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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름

in 유니플렉스 2관, 2021.05.22 2시

 

 

 

 

정원조 태민, 박혜나 여름, 조남희 조지, 박준휘 동욱, 박가은 란.

 

 

어쩌다보니 알앤디 작품을 연달아 보게 됐다. 가사에 멜로디를 입혀 흥얼거리는 혜나여름의 사랑스러움에 함박웃음을 짓다가, 원조태민의 불편한 행동에 기분이 상했다가, 그럼에도 꽁냥 대며 다양한 동물들의 자세를 요구하고 취하며 사진을 찍고 찍히는 두 사람의 케미에 키득거렸다가, 마침내 드러난 진실 앞에서 감정을 쏟아내는 모습에 결국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평범하기에 가까운 일상의 비극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결국 향해야만 하는 방향은 같다. 이 극은 그 비극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울림을 남긴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야기라는 이야기를 듣고 갔지만, 불편했던 부분이 꽤나 많았다. 일단 조지라는 인물이 여전히 세상의 편견 가득한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그런 게이도 당연히 있지. 과할 정도로 우아한 몸짓을 강조하며, 명품 가방을 소중히 여기고, 커다랗고 개성 가득한 무늬의 치렁한 옷을 입고 다니며, 프릴이 달린 앞치마에서 핑크색 핸드폰과 지갑을 꺼내는 그런 게이도 여전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 인물을 무대 위에 또 불러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우리 주변의 여느 사람이면서 성정체성만 게이인, 그런 사람을 보여주면 안 되는 걸까? 왜 과장스러운 게이의 행동을 통해 객석의 웃음을 유도해야만 하는 거지? 그리고 게이는 남성을 좋아하는 남성이지,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남성이 아니다. 젊고 예쁜 '여성'을 질투하는 대사를 들으며, 성소수자에 대해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는 안이한 연출에 한숨만 나왔다.

 

 

란을 그려내고 구축하는 방식 또한 불쾌했다. 유명한 사진작가가 오디션 서류 통과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사진을 찍어준다는 얘기에 분명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라며 옷부터 벗는 장면이 참으로 역겨웠다. 사회적 약자인 그 20대 여성에게 기득권 남성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힘들게 살았구나" 라고 동정하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 대사를 듣고 터져 나오는 객석 어드메 중년 남성의 웃음소리에 구역감이 차올랐다. 여성의 정서적 상실감을 채워주기 위한 남성 출장마사지사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며 유혹하기 위한 여성 출장 청소부의 괴리가 너무 심하지 않은가. 소수자에 대한 고민과 배려가 없는 연출을 여전히 무대 위에서 만나야 한다는 게 참으로 속상하고 답답하다.

 

 

 

 

※스포있음

 

 

복선은 여럿 있었다. 여름의 건강염려증은 신문 기사를 오려 스크랩을 할 만큼 과한 면이 있다. 태민은 후배 동욱에게 방금 나간 여름을 보지 못했냐고 묻기도 하고, 란에게 사진 속 여자가 부인이지만 죽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반전에 대한 확신이 온 건, 이별을 고하며 여름이 나서는 것과 거의 동시에 조지가 들어선 순간이었다. 소파네, 이것도 소파네, 하며 동욱이 전한 봉투에서 꺼낸 일회용 카메라의 인화 사진들을 하나씩 들여다보는 조지의 옆에서, 태민의 표정이 점점 절망으로 물들어 아득해진다. 환하게 웃는 여름을 일렁이는 눈으로 바라보며 "왜 죽었어?" 라고 묻는 태민.

 

 

여름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태민이었기에, 차라리 그가 1년여를 만난 다른 남자 때문에 이혼을 고하고 떠나기를 상상했으리라.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건망증 때문에 자꾸 다시 돌아오는 여름을 기대한 것이리라. 여름이 없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마주한 태민은 결국 그를 마주한다. 왜 내가 아니라 네가 죽었을까.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태민의 자책에 여름이 손까지 내저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당신처럼 힘들었을 거잖아. 어우, 난 못해.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태민이 말한다. 남겨진 사람이 더 힘든 건가. 그럼, 그래, 너라서 다행이네. 기어이 작별을 고하고 떠난 여름을, 태민은 기다린다. 늘 그랬듯 건망증을 핑계 대며 여름이 다시 돌아오기를. 하지만 고요한 문 앞에서 끝내 태민은 무너지며 엉엉 울어버린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는, 연인을 먼저 보낸 사위에게 손을 내민다. 떠난 엄마의 생일을 기념하며 크리스마스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였던 한여름을 이야기하며. 떠난 자를 기억하되 남겨진 자는 그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여름의 당근차가 다시 삼킬 수 없을 만큼 맛이 없어진다. 다시 무대 위로 돌아와 함께 촛불을 불어 끄는 여름을, 이제는 보지 못한다. 그동안 들지 못했던 선반 위의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선다. 그런 태민의 뒤에서 여름이 손을 흔들며 배웅한다. 남겨진 자의 인생을 응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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