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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의 눈동자

in 디큐브아트센터, 2019.03.16 7시





김지현 여옥, 박민성 대치, 테이 하림, 김진태 윤홍철, 유보영 동진 모, 김승후 최대운.



<모래시계>에 이어 <여명의 눈동자>가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처음에 들었을 때는, 부정적이었다. 국민드라마라 불리던, 무려 30년 전의 드라마를 굳이 무대 위로 가져온다는 발상이 안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두 극 모두 비관적인 예상을 보란듯이 깨뜨렸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기억되는 엄청난 히트작을 이 정도로 각색한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참고) 라는 모래시계 후기를 남겼는데, 여명 역시 같은 맥락에서 만족스러웠다. 전개에 필요한 장면들을 깔끔하게 구성하여 드라마를 보지 않은 관객도 빠르게 진행되는 스토리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고통과 혼란과 아픔으로 넘실대던 1940-50년대의 여러 비극적인 사건들을 보여주는 연출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채,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이 잡혀 있었다. 한국인이기에, 더 나아가 인간이기에 공감할 수밖에 없도록 장면들을 말끔하게 풀어냈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그 안에 휩쓸린 개개인의 인생을, 암흑 같은 고통 속에서도 희미한 여명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지를 담아낸 극이었다.



투자사기라는 악재로 인해 개막 자체가 불투명했으나, 무대를 비우고 무대석을 만드는 과감한 결단과 함께 가까스로 극이 올라왔다. 무대석 사이의 통로로 테이블 등의 간단한 무대 소품을 이동시키지만, 기본적으로 무대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 텅 빈 공간을, 배우들이 채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혼신을 다해 열연하는 배우들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관극이리라 단언한다. 매 장면마다 영혼을 갈아 연기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아무 것도 없는 무대를 매번 다른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앙상블 배우들의 모습에 저절로 탄성이 끓어올랐다. 솔로 넘버가 있는 몇몇 배우분들의 음색과 톤이 너무 좋아서 감탄도 많이 했고, 저마다 다른 색감의 감정을 실어내는 표정 연기를 일일이 다 눈에 담지 못함이 속상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훌륭했던 배우들께 커튼콜 내내 끊임없는 박수를 쏟아내며 이 감사함이 전해지길 간절히 바랐다. 관극 후에도 배우들의 얼굴과 이름을 다시 확인하며 인물들을 곱씹었다. 이날 문화사색 촬영을 하고 갔는데, 방송이 나오면 장면들을 다시 찬찬히 되돌아보고 싶다.



매 씬이 전부 좋아서 오히려 일일이 언급하기가 힘들다. 온갖 풍파를 겪어내며 쌓이고 침잠하는 지현여옥의 표정과, 뜨겁게 폭발하는 민성대치의 목소리와, 짙고 깊은 테이하림의 눈빛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시대를 넘나드는 장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과 자막을 활용한다. 색감 자체를 다양하게 쓰지 않되, 톤이나 대립되는 색감을 잘 활용한 조명 연출이 좋았다. 해방 이후 사상으로 대립하는 군중들을 붉은 색과 푸른 색 조명으로 구분짓는 연출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의견이 달라 대치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각자 발 딛고 선 바닥을 비추던 네모난 조명이, 마치 길처럼 길어지며 이어지는 연출도 있었다. 지바고에서 좋아했던 조명연출이라서 괜히 좋았다. 대극장의 핀조명이 작은 무대에 사용되는 것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특별했다. 무대가 비어있음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대극장 극으로 올라왔다면 어떻게 표현되었을지 궁금한 장면들이 있어 속상하고 아쉽다.





여명 극 자체도 참 좋았지만, 무대 위의 나비석이 각별했다. 일개 관객으로서 "대극장 무대 위에서 객석을 바라보는" 특별한 경험을 또 어디서 해볼 수 있겠는가.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하염없이 디큐브 객석을 바라보고 있자니 묘한 벅참과 감동이 일었다. 그저 짐작만 해보던 무대 위 배우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보게 되고, 바로 그 객석에 앉아 이 무대를 바라보던 기억과 감정이 밀물처럼 차오르기 시작했으며, 무엇보다 오로지 공연장이라는 공간에서만 공유될 수 있는 특유의 동시성과 일회성의 가치가 새삼스러운 전율을 선사했다. 무대와 객석, 배우와 관객, 이들이 함께 존재하는 그 순간, 그 공간에서만 나눌 수 있는 현재성. 디큐브 안내 방송에서 언급한 "순간의 예술 (art of moment)" 이라는 표현은, 오로지 공연이라는 장르에서만 가능하다. 이 짜릿한 현장감에 이미 중독되어 버렸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연뮤덕임을 포기할 수가 없다.



특별한 객석에 앉아 특별한 이 극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여명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많은 사람들이 놓치지 않길 바란다. 정말 좋은 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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