어 버렸지만, 이날은 넘버 안에 파묻어버린 그 당시의 공포와 절망과 아픔과 고독을 선명하게 전달하는데 집중했다. 영혼을 긁어내는 듯한 도입부의 비명 같은 절규와 마치 성호를 긋듯 이마와 어깨, 가슴을 짚어내는 손동작이 한셀의 두려움과 절박함을 고스란히 드러내지만, 그 감정이 현재의 헤드윅에게 전이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넘버 직후의 얼굴과 반응 역시 전혀 다르다. 지난 시즌에서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 가득 경악을 담은 채 굳었는데, 이날은 이츠학이 마지막 고음을 내지르는 타이밍에 맞춰 양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치켜든 채 얼어붙었다. 당당히 이겨냈노라 믿고 있지만 실상은 여전히 고통 안에 박제된 사람처럼.

 

 

지난 시즌에서 루터가 팔짱을 끼는 순간 표정이 확 밝아지며 미련 없이 팔랑팔랑 퇴장해버렸는데, 이번 시즌에서는 알라딘의 A Whole New World 를 무반주로 부르며 결혼과 자유에 대한 기쁨을 양껏 표현한 뒤에야 폴짝폴짝 뛰어나간다. 이 장면 이전에는, Sugar Daddy 넘버 직후 물병을 가지러 무대 앞쪽으로 걸어나오다가 분노의 질주 악보를 발견하는 장면이 추가로 삽입됐다. 한국어로 된 그 넘버를 이츠학에게 부르라고 시키는데, 이는 이츠학의 실력과 그를 향한 헤드윅의 질투를 부각하는 동시에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무대 사이에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었다. 이 넘버는 마이클리 배우 본체가 직접 만든 곡이라고 들었는데, 멜로디와 가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Sugar Daddy 를 부르기 전 벗어버린 주황색 자켓 안의 지브라 무늬 비키니 상의와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채, 마언니는 다리를 활짝 벌리며 쪼그려 앉아 피가 철철 쏟아지는 제 아래를 가감 없이 객석에 내보인다. 적나라한 자세와 거침 없는 언어들이 인간 내면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전한다. 이날 헤드윅의 영혼을 지배한 것은 실체가 없는 반쪽이었지만,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실재하는 앵그리인치였다. 한 차례 완전히 산화해버린 마음은 그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헤드윅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Wig in a box 넘버 직전의 독백이나 토미와 함께한 기억을 전하는 장면들에서, 마언니는 지난 시즌보다 감정적 거리를 둔다. 앵그리인치에 대해 "What I have to work with," 이라 답하며 울컥 치미는 감정을 꾹 삼키지만, 그것이 닿은 제 왼손을 두 번에 걸쳐 허벅지에 쓰윽 쓱 닦아내는 토미의 손동작과 치졸한 변명에 대체 뭐가 두려운 거냐며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감정을 싣는다. "I love you" 라고 감정 없이 읊는 토미의 묵직한 톤이 대비되며 극적 긴장의 정점을 찍는다.

 

 

 

 

내내 억눌렀던 감정은 Hedwig's Lament 부터 Exquisite Corpse 까지 이어지며 제약 없이 폭발한다. 공간을 집어삼키는 절망을 분출하며 온몸으로 절규한다. 토마토를 양손으로 내팽개치고 스스로를 내던지듯 무너지는 헤드윅. 그의 절규 대신 쏟아지던 음악이 죽음처럼 내려앉으며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Wicked little town reprise. 잔잔하고 담백하게 헤드윅의 노래에 진심을 얹어 노래하던 토미는,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양팔을 벌리고 고개를 옆으로 살짝 떨군 채 천천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돈다. Jesus Christ를 personal savior로써 영접하진 못했으나 그의 work는 사랑한다던 헤드윅이, 그가 전파한 용서와 사랑을 일깨우길 바란다는 듯이. 그 순간의 토미는 혹은 토미의 형상을 한 헤드윅의 이상향은, 흠잡을 데 없는 그의 반쪽이다. 자기 자신을 투영한 토미를 통해, 헤드윅은 상처 난 영혼을 부둥켜안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시를 세워 타인을 상처 입히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완벽한 정적 속에서 헤드윅은 이츠학을, 그리고 앵그리인치를 쳐다본다. 흡사 완벽한 타인을 바라보듯 생경한 눈빛으로, 헤드윅은 권력을 앞세워 강제로 곁에 남겨두었던 이들을 똑바로 응시한다. 마이크를, 제 가발을 품에 끌어안고 가만히 앉아있는 헤드윅의 곁에서 Midnight Radio 의 첫음이 까마득한 적막을 깨뜨린다. 틀어쥐고 있던 권력을 손에서 놓아버리는 순간, 그 역시 사로잡혀있던 권력에서 풀려난다. "All the misfits and losers," 하며 루저라는 단어에 본인을 가리키는 마욤뒥은 자기자신 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이들을 끌어안는 포용의 단계로 나아간다. 그럼에도 마욤뒥은 끝내 온전히 홀가분해지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눈부시고 아름답게 귀환한 이츠학을 바라보는 눈빛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일렁인다. 감탄과 선망, 동경, 그 이면의 지울 수 없는 자기 연민. 핑크색 마이크에 꾸욱 키스를 눌러 담고는 가볍지만 묘하게 위태로운 걸음으로 퇴장하는 마언니의 남은 인생 역시 결코 평탄치는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내 외면해온 제 근원을 다시 마주하고 또다른 질문을 끌어안은 채 새로운 목적과 의미를 찾아내 삶을 살아가겠지만, 그 길은 우리 모두의 삶이 그러하듯 쉽지만은 않으리라.

