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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예술/Hedwig

헤드윅 (2019.10.26 1시)

누비` 2019. 10. 28. 22:52

헤드윅

in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2019.10.26 1시

 

 

 

 

마이클리 헤드윅, 제이민 이츠학. 마욤뒥 세미막. 마제 서울페어막.

 

 

지난 시즌 9번과 이번 시즌 2번의 마언니 관극을 통틀어 가장 완벽한 공연이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과거가 고통스러운 클라이막스를 거쳐 결말까지 매끄럽게 이어지며 온전한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분출되는 헤드윅의 감정과 마지막 장면의 여운에 오롯이 빠져들어 커튼콜 직전까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펑펑 눈물을 쏟은 건 처음이었다. 매번 다른 헤드윅을 보여주던 마언니가 자체막공 회차에 이토록 완전한 서사를 선사해주어 감사하다. 게다가 17년 마언니 첫공에서 만난 뒤 계속 어긋나던 쭌감님까지 만날 수 있어 몹시 기뻤다. 마언니의 서울막공을 가지 못하는데다가 지방공도 확신할 수 없어서 아쉬웠는데, 그 섭섭함을 단숨에 날려버린 레전공으로 마언니를 보내줄 수 있어 다행이다.

 

 

 

 

스포있음※

 

 

닳고 닳아 초탈해버린 느낌이 강했던 직전 회차와 다르게, 이날의 마언니는 여전히 토미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고 다시 깊게 실망하길 반복했다. 토미를 알기 전에 겪었던 사건들로 인한 당시의 절망과 현재의 고통은 잘 갈무리하여 음악으로 승화시켰지만, 토미와의 관계는 현재진행형으로 마언니를 상처 입힌다.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제대로 보듬지 못하고, 더이상 상처 입지 않겠다며 굳건한 벽을 두텁게 쌓기만 한다. 졔츠학은 그런 헤드윅이 안쓰러워서, 그를 인간적으로 연민하기에, 계속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세상 모든 것에 한껏 날을 세운 헤드윅의 분노는 예외를 두지 않는다. 이츠학의 재능에 대한 질투는 갑옷처럼 꽁꽁 싸맨 헤드윅의 자존감을 자꾸만 자극하고, 헤드윅은 시시때때로 그를 견제한다.

 

 

"What is THAT?" 이라는 토미의 물음을 미처 생각치 못했다는 듯, 헤드윅은 살짝 뒷걸음질 치며 문득 꿈에서 깬 표정을 짓는다. 오른손을 허벅지에 슥, 닦으며 무감각하게 말을 내뱉은 토미가 도망친 자리에 남겨진다. The Long Grift 넘버를 잇지 못한 헤드윅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객석을 향해 괜찮다는 듯 웃어보인다. 두 번째 시도에서도 말문이 턱 막히자 당황하며 객석을 바라보는 순간, 헤드윅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린다. 마치 Wig in a Box 에서 거울을 보고 처음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떠올렸던 것처럼, 헤드윅은 너무나 생경한 객석의 눈들을 마주하고 공포에 질린다. 도망치듯 뛰쳐나갔지만 자신의 무대를 비울 수 없던 헤드윅은 가발만 바꿔쓰고 금세 돌아온다. 이미 무대를 장악하고 있는 이츠학 대신 백업코러스의 자리에 앉은 그는, 신경질적으로 마이크스탠드를 기울이며 제 목소리를 얹는다. 당연히 제 존재감이 드러나리라 생각했던 헤드윅은 여전히 모두의 집중이 이츠학에 쏠리고 있음을 인지하고 멈칫한다. 어릴 적 오븐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헤드윅은 메인보컬과 어우러지는 백업코러스를 넣으며 넘버를 마무리한다. 모든 감정이 침잠해버린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헤드윅은 이츠학을 붙든다. "Think of the publicity. Think of the power." 신들마저 두려워한 권력을 상상해보라며 눈을 번뜩이는 헤드윅의 이면에,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absolute power 를 향한 갈망과 절망이 동시에 비친다.

 

 

 

 

어두운 무대 한가운데의 스탠드마이크 앞에 선 헤드윅의 머리 위로 좁고 불투명한 흰색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다. 정확히 헤드윅 한 사람을 비추는 그 조명은 새장처럼 그를 가둔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겹겹히 쌓았던 껍질은 더이상 안에서 밖으로 나올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그 안에 홀로 웅크린 채 Hedwig's Lament 를 부르는 헤드윅의 뒤편으로 트레일러가 톱니바퀴 같은 절단면을 내보이며 마치 껍질이 쪼개지듯 반으로 갈라진다. 연기에 휩싸인 채 흐릿한 조도에 잠겨있던 무대가 갑작스러울 정도로 높고 선명한 주황색 조명으로 채워지며 강렬한 Exquisite Corpse 의 음악이 비명처럼 쏟아진다. 보이지도 않고 깨뜨릴 수도 없는 사위의 벽을 향해 온몸을 내던지며, 헤드윅은 몸과 음성과 영혼으로 절규한다. 그를 돕기 위해 이츠학이 달려오지만, 헤드윅은 거세게 그 도움의 손길을 뿌리친다. 그리고 이츠학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마치 이게 다 네 탓이라는 듯. 아무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절대적인 고독에 휩싸인 채, 헤드윅은 스스로 세운 거대한 장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친다. 비명을 쏟아내며 마지막까지 발버둥치지만 끝내 무너진다.

