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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앤하이드

in 샤롯데씨어터, 2021.11.05 7시반

 

 

 

 

류정한 지킬/하이드, 아이비 루시, 조정은 엠마. 류과자선녀 페어첫공. 류지킬/류하이드 자넷.

 

 

공연을 거듭할수록 더 능숙하게 인물과 상황을 풀어나가는 류배우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날은 특히 1막 초반의 지킬이 정말 좋았다. 아닛투의 쨍하고 까랑한 목소리가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고, 이사회 직후 답답해하며 제가 본 미래를 응시하듯 허공을 맴도는 눈빛이 마음을 아득하게 울렸다. 사골 시작 직전의 그 희망찬 반짝임을 어찌 글로써 표현할 수 있을까. 올곧고 다정한 가면 안쪽의 위선을 누구보다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바로 이 지킬을 지금껏 상상하고 고대하며 기다려왔다. 마음 깊은 곳에 웅크린 자신의 일부를 부정하지도 뿌리치지도 못해 괴로워하는 지킬 말이다.

 

 

"날 유혹해 뿌리칠 수 없어"

 

 

이번 시즌에 새로 추가된 무반주의 두 소절이, 제 등짝에 붙은 짐승을 뿌리칠 재간이 없는 류지킬의 번뇌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장면의 독백은 자칫하면 과하고 어색해질 수 있는데, 류지킬은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과 고민을 꾹꾹 눌러담아 개연성과 몰입도를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미래를 보고 꿈을 꾸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결과에 좌절을 겪게 되고, 그럼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겠노라 선언하는 웨이백에 이어 극한으로 치닫는 상황에 처참하게 무너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이 이상 유려할 수가 없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컨프롱으로 대미를 장식하니, 흠잡을 구석이 없다.

 

 

 

 

여기에 다른 주연 배우들까지 좋으니 관객으로서는 황송하기 그지없다. 이 극에서 가장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선녀엠마는 지킬을 따뜻하게 위로하는 동시에 그의 괴로움을 더 처참하고 처절하게 만든다. 류지킬이 수차례 반복하여 읊조리는 엠마라는 이름은 유일한 동아줄인 동시에 자신의 처지를 한층 절감토록 하는 너무 밝은 빛이다. 마지막 장면의 허망함은 선녀엠마로 인해 찬란하게 비극적인 구원이 된다. 지킬의 신념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이를 통해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립하며 연출이 강제하는 성녀/창녀의 이분법을 뿌리치는 선녀엠마가 극의 낡음을 중화시킨다.

 

 

"어차피 내일은 없어 덧없이 흘러갈 뿐 태양이 뜬 대도 암흑"

 

 

과자루시 또한 지킬의 숨겨진 욕망이라는 도구적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노원에서 거울 속 자기 자신을 생경하게 바라보며 당장의 현실을 부정하고 비관하면서도, 알 수 없는 또 다른 삶을 갈망하는 텅 빈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마치 지킬처럼. 암흑 속에서 처음으로 제게 빛을 밝혀준 지킬로 인해 희망을 알고 새 삶을 직접 노래하기에 이른다. 지금껏 잘해왔으니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설렘과 두려움이 뒤섞인 불꽃을 불사르며. 댄져에서도 하이드의 손 끝에 이끌린다기보다, 제 몸을 사로잡는 욕망 그 자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뿌리치고 발버둥 친다.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온 몸을 내던지는 이날의 댄져는, 인간의 주체성과 거역하기 힘든 욕망 간의 거칠고 절박한 전투였다.

 

 

 

 

이날 소소한 참사가 두엇 있었다. 이사회 장면에서 류지킬이 첫 소절을 부르다가 단어가 엉켰다. "이제는 거의 다 찾았죠 해답을" 이라는 가사인데, 다음 부분과 헷갈렸는지 "이제는 더 이상.. 않았죠" 이런 식으로 꼬여버렸다. 당황할 법도 한데 너무 자연스럽게 바로 다음 문장인 "화학적 시약의 개발까지" 부분을 박자에 딱 맞춰 다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역시 베테랑이다 싶어서 새삼스레 멋있었다. 약혼식에서도 듀엣 마지막 부분쯤 엠마 드레스 뒤쪽 리본에 류지킬 오른쪽 장갑이 걸려서 내내 신경 쓰다가 넘버 끝난 직후에 가까스로 수습했다. 개사는 가끔 봤지만, 이렇게 가사가 꼬인 건 처음이라 신선해서 공연 내내 자꾸 생각이 났다.

 

 

오늘도 관극을 갈 예정이니 일단 이날 후기는 이쯤에서 정리해본다. 디테일은 오늘 후기에 적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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