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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노트

in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2017.01.13 8시 공연





한지상 라이토, 김준수 엘, 강홍석 류크, 박혜나 렘, 벤 미사, 서영주 소이치로, 이수빈 사유. 핝라이토, 샤엘. 데놋 재연 자첫자막. 2017년 첫 관극.  



재연 기간이 워낙 짧기도 하고 심지어 예당인데다가, 초연이 크게 취향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볼 생각이 없었음에도 오로지 한지상 배우 복귀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극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 목적만큼은 확실히 달성했다. 비록 극에 대한 불호는 더욱 극심해졌지만, 다채로운 연기를 감상하고 그리웠던 목소리와 재회하는 기쁨은 양껏 누렸다. 전반적으로 넘버 자체에 대한 만족도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불호 요소 중 하나였던 끝음 날리는 버릇이 거의 완전히 없어진데다가 보이스 톤 자체도 무척 깨끗하고 깔끔해서 듣는 내내 편했다. 여기에 전작들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제대로 취향인 연기를 마주하는 순간의 짜릿함이 전율을 선사했다. 자, 이제 차기작을 주시죠. 





극에 있어서 '연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 아무리 좋은 배우라고 하더라도, 극의 구멍을 완벽하게 메울 수는 없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열정적으로 연기를 하더라도, 단편적인 장면들의 완성도가 높아질 뿐,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관통하는 일관성을 창조해낼 수는 없다. 극의 개연성이 극도로 떨어졌기 때문에 원작의 그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제 개성을 내보일만한 기회 자체가 부족했다. 초연은 주연 다섯 명이 나름대로 균형 있게 '맞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는데, 재연은 캐릭터들 간의 관계성이 극의 주제를 명확하게 살리지 못했다. 렘과 미사의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인간' 만이 지닌 고유의 특성이 부각되어 극에 대한 이해도를 높인 점이 초연 관극에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재연 관극에서는 관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짜임새 있게 엮이지 못하고 얼기설기 이어져만 있는 듯했다. 초연이든 재연이든 자첫자막을 했을 뿐이라서 뭐가 크게 달라졌는지 정확하게 인지를 하지는 못하겠다. 혹은 크게 변한 부분이 별로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 자신의 관점과 시야가 달라지면서 비평의 방점 또한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원작이 있는 2차 창작이 지니는 한계를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개연성과 완성도는 좋게좋게 넘어가 줄 수가 없다. 



그리고 할인 없이 그 비싼 가격 다 받아먹을 거면, 극 시작부터 끝까지 전 스태프도 집중들 좀 하자. 1막 초반에 앙들 마이크 제 때 안 켜질 않나, 음향에 잡음이 막 섞이질 않나, 배우가 마지막 음 마무리도 안했는데 조명을 완전히 꺼버리질 않나. 극의 완성도를 마구 떨어뜨리는 사소한 실수들이 너무 거슬린다. 그리고 1막이든 2막이든 정시 시작 못하고 그 순간부터 다시 조율하는 것도 두근거리는 기분에 김을 팍 새게 만들어서 짜증난다. 갈수록 성격 더러워지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내 시간과 내 돈, 내 정력을 쏟아붓는 '소비' 인 만큼, 이런저런 요구를 운운하는 점에 대한 죄책감은 결코 없다. 그리고 진짜, 몇 번을 말하지만 예당 오페라하우스에 뮤지컬 좀 올리지 마라. 기대치를 바닥보다도 더 아래에 두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음향 진짜......... 그 좋은 배우들 목소리를 그딴 수준의 음향으로 들어야겠냐고. 쓴소리만 더 많이 나열할 수 있지만, 그냥 한라이토 좋았던 점들만 남기고 대충 마무리 해야겠다. 





