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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in 엘지아트센터, 2021.05.27 7시
남명렬, 이주영, 이원석, 황은후, 이진경, 우범진, 하준호, 백석광.
이 극도 작년에 예매를 했었는데 시국 때문에 엎어져서 강제로 취소를 당했었다. 그래서 다시 올라온다고 했을 때 재고 없이 예매를 했고, 3시간 45분이라는 악독한 런닝타임을 기꺼이 감내하기로 했다. 길지만 흡입력 강한 작품이었고, 동시에 굳이 이렇게 길게 끌어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장면장면의 호흡은 딱 적당한데, 고민하고 번뇌하는 장면에서 개개인의 독백 같은 대사들이 과하게 반복되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지점이 이 극의 핵심을 짚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판단한 연출이겠지만.
"우는 게 아니라 네 삶이 내 얼굴에 쏟아지는 거야"
나왈의 어머니 지안의 탄식 속 이 대사가 참으로 문학적이었다. 고결함이 없어진 세상을 한탄하며, 집안 여자들이 분노의 고리 속에서 딸은 어머니를 딸의 어머니는 또 그 어머니를 증오하며 살고 있지만 그 분노의 실타래를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던 할머니 나지라의 가르침이 나왈의 일생을 지배한다. "무너지지 마. 배워야 해." 라며 글을 읽고 쓰는 법, 생각하는 법,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는 법을 배우라고, 그래서 내 묘비에 이름을 적어주겠노라 약속해달라던 나지라의 유언 같은 말이 나왈을 살게 하고 걷게 만든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목구멍 속에 꽂힌 칼이야"
인생에서 결코 지워낼 수 없는 상흔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이 극은 묻는다. 목구멍 속에 꽂힌 칼을 뽑아내고, 구멍 난 목으로 침을 삼키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노라, 이 극은 말한다. 온 영혼을 내던진 사랑의 가치를, 스스로 선택하여 힘겹게 찾아낸 뿌리를 올곧게 마주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 극은 강조한다. 이해할 수 없던 침묵을 이해하는 순간 찾아올 깨달음의 고통을, 잔혹한 진실이 선사하는 마땅한 침묵을, 이 극은 긍정한다. 탄생과 죽음을 상징하는 볼품없는 양동이와 묻고 또 묻는 질문들로 뿌리를 찾아가며, 목 잘린 닭이 사방으로 뿜어내는 피로 흠뻑 젖은 채 잊으면 안되는 것들을 응시한다.
"너희들은 편지를 열어 이 침묵을 깨뜨렸어"
"우리 이제 함께 있으니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이 극의 클라이막스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의 가치는 이해한다. 반복되는 복수의 굴레를 직시하고 그 악순환을 깨뜨려 나아가는 인간의 의지를 존경한다. 무지 속에 안주하는 것보다 진실을 마주하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지만, 이 극의 연출이 선택한 방향성은 불편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갈구하지만 끝내 선택한 결말은 개인의 이해와 용서라는 점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각자의 인생에 담긴 가치와 선택을 존중한다. 오이디푸스와 닮아있는 이 이야기 또한 인간의 선택에 대해 논하고 있기에. 곱씹어볼 것이 많은 극이어서 호불호와 무관하게 관극 만족도가 높다.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지만, 한 번쯤 만나볼 수 있어 좋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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