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킬앤하이드
in 샤롯데씨어터, 2021.10.29 7시반
류정한 지킬/하이드, 선민 루시, 조정은 엠마. 류지킬/류하이드 자셋. 류선민 페어첫공.
드디어! 내가 아주 잘 아는 바로 그 류정한 배우님이 돌아오셨다! 지난주도 좋긴 했으나 오랜만에 이 압도적인 원탑극을 끌고 가는 부담감 때문인지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다고 느꼈는데, 이날은 비로소 평소 류배우님의 모습이 오롯이 돌아왔더라. 물론 이런 느낌도 1막 초중반 지킬 한정이지, 하이드는 첫공부터 완벽했지만! 1막부터 디테일을 쌓아가고 감정을 풀어내는 유려함이 몹시 반갑고 기꺼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15만원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컨프롱으로 정점을 찍으며, 마침내 바로 그 류지킬을, 바로 그 류하이드를 온몸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있음을 절실히 실감했다.
첫 넘버 Lost in the Darkness 마지막 소절에서 울먹이는 류지킬을 보며 유약한 노선인가 했는데, 아버지의 손등에 깊이 키스를 하고 들어 올린 그 얼굴에는 휘몰아치는 감정과 번뇌를 갈무리하여 침잠시킨 냉랭함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어지는 I Need to Know 넘버 내내 냉철한 지식인으로서 과학과 지식을 갈구했다. Facade 넘버에서도 계층 간의 대립과 그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여앙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두통 디테일 없이 혼란을 탁 떨치고 벗어났다. 마지막 소절 "그게 너," 까지는 똑바로 서서 응시만 하다가, "바로" 하면서 검지를 들어 객석을 가리키고선 "너" 하고 방관자들의 위선을 짚어냈다.
이사회 너무 좋았다. "예의를 차린 게 무례가 됐다면," 까지는 서류를 내려보던 류지킬은 고개를 탁 들고 스트라이더를 응시하며 "사과드리죠" 라고 비꼰 뒤 바로 시선을 거두고 이사회를 바라본다. 제 의견을 제대로 들을 생각도 없는 배척에 답답해하며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류지킬은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단정한 얼굴로 고고하게 서서 할 말을 고른다. 미쳤다는 스트라이더의 비난에도 타격 하나 없는 얼굴이었지만, 댄버스 경마저 제 편을 들지 않고 발을 빼자 실망과 경악이 스치며 다급해진다. 다시 이사회를 등지고선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려 해보지만 순간적으로 감정이 무너져 내리며 눈썹부터 아래턱까지 온 얼굴 근육이 바들댄다. "딱 한 번만! 제 간청을!" 하고 날카롭게 부르고 "단 한 번만 제게" 라고 단호한 대사톤으로 말한 다음에 "기회를" 하고 간절함을 얹어 부르는 류지킬의 마지막 논변.
결정을 하자는 서기관의 진행에 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양 소매를 탁탁 정리하며 긴장한 채 예의를 갖추지만, 쏟아지는 편견과 비난의 네이. "이례적인 안건에 대해 납득할만한 해명을 듣고자" 자리를 마련했다는 댄버스 경의 개최사부터 예견되었던 바지만, 류지킬은 크게 절망한다. 자네는 너무 앞서갔다며 위로하는 윤어터슨의 배우 본체가 왕년의 지킬이었다는 점을 새삼스레 인지하다 보니, 이미 이 모든 과정을 겪고 미래에서 돌아온 지킬이 과거의 자기 자신을 타이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새로웠다. 그들을 아직도 모른다는 말에 여러 의미가 함축된 인상까지 들어 흥미진진했다.
"남자 여자 모두 그렇게 다 똑같아"
선민루시 명성은 자자하게 들었는데 이렇게 자첫할 수 있어 기뻤다. 등장하자마자 애기루시라는 별명이 단숨에 이해가 되는 노선을 보여줬는데, 소녀의 모습을 여즉 지니고 있는 그 모습이 포악한 이 극을 더욱 극악하게 만들어서 너무 힘들었다. 정체성이 형성되기도 전에 가혹한 현실에 내몰린 No One Knows Who I Am 넘버에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몸에 밴 자세와 표정을 지어 보이는 Bring On the Man 넘버로 이어지는 변화가 가장 자연스러운 루시였다. 남자의 위선을 입에 올리는 루시의 말에 비로소 그에게 시선을 준 류지킬은 점차 그에게 빠져든다. 꼿꼿한 자세로 앉은 채 여자 앙상블 사이로 루시를 보기 위해 저도 모르게 목을 뺀다. 중간중간 고개까지 끄덕이며 가사에 공감하는데, 입모양으로 "똑같다" 하고 중얼거리는 디테일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의사라는 자기소개에 큰 소리로 "네!?" 하고 되묻는 선민루시 반응을 듣고 놀란 류지킬이 "네?" 하고 따라 하는 거 귀여웠다. 예상치 못한 이끌림과 그 감정이 잘 통제되지 않는 당혹감이 행동 곳곳에 묻어난다. 루시에게 잡힌 손을 우아하게 빼냈지만, 벌떡 일어나 "지나버린 시간 또한 소중한 것" 하며 그가 잡았던 왼쪽 손등을 오른손 손끝으로 애틋하고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엠마뿐이던 제 삶에 갑자기 등장한 루시로 인해 마음이 뒤흔들린 류지킬은 "가지 말 걸 그랬어요" 하며 깊이 후회한다. 사랑이라 표현하기엔 낯설고 욕망이라 명명하기엔 어설픈, 위태로운 감정.
