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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in 국립극장, 2024.01.10 3시

 

 

신구 에스트라공(고고), 박근형 블라디미르(디디), 박정자 럭키, 김학철 포조, 김리안 소년. 원캐.

 

2024년 첫 관극. 평일 마티네인데도 매진 객석인 점에 한 번 놀라고, 때로는 맨발로 때로는 무겁게 이동하며 펼쳐내는 무대 위 배우들의 농도 짙고 묵직한 연기에 또 한 번 놀랐다. 무척 잔잔하게 흘러가는 전개에 나른해질 무렵, 순간적으로 관객의 몰입도가 확 높아지는 찰나가 여럿 있었다. 담백한 텍스트를 생동감 있게 풀어내는 배우들의 능숙함에 저절로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 갈래."

"안돼."

"왜."

"고도를 기다려야지."

 

1막에서 조금씩 가볍게 쌓아놓은 초석들이 2막에서 망가지고 뒤엉키며 적나라하게 현실을 드러낸다. 1막과 비슷하게 반복되는 2막의 대사를 듣다가 문득 방탄소년단의 Tomorrow 가사 한 소절이 떠올랐다. "내일은 오늘이 되고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어제가 되어 내 등 뒤에 서있네." 망각과 왜곡이라는 축복이자 저주를 끌어안고 다른 듯 닮은 매일을 살아내며 죽음으로 다가가는 인간이여. 무덤에서 기어 나와 무덤가에 잠시 앉아있다가 다시 무덤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이 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제와 똑같아서 구분이 되지 않는 오늘이 결국 내일과 다르지 않음을 않다. 그럼에도 고도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건, 기다리고 있었던 건, 기다리게 되리라는 건, 고단함 속에서도 이 삶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는 그저 다 말라비틀어져 죽어있는 듯한 나무. 그 나무의 끄트머리 가지에 움튼 잎사귀가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오늘을 증명하고 있으므로. 유약한 인간은 하룻밤 새 눈이 멀고 말을 잃을지라도, 시간은 자신만의 속도로 차근차근 흘러가며 새로운 나날을 만든다.

 

 

"어째 떠날 마음이 안 생기는데."

"그게 인생이죠."

 

1막을 거쳐 만나는 2막에서 비로소 이 극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 든다. 길고 짙은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은 작품이다. 고고와 디디 같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도 고민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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