 

 

 

 

지난 시즌에서도 상황과 인물에 맞춰 완전히 달라지는 마언니의 발음에 감탄했었는데, 이날 한셀의 엄마 헤드윅 슈미츠의 발음이 놀라울 정도로 독일인 발음 그 자체여서 정말 놀랐다. 뉴스 앵커 발음도 매끈한 억양에서 유려한 강세가 있는 억양으로 바꿔왔더라. 이외에도 자막을 활용한 텔레파시 드립이나, Kant, You can't touch this 뭐 이런 식으로 논문 제목을 살짝 비틀며 팝송을 가볍게 삽입했다. 영어의 섹드립보다는 자막과 병행될 수 있는 언어유희에 집중했고, 블로우 잡이나 핸드잡 모션은 지난 시즌보다도 더 적나라해졌다. 컨츄리송 느낌을 주던 지난 시즌과 다른 편곡의 Sugar Daddy 가 좋았고, 카워시도 훨씬 강력해져서 깜짝 놀랐다. 동일 무대에 올랐던 이전 필모 유머를 넣어 짧게 Sweet Transvestite 를 부르며 춤을 추기도 했고, 아예 Time Warp 일부를 추기도 했다. 벽뚫남 언급도 있었고. 계속 데자뷰를 강조하긴 했지만, 설마 JCS 부분에서 Heavens on their minds 를 불러주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여 조금 아쉬웠다. 모피코트 대신 BTS 담요를 둘러메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변화도 유쾌하고 재미있었다.

 

 

날 선 눈으로 흔들림 없이 하늘을 똑바로 응시하며 엄마와 자신이 들어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었노라 말하던 마언니는, "jammed together," 이라고 강한 어조로 말하며 강압적으로 손바닥을 꽉 찍어 누르는 동작을 취한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을 향해 왜 그랬냐는 듯 "too much time on his hands!" 라고 소리 지른다. 툭 튀어나온 본심을 맑은 미소로 가리며 객석에게 사과를 한 언니는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운명을, 하늘을, 이러한 것들을 만든 신을, 그리 신용하지도 의지하지도 않았던 헤드윅에게 십자가를 진 예수를 통해 메세지를 건네는 토미의 디테일이 단순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다음 관극 때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듯한데, 남은 표가 한 장뿐이라니.

 

 

Midnight Radio 에서 너무나 지쳐버렸다는 듯 객석을 등진 채 허리를 숙이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마언니의 자세가, Tear me down 에서 너무나 자신만만한 태도로 상체를 숙이고 마이크를 엉덩이에 가져다대며 세상의 모든 편견에 조롱을 던지던 자세와 똑같았다. 자신감 가득하던 헤드윅이 인생을 반추하고 스스로를 마주하며 모든 감정과 번뇌를 장렬하게 산화시키는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이 자세 하나로 온전히 맞물렸다. 극 하나에 고스란히 담아내는 마언니의 인생은 마주할 때마다 새롭고 편안하고 신선하고 낯익다. 남아 있는 표 하나로 마언니를 잘 보내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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