This is the Moment. 류배우님의 음역대에 찰떡같이 맞는 넘버가 아닌,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넘버이기에 객석에서 더 긴장하게 되는 이 넘버. 하지만 돌아온 류지킬의 사골은, 명불허전이었다. 떨리고 설레며 벅차오르는 지킬의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특히 "당신이 나를!" 하며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는 류지킬의 디테일에 내적 환호성을 금할 길 없었다. 신에게 도전하리라 선언하면서 "신이여 허락하소서" 하고 맺음 짓는 이 기도가 류지킬의 또 다른 이중성이라 느껴진다. 2막에서 엠마를 붙잡을 때도 "신께 맹세컨대" 이토록 당신이 필요한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감히 신의 권능에 의문을 던지면서도 가장 절박할 때 주를 찾는 것이 입에 배어버린 19세기 사람 같아서 재미있다.
Transformation. 몸 깊은 안쪽에서 불현듯 튀어나오려는 존재. 윽박지르듯 삼킬 듯 파고드는 강렬한 존재감에 온몸으로 바닥을 뒹굴고 괴로워한다. 달달달 떨리는 다리로 발바닥을 밀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오는 걸음과 "제기랄 염병할" 하고 굵고 묵직해지는 톤이 짜릿하다.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며 낮고 서늘한 웃음을 터뜨리는 류하이드. 여기 휘파람 없어져서 너무 섭섭했다. 돌려주세요, 제 최애포인트 중 하나예요. 자연스럽게 깃털 펜으로 뻗는 오른손을 퍽 쳐내는 하이드의 왼손. 이 디테일을 컨프롱에서 똑같이 해서 디테일 덕후는 기절할 뻔했구요. Alive. 객석 쪽으로 걸어 나오며 마치 어그러진 뼈를 맞추듯 왼쪽 어깨와 오른쪽 어깨를 한 번씩 끌어올리는 동작도 너무 좋았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몸까지 극명하게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류하이드.
"자정. 모든 게 정상. 기대 이상의 발전! 자유!"
풀에게 버럭 소리 지르는 분노가 씩씩거리며 번들대는 표정에 오롯이 담겨 일렁인다. 기도하네 넘버 갈수록 좋아져서 귀가 황홀하다. 하이드의 이름을 입에 올린 루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떠보기 위해 왜 자신을 찾아왔느냐 묻는 류지킬. 이성이 저항할 새도 없이 루시와 입을 맞추고선 잘가라고 선을 긋지만, 그 온기가 남은 제 입술을 매만져볼 수밖에 없다. Someone Like You. 퇴장 직전 다시 한번 오른손으로 입술을 쓰다듬고선, 떨리는 그 손을 내려다본 뒤 퇴장한다.
"야!!!!옹!!!!!" 하고 사자후처럼 외친 뒤, "야~옹" 하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톤으로 조롱한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 이라는 대사를 "정말 잘 어울리는 어색함" 이라고 바꾼 디테일이 비아냥의 반어적인 효과를 높였다. 너무 짧아서 아쉬운 Alive2. 한층 더 외설적인 디테일이 류하이드의 재림을 생생히 보여준다. 품에서 꺼낸 술병의 뚜껑을 열고 본인 중심부에 술병 바닥을 댄 채로 사정하듯 탈탈탈탈 털어대다가 이내 온 사방으로 술을 휘갈기는 류하이드를 드디어 만나다니!
2막. Murder, Murder. 비셋 약방에서 머리끈 풀고 온전히 하이드로서 대꾸하는 거 고정인가봐! 최고야! 테디 죽이기 직전 휘파람은 음정만 바뀌고 그대로여서 좋았다. 얼랍 전 휘파람만 다시 돌려주세요. Once Upon A Time. 안정적인 류선녀 페어합이 가장 빛을 발하는 장면. 얼마가 걸리든 기다린다고 말하며 떠나는 엠마의 뒷모습에, 그의 이름을 읊조리다 이내 무너지는 류지킬. 괴로워하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다가 절망을 토해내며 소리 내 오열하다가 의자를 퍽 내리치며 흐느끼다가 이를 악물고 결연히 일지로 다가가는, 이 모든 감정의 진폭이 어마어마하게 유려하다. 어터슨을 떠나보낸 뒤의 독백 또한 완벽하기 그지없다.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또 다른 내면을 직시하며 번민하는 Streak of Madness.
