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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벽
in 정동극장, 2019.03.24 3시
윤석기(조조 役), 정지혜(정욱 役), 최하늘, 김의환(유비 役), 정혜수, 이금미(주유 役), 김현호, 이재박(관우 役), 이재현(장비 役), 이성현(도창), 최정원, 박수범, 임지수(공명 役), 김수인, 김하연(자룡 役), 신예주, 엄지, 심예은, 이용전, 유창선. 프로필과 배역이 명시된 자료를 찾기 힘들어서, 검색으로 정확히 확인 가능한 배우분들만 배역을 기재했다.
작년부터 극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지라, 삼연 소식에 망설임 없이 예매하고 개막 초반 회차로 만나고 왔다. 판소리 <적벽가>를 대중적으로 풀어서 다듬어낸 이 작품은, 담백하고 정갈한 직선의 무대와 절도있고 우아한 곡선의 춤선으로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때로는 까랑까랑하고 때로는 유들유들한 목소리들이 담아내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객석을 온전히 몰입하게 만든다. 심장까지 뒤흔드는 울림 큰 북소리와 섬세하고 유려한 대금소리, 국악기의 음색에 녹아들듯 어우러지는 드럼의 심벌즈 소리가 휘몰아치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박진감 넘치는 상황을 쫄깃하게 펼쳐낸다. 100분의 공연 동안 시각적, 청각적 자극이 매끄러운 조화를 이루며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묵직하면서도 가뿐하고,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무대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얼굴 가득 피어난 미소가 관극 후에도 한참 동안 지워지질 않았다. 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정말이지 특별함 그 자체인 극이었다.
매 장면 마다 내적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 무대 위 모든 요소들이 완벽했다. 연습을 얼마나 했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동작에 기합을 팍팍 넣은 배우들의 안무 하나하나는, 금세 전체적인 군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마치 커다란 파도 같은 웅장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압도한다. 맨발에 발목 아대만 꽉 고정한 채, 단단하게 무게중심을 잡고 기품과 힘이 공존하는 춤을 추는 배우들의 열기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다. 판소리와 현대무용이 함께 어우러지고, 진지하고 맹렬하면서도 동시에 익살맞고 유쾌한 연기를 재치있게 내보인다. 독창 부분에서 다른 배우들과 고수가 어허, 얼씨구, 하며 넣는 추임새가 너무너무 좋았다. 무대 한가운데에 위치한 악사 분들이 잘 보이는 것과, 무대 위 배우들이 퇴장한 뒤 반주만 깔릴 때 그 공간의 테두리가 조명으로 빛나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모든 배우들이 하나씩 들고 있는 부채 또한 극의 묘미다. 촤륵, 혹은 쫙, 하고 펼쳐지는 부채는 다른 어떤 효과음보다 강한 여운을 남긴다. 모든 살을 완전히 펼친 부채를 일제히 허공을 향해 던지는 장면은 극의 시각적 정점이라 표현해도 손색 없다. 초반에는 짱짱하던 부챗살 사이의 한지 끝부분이 후반부에는 너덜너덜해졌을 정도로, 공연 내내 부채가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부채의 색은 인물과 장면에 따라 달라지는데, 특히 적벽 전후의 부채 변화가 아주 재미있었다. 조조와 위나라 군사들의 완전히 빨갛던 부채는, 적벽 이후 빨간 바탕에 각기 다른 무늬로 불에 그슬린 검은 자국이 그려진 부채로 바뀌어 있었다. 심플함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디테일이 극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흑, 백, 적. 삼색만으로 충분히 표현되고 구분되는 무대 전반의 색감 활용이 극단적인 절제미를 가능케 했다. 단아하면서도 감각적인 의상을 기반으로, 포인트가 되는 천의 색을 통해 배우들의 역할을 다채롭게 구성한다. 전반적인 조명 연출이 말끔하고 적절하게 장면 장면을 받쳐준다. 개인적으로 조조의 첫 등장 장면의 조명 연출이 기억에 남는다. 천장에서 바닥까지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하얀 조명들이 두 줄로 늘어서고, 그 너머 무대 상층에서 조조가 등장한다. 마치 거대한 건물의 기둥들이 늘어선 듯한 인상을 주는 그 조명들이, 옷을 길게 늘어뜨리고 느릿하게 걷는 조조의 근엄함을 부각시켰다.
이 극의 특색인 젠더프리 배역 역시 극의 매력을 한층 끌어올렸다. 공명과 주유와 조자룡이, 조조의 오른팔인 정욱이, 맹렬하게 싸우기도 하고 전쟁의 고단함에 지쳐있기도 한 군사들이 여성인 것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당연스레 동등한 위상으로 평등하게 존재하는 여성과 남성이, 안정감과 편안함을 구축했다. 맑은 얼굴로 날카롭고 명징한 책사의 모습을 보이는 공명과, 카랑카랑하고 서슬 퍼런 카리스마를 뽐내는 자룡이 정말 멋지다. 아랑가의 도창으로 만났던 정욱 역의 정지혜 배우 역시 감칠맛나는 연기와 목소리로 감탄을 자아냈다. 묵중한 존재감을 내뿜는 관우와 캐릭터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장비, 단정한 우아함이 있는 유비의 의리도 빠짐없이 멋들어지게 표현된다. 모든 장면에서 성별을 가리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는 배우들이 극을 완전하게 만들었다.
남병산에 올라 동남풍을 비는 장면에서 왼손목 검은 아대의 긴 끈 세자락이 바람을 이끄는 안무를 더욱 풍성하게 했고, 거대한 북의 묵직한 울림과 날랜 동작으로 매끄럽게 전환되는 배우들의 동선이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시켰다. 동남풍을 불러온 뒤 삽시간에 자리를 피한 공명을 추격하라는 주유의 단호한 명령과 함께 조명이 번뜩이며 긴장감을 더한다. 오나라 군사들은 목마를 태운 두 사람의 주변에 서서 빠르게 노를 젓고 발을 구르며 긴박하게 쫓아보지만, 공명은 여유롭게 그들의 속셈을 짚어내고 멀어져간다. 삼고초려나 도원결의 등 모든 배우들이 온몸을 불사르며 웅장하게 채워내는 장면들도 매우 좋았지만, 상기 언급한 두 장면의 쫀쫀한 연출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무래도 개막 초반이다 보니 마이크 음향과 음량 조절은 조금 더 필요해보였다. 동자와 노숙 부분에서 배우 마이크가 늦게 켜지기도 했고, 악기 음향이 다소 커서 배우들의 가사가 묻히는 부분도 조금 있었다. 조명이 안 들어가거나 타이밍 살짝 안 맞는 부분도 없지 않았고. 그러나 이렇게 사소한 부분 이외에는 모든 점이 어마어마하게 훌륭했다. 놀랍고 멋지고 재미있어서 매순간 '눈을 뗄 수 없는' 공연이, 참으로 오랜만이다. "전통의 가치, 창작의 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정동극장의 기획공연들을 앞으로도 꼭 챙겨봐야겠다. 이 엄청난 극을 모두가 꼭 만나서 이 행복함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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