 

 

헤드윅을 배신하고 크게 성공하고 크게 실패하며 나름의 굴곡을 겪은 토미는, 그만의 방식으로 성장해있다. 헤드윅의 노래에 제 마음을 담아 선사하는 마지막 인사. Wicked Little Town Reprise. 마토미는 양팔을 벌려 십자가를 만든다. 마치 제 이마에 그린 은색 십자가를 온몸으로 그려내듯이. 천천히 왼쪽으로 돌아서 객석에 뒷모습을 보인 채 잠시 멈춰선 그는, 다시 마저 반바퀴를 돌아 시선을 멀리 던진다. 그리고 객석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 바라본다. 완전한 타인들의 시선에 둘러싸여 공포에 질렸던 헤드윅과는 다른, 차분하고 단단한 토미의 미소. 제 말이 헤드윅에게 닿았음을 느끼기라도 한 듯,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건 토미는 후련한 표정으로 작별을 고한다.

 

 

사그라드는 환호 속에 홀로 남겨진 헤드윅은 천천히 왼손을 들어올려 실버크로스가 그려진 이마를 만진다. 이마를 꾹 누른 그의 왼손바닥에 선명하게 은색 십자가가 찍힌다. 그 손으로 마이크를 집어들고 가발을 향해 손을 뻗다 멈칫한다. 헤드윅은 제 정체성이자 자기자신이었던 가발을 생경한듯 가만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온 가슴으로 꽉 끌어안는다. 그동안 고마웠다는 듯. Midnight Radio. 흐르는 반주 위에 가사를 한 음절씩 얹으며, 헤드윅은 비로소 자신을 휘감고 있던 장벽의 정체를 깨닫는다. 강제로 붙들고 있던 권력을 탁 놓아버리며, 헤드윅은 울듯이 웃는다. 떠나지 않겠노라 고개를 젓는 이츠학을 끌어당겨 이마를 맞댄다. 헤드윅이 그려준 토미의 실버크로스는 다시 헤드윅에게 되돌아오고, 헤드윅은 그 실버크로스를 이츠학에게 건넨다. 이마에 실버크로스가 새겨진 이츠학은 무대를 떠나기 직전까지 헤드윅의 손을 놓지 못한다. 쭉 뻗은 헤드윅의 손끝을 꼭 잡고 있던 이츠학은 그 손등에 입을 맞춘다. 실버크로스가 손바닥에 새겨진 헤드윅의 왼쪽 손등에. "All the misfits," 하며 가슴에 손을 얹은 헤드윅은 "losers," 하며 그 손으로 가슴을 툭툭 두 번 치고 환하게 웃는다. 제 모든 걸 긍정하며. 너무나도 화려한 이츠학의 재등장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워하는 헤드윅의 얼굴에 질투나 부러움은 없다. 찬란하게 피어난 꽃을 향한 순수한 동경과 감탄을 담아 두 번이나 그를 돌아본 헤드윅은, 마이크를 내려놓은 순간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고 성큼성큼 문을 향해 걸어간다. 새로운 삶의 장으로 나아가는 헤드윅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후련하여 더없이 찬란하다.

 

 

 

 

마언니는 지난 시즌에서 매니저 마이클을 부르며 "my cunt!" 를 보지 못했느냐 물었는데, 이번 시즌에서는 "my cock!" 를 불러댔다. 여성의 성기도 남성의 성기도 갖지 못한 채, 어중간한 그 어딘가에 위치한 헤드윅의 성정체성이 시즌을 뛰어 넘어 표현된 이 애드립에 내적 찬사를 날렸다. 그리고 이날 관극에서 헤드윅 슈미츠의, 동시에 헤드윅의 대사인 "Don't move!" 라는 문장이 깊이 박혔다. 한셀은 성전환수술과 가짜 여권, 가발을 통해 '헤드윅' 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토미는 이마의 실버크로스를 통해 '토미 노시스' 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는다. 움직이지 말라 명령하는 타인에 의해서. 토미는 실버크로스를 다시 헤드윅에게 돌려줌으로써, 헤드윅은 가발을 내려놓음으로써, 그 언어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삶은, 온전할 수 없다.

 

 

익스퀴짓에서 곧게 위로 뻗은 오른손을 삐걱대는 태엽처럼 오른쪽 방향으로 탁탁탁 내리는 마언니의 제스쳐가 지난주 공연에도 있었다. 객석에서 볼 때는 12, 11, 10, 9로 이어지며 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시계 바늘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시간마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한 혼란스러운 헤드윅의 감정을 드러내는 디테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는데, 믿나 후반부에서 이츠학이 다시 돌아오기 직전에 마이크를 든 왼손을 하늘로 곧게 뻗어내는 마언니를 보고 순간 놀랐다. 익스퀴짓 만큼 길고 선명한 동작은 아니었지만, 쭉 뻗은 왼손을 왼쪽 방향으로 곡선을 그리며 내리는 모습이 객석에서 볼 때는 마치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시계 같았다. 절망과 혼돈에 사로잡힌 채 엉망으로 왜곡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고통받던 헤드윅이 스스로 온전히 해방되면서 비로소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마언니의 이 작은 동작 하나에 커다란 해석을 자의적으로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누누히 말하듯 이건 헤드윅이다. 배우가 표현하는 헤드윅을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의 몫이고, 그 정답은 무한대로 존재한다. 그래서 헤드윅은 매번 새롭다.

 

 

 

 

그 어떤 것도 확언할 수 없는 미지의 미래로 올곧게 걸어나가는 마언니의 뒷모습이,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떠오를 듯하다. 상처도 미련도 아픔도 고통도 훌훌 털어버린 채 새하얀 도화지를 새롭게 채워나가기 위해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경이롭고 아름답다. 이토록 올곧고 단단한 헤드윅으로 이번 시즌을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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