훨씬 포악하고 잔인해진 류하이드와 그런 그를 두려워하기보다 극도로 혐오하는 선민루시가 더해지니 지독히 괴로웠던 Dangerous Game. 이 폭력은 게임이 아니라 "피와 살로 느낄 수 있는 실제상황"이기에 참으로 힘겹다. 어터슨의 앞에서 스스로의 허벅지에 주사를 놓아 지킬로 돌아간 하이드. 이 극에서 가장 많이 호명되는 이름은 "존"일까 "엠마"일까 하는 괜한 궁금증을 밀어 넣으며, 처절하게 사투를 벌이는 류지킬의 The Way Back 넘버에 빠져들었다. 이날 류하이드는 루시 자체에 대한 애정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지킬을 절망으로 밀어 넣기 위해 루시에게 집착했고, 그렇기에 Lucy's Death 또한 더욱 가혹하고 잔인했다. "난 나른해져어어" 하며 하이드에서 지킬로 변화하는 목소리와 얼굴이 어마어마하다.
"밤 검은 어둠 길 잃은 영혼
새벽은 멀고 끝없는 밤
세상 그 무엇도 날 막을 수 없어
승리하겠어 끝내 이겨내..."
Confrontation. 류배우님이 연기하셨던 모든 극의 모든 장면을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넘버들 중 하나로 단숨에 신분상승해버린 컨프롱. 류배우님 컨프롱 박제가 언제 나온다구요? 단정하고 날카로운 류지킬과 위압적이고 묵직한 류하이드는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의 목소리로 팽팽하게 대립한다. 오른손은 지킬 왼손은 하이드로 확연히 구분되다가, 힘이 강렬해진 하이드가 양손을 사용하며 거칠게 비웃기 시작한다. 탄생했을 때부터 줄곧 자아를 지니기라도 한 듯 각기 다르게 꿈틀거리던 손가락 디테일이 기괴한 전율을 더하는데, 왼손만이 아니라 오른손까지 생동하듯 움직인다. 지킬을 밀쳐내고 튀어나오던 하이드가 1막 얼랍 직전과 똑같이 왼손으로 오른손을 퍽 쳐내며 디테일의 연속성을 만든다. 넘버 마지막에 조끼 앞섬을 확 푸르는 것도 위압적이었다. 초연 때 해외창작진 중 하나가 류배우님의 컨프롱을 보고 저 배우는 지킬 페이 하이드 페이 둘 다 줘야 한다고 했다던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데, 직접 컨프롱을 대면해보니 너무나도 마땅한 말이더라.
결혼식. 제 이름이 불리는 순간 눈을 까뒤집으며 크게 휘청이는 류지킬. 흰 장갑과 타이를 벗어던지며 "하필 지금 하필 이때" 돌아온 존재를 저주하듯 절규하며 쓰러진다. 구석에 몰린 짐승처럼 그르렁대며 하이드의 목소리로 어터슨에게 자신을 자유롭게 해주길 종용한다. 그의 칼에 몸을 내던지고선, 비틀대며 뒷걸음질 치던 류지킬이 "아버지.." 하고 중얼거린 것처럼 보여서 숨이 턱 막혔다. 끝내 성공시키지 못한 제 연구 앞에서 그 시발점이 된 아버지를 부르다니, 이건 반칙이죠. 엠마의 품에 안긴 채 그 이름을 끝없이 되뇌다 툭 떨구는 왼손. "이제서야 이제부터 당신이 내게" 하며 채 잇지 못하는 목소리로 짙게 울먹이는 선녀엠마.
같은 시대에서 이토록 황홀한 경험을 할 수 있어 더없이 영광이고 행복하다. 데뷔 24년차 배우님의 팬클럽 20주년을 함께할 수 있는 것 또한 벅차고 기쁜 일이고! 케렌시아에 파란 나비 자주자주 들러주시면 좋겠어요!
'공연예술 > Ryu Jung H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킬앤하이드 (2021.11.06 7시) (0) | 2021.11.07 |
---|---|
지킬앤하이드 (2021.11.05 7시반) (0) | 2021.11.06 |
지킬앤하이드 (2021.10.24 7시) (2) | 2021.10.25 |
지킬앤하이드 (2021.10.20 7시반) (0) | 2021.10.22 |
맨오브라만차 (2021.05.16 2시) (0) | 2021.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