※스포주의※



한라이토는 극 초반에 무척 어리고 순수한 학생 그 자체여서 귀엽기까지 했다. 살을 많이 뺀 덕에 얇고 비율 좋고 잘생겨서 비주얼적으로도 취향저격이었는데, 그보다도 깔끔하게 처리하는 대사톤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과하지 않게 담백하면서도 유들유들하게 살려내는 개그요소들이 사랑스러웠다. 메인테마 Death Note 는 그냥 그랬는데, 서영주 배우님의 매력적인 저음 목소리와 어우러지는 듀엣곡부터 무척 좋았다. 엘에게 어떻게 반격할까 고민하는 연기를 하며 이것저것 소소한 애드립을 넣는데, 엄지와 검지로 L 모양을 만들어 빤히 쳐다보는 디테일 좋았다. 1막 마지막 장면에서 데스노트로 얼굴 절반 정도 가리는 디테일이 눈길을 끌었는데, 2막 마지막 부둣가에서 노트로 얼굴을 가리는 그 포즈를 그대로 하더라. 그러면서 원작처럼 미친 듯 낄낄거리며 "내가 키라다!" 하고 엘에게 광기 어린 고해를 한다. 테니스 끝난 뒤의 디테일도 엄청 좋았다. 깐죽거리는 류크 때문에 참지 못하고 "시끄럽다고 했잖아!" 하고 버럭 화를 낸 다음에 의아해 하는 샤엘에게 "아, 내가 요새 생각이 좀 많아서," 하며 한 쪽 손목을 뒤로 살짝 꺾어 그 안쪽 손목으로 관자놀이를 짚는다. 그리고 그 동작을 이번엔 양손으로 하는데, 그 장면이 바로 샤엘에게 총으로 오른쪽 다리를 맞은 뒤 이게 다 본인이 계획한 것이라 설명하며 그에게 다가가는 부분이었다. 그 순간의 번뜩이는 눈빛과 온몸으로 뿜어내는 광기가 어찌나 섬뜩하고 강렬한지, 취향 저격 당한 짜릿함을 억누르려 주먹을 꽈악 쥐고는 손톱으로 살을 꾹꾹 누르며 치솟는 광대를 애써 진정시켜야 했다. 이런 색감의 연기가 정말 너무 좋다, 이 배우. 이런 류의 캐릭터 좀 많이 해주시면 안될까요.. 한지상 배우를 애정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디테일의 연속성' 인데, 위에 언급한 디테일들이 바로 그 사례다. 본인이 만든 디테일을 극 안에서 잊지 않고 반복하면서 캐릭터의 일관성은 물론 장면의 임팩트까지 살려내는 이 배우의 습관이자 재능은, 정말 타고났다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저 마지막 부둣가 장면 하나만으로 이날 관극은 그 가치를 완벽히 충족시켰다고 느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자세히 남겨야겠다. 다정한 척, 진지한 척, 부드럽게 대화를 시작했으면서 삽시간에 분위기가 바뀌어버린다. 소악마 이미지인데, 농도가 짙은 광기가 유혹적이기까지 한 사악함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낸다. 섹슈얼한 섹시함이 아니라 달콤한 파국의 향기가 맹렬하게 감각을 사로잡는 듯한 농염함이다. 반복되는 '정의 실현' 과 그에 대한 자기방어기제로 겹겹이 쌓아나간 '자기합리화' 로 인해 처음의 순수함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 순수한 믿음이 변질되었다기 보다는 맹목적인 집착으로 변해버린 것이어서, 드라마틱한 인물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캐릭터 이미지의 일관성이 유지되어 설득력이 매우 높았다. 샤엘의 총에 맞는 순간 놀란 척 순진한 척 쓰러지는 연기를 하고서는 바로 돌변하여 실은 모든 것이 제 계획이라 읊어대는 얼굴에 섬광 같은 게 스친다. 양 관자놀이를 짚으며 번잡하게 들려오는 머릿속의 목소리들을 내치려는 듯 고개를 세게 젓는다. 이제 총을 자신에게 넘기라며 손을 샤엘 쪽으로 내밀며 다가간다. 부들거리며 총을 꽉 붙들고 있는 엘의 손을, 천천히 그렇지만 위압감 있게 그의 머리를 향해 돌리고는 타이밍을 재듯 잠시 텀을 둔다. 탕. 제자리에 정지한 샤엘의 꼿꼿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표정을 구기다가 장난스런 악랄함을 가득 담은 얼굴로 어깨를 확 밀쳐버린다. 초연 때는 엘이 '자신의 손에 죽는다' 가 아니라 '제 손으로 자살한다' 라는 점에 초점을 맞춘 홍라이토가 당황했었는데, 노선을 아예 바꿔버린 건지 한라이토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더라. 샤엘 손을 잡고 돌리는 그 동작이 무척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해서, 초연 쪽의 해석이 더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와닿는 감정 자체는 재연의 노선이 더 좋았다. 제 이름을 적는 류크를 향해 '인간 답게' 집착하는 라이토. 처절한데 비참하다기 보다는 애처롭고 불쌍하더라. 어울리는 결말이기에 동정이 가진 않았지만, 바닥을 기며 메인테마를 읊는 핝라이토의 목소리에 감정이 뚝뚝 묻어나서 엄청 좋았다.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그 시각적인 충격을 글로써 표현하는데 있어 한계를 느낀다. 이래서 박제를 주구장창 요구하는 건데, 절대 이뤄지지 않는 꿈 같은 일이라서 슬프다. 여러모로 인상적인 관극이어서 잔상이 짙게 남는다. 다른 배우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긴 한데, 이 리뷰는 이만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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