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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송

in 예스24스테이지 3관, 2021.11.30 8시

 

 

 

 

신주협 마이클, 이석준 그린버그, 고수희 피터슨. 주협마이클 첫공. 엘송 자첫.

 

 

2015년부터 여러 번 올라왔던 극인데, 사연에서야 비로소 처음 만나게 됐다. 제이미로 만나본 신주협 배우가 처음 합류한다고 하여 일부러 첫공으로 잡았는데, 첫 무대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안정적이고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줘서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이미지로만 만나본 마이클은 폐쇄적이고 위태로운 소년의 인상이 강했는데, 레몬마이클은 소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불안정한 과도기의 아슬함을 노선으로 잡으며 유려하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팽팽한 긴장을 끌어내다가 일순 표정을 바꾸며 능글맞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완급조절이 무척 부드러워서, 초반부터 그린버그를 휘어잡고 점진적으로 제가 원하는 바를 향해 나아가는 영리함이 돋보였다.

 

 

 

 

"사랑의 방식이 다르다고 비난받아야 한다면,

세상의 어떤 사랑도 축복받을 수 없을 거예요."

 

 

이런 레몬마이클을 상대하는 석린버그의 연기 또한 훌륭했다. 세파에 닳고 찌든 냉정하고 오만한 어른으로서 대답을 회피하고 딴소리만 늘어놓는 답답한 마이클의 태도에 불편해하며 그에게 끌려다니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가, 진료기록이라는 아킬레스건으로 주도권을 잡았다고 믿고 여유로워지며 마음을 살짝 열고 마는 찰나가 무척 좋았다. 병원의 원장에서 정신과 의사로, 이어 눈앞의 마이클을 하나의 인격체로 응시하고 귀 기울이는 변화가 따뜻하고 인간적이었다. 초반과 사뭇 달라진 중후반의 석린버그 표정이, 결말의 낙폭을 어마어마하게 만든다.

 

 

역시 경력직인 고터슨의 연기도 극 전개를 한층 쫀쫀하게 만들었다. 마이클과 그린버그가 만들어낸 팽팽한 긴장 상태에 자연스럽게 들락날락하면서 의심과 의문을 덧입히는 것으로 이야기의 입체감을 살린다. 관객으로 하여금 피터슨이라는 인물을 단편적으로 평가내리게 하지 않기 위하여 대본과 연출이 의도적으로 부여한 대사들을 장면에 어울리게 소화함으로써, 시작과 끝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만든다. 마지막을 마주한 관객이 비로소 처음을 돌아보며 깨닫게 되는 장면마다 고터슨의 표정이 묵직하게 남아 깊은 여운을 선사한다.

 

 

 

 

※스포있음! 자첫 예정이면 절대 읽지 말 것※

 

 

그린버그가 건넨 상자 안의 초콜릿을 꺼내 일렬로 나열하는 레몬마이클의 표정을 보는 순간 반전을 깨달았다. 견과류 알레르기. 극 초반에 마이클이 본인 입으로 말했던, 그린버그가 절대 읽지 못하게 만든 그 진료기록 차트에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을, 갈망하던 "자유"를 향한 단 하나의 수단. 목과 몸을 긁는 빈도가 잦아지고, 어서 로렌스와 통화하기 위해 초조해하며 점차 붉어지는 피부. 눈에 보이는 결말을 향해 치닫는 순간, "날 위해 울어주는 거예요?" 라고 물으며 눈물이 가득 차오른 두 눈을 반짝이며 환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주겠노라 말했던 안소니를 피터슨에게 건네는 마이클과 절박하게 거부하며 안소니를 다시 마이클의 품에 안겨주려는 피터슨. 아가, 아가..

 

 

사랑받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음정 세 개" 보다 못한 존재라는 자학에 휩싸였던 아이. 그 아이는 제 의지로 비로소 자유를 찾았지만, 그의 손에 쥐여준 선의가 달콤함이 아니라 죽음이었음을 알게 된 어른은 어떻게 그 괴로운 죄책감을 견뎌내란 말인가. 주사기를 툭 떨어뜨리고 크게 휘청이며 바닥에 넘어진 석린버그가 과호흡인 온 것처럼 꺽꺽 내뱉는 거친 숨이, 그 극렬한 트라우마의 고통을 고스란히 객석으로 전이한다. 결말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마이클이 아닌 그린버그를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건, 받지 못한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의 상처보다 삶을 살아내며 사랑을 잃어버린 무감각한 어른의 상흔에 더 공감하게 되어버린 탓이겠지. 실시간으로 트라우마를 뒤집어쓰던 석린버그의 눈빛과 숨소리는 한동안 잊기 어려울 것 같다.

 

 

"그 아이를 일분일초도 놓치지 말고 사랑해주세요."

 

 

쓰러지기 직전 마이클이 그린버그에게 건네는 이 대사가 상당히 중요하게 들리는데, 마이클이 그린버그의 개인사를 대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 점은 아쉬웠다. 부인이 있다는 건 전화통화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아이에 대한 얘기는 없었는데 말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병원에 출근한 그린버그가 선물 하나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황적인 뉘앙스 말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더라면 마이클의 대사가 훨씬 깊이 있게 다가올 것 같다.

 

 

관극 이후에도 극을 곱씹으며 대사의 의도와 단어의 상징을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이 오랜만이라서 행복하다. 다정하고 잔인하여 아름다운 하얀 코끼리를 늦게나마 만나볼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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