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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코멧
in 유니버셜 아트센터, 2021.05.26 3시
케이윌 피에르, 이해나 나타샤, 이충주 아나톨, 방진의 엘렌, 이하 원캐.
작년부터 기대가 큰 작품이었는데, 시국 때문에 한 번 엎어지고 다시 올라와서 고마웠다. 다만 걱정이 됐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원작으로 한 19세기 모스크바 배경에, 무대 위 객석이 있는 공연이라니. 취향저격일 극임이 뻔해서 자첫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마지막 티켓팅이 도래했고, 막공주 자첫자막을 결정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코멧석에 입장하여 자리에 앉자마자 깨달았다.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초반에 관극 했으면 필경 열심히 회전 돌았으리라. 극 시작 직전부터 시작된 아코디언 연주에 이어 Prologue의 흥겹고 중독성 넘치는 가사과 안무가 행복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함께 춤추고 따라 부르며 마음껏 호응할 수 없음이 어찌나 통탄스러웠는지 모른다. 이 시국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와야 하는 극들이 여럿 있는데, 이 작품도 그 리스트의 0순위에 올라왔다.
'지루한' 오페라를 쉽고 가볍게 풀어내는 발랄함이 매력적인 극이다. 고상하고 기품 있는 현학적인 단어와 문장 대신, 짧게 끊어지고 귀에 쏙쏙 박히는 직설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가사를 구성한다. 현대인에게 익숙한 어휘를 사용하지만 과한 줄임말이나 최신 유행어의 과용은 지양하여, 극 중 배경인 19세기 모스크바와의 괴리를 최소화한 점이 특히 좋았다. The Opera 넘버에서 "기괴해 이상해 따라갈 수 없는 오페라 (...) 다 이게 뭐야 표정 짓는데 또 재밌는 척은 해" 라며 오페라는 물론이고 고상한 척하는 귀족층에 대한 풍자도 유쾌하게 풀어낸다. 1막 클럽씬의 현대적인 의상과 EDM 장르의 조합이 친숙한 짜릿함을, 2막 작별 씬의 신나는 리듬과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에서 번쩍이는 푸른색 조명이 유쾌함을 선사한다.
송스루 형식의 작품인데, 등장인물들이 마치 해설자처럼 다른 등장인물을 혹은 자기 자신을 3인칭처럼 지칭하며 어떤 식으로 행동하고 움직였는지 노래하는 것도 새로웠다. 이 극이 이해가 어려워 호불호가 갈린다는 평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가사만 정확하게 들을 수 있다면 극의 전개가 어려울 일은 절대 없다.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울까봐 핵심만 콕콕 짚어 녹여낸 가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 안 하기로 소문난 쇼노트가 넘버들의 가사를 많이 공개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이 예술이므로, 시간과 돈을 들인 관극을 하기 전의 예습을 귀찮아하지 말아야 한다.
'혁신적 무대언어'를 사용하는 작품이라서 시야 방해를 감안하며 바득바득 코멧석에 앉았다. 퐁당퐁당 좌석에 2열이었음에도, 피에르와 음악감독이 머무르는 무대 정가운데 피트가 완벽하게 가려져서 아쉽고 짜증났다. 뒷자리에는 어린이가 앉았는데, 방석이 있냐는 보호자의 질문에 어셔가 "시야 방해가 있음을 먼저 고지하고 티켓오픈을 했기 때문에 별도로 지급할 수 없다" 는 대답을 해서 기가 차더라. 시야방해가 분명하게 있으면 시방석으로 할인이라도 했어야지, 왜 그 책임을 관객에게 전부 떠넘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적어도 지그재그로 열기라도 했으면 시방이 덜했을 텐데, 한 좌석이라도 더 팔아야겠다는 거지. 시국이 시국이라 이해하지만, 시국이 아니었으면 다 열었을 게 뻔하니 더 괘씸하다.
그럼에도 코멧석의 매력은 너무나 명확하고 명백하여 못내 행복했다. 관객과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며 호응을 유도하는 배우들 덕에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코멧석 바닥의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무대 위에 앉아있음을 실감했고, 기존의 프로시니엄 무대에 맞춘 특정 장면의 연출을 보며 무대 뒤에서 바라보는 시야를 간접 경험했다. 앙상블까지 모두 나와서 무대를 꾸미는 장면에서는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빠짐없이 챙김을 받고, 메인 인물들만 나오는 장면에서도 무대 구석에 앉아있는 배우들이 곁에 있어서 극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기분을 받는다. 지금껏 수많은 관극을 했지만, 이토록 생동감 넘치고 특별한 경험이 가능했던 극은 없었노라 단언한다.
온 힘을 불살라 노래하고 춤추고 뛰어다니는 앙상블 배우들, 악기를 메고 다니며 연주하는 배우들, 때로 부드럽게 때로 신선하게 때때로 마땅한 불협화음을 섞어 장면을 풍성하게 만드는 음악과 오케스트라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눈이 오십 개쯤 달려있길 갈망한 관극도 오랜만이었다. 아나톨이 작별을 고하는 장면에서 불사르는 그 열정이 어마어마했다. 충나톨이 켜는 바이올린의 음색이 몹시 매력적이었고, 무대와 객석이 한마음이 되어 즐기는 그 순간 자체가 황홀했다. 배우들이 저마다 드러누워 헉헉대고 있으니 객석에서 열띤 박수가 터져나왔고, 케피에르가 한 번 멈추게 했는데도 다들 일어나지 않으니 또다시 박수가 나왔다. 충나톨이 간신히 일어서 숨을 고르니까 박수가 또 터졌는데, 파도타기가 된 것 같다고 신기해하던 충나톨이 코멧석부터 객석까지 360도로 파도타기를 다시 시킨 것도 즐거웠다.
시라노에서 자주 만난 돌로코프 역의 최호중 배우에게 자꾸 눈이 갔고, 마리 역의 연지 리 배우의 음색에 푹 빠져들었다. 1막에서는 오페라 넘버의 메인 가수로 2막에서는 시녀로도 나왔는데, 다양한 표정과 풍성한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노망난 볼콘스키와 잘생긴 안드레이를 1인 2역으로 연기한 강정우 배우의 흡입력도 엄청났고. 다양한 배우들의 다양한 매력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이어서 관극이 더 다채롭게 느껴졌다.
이 극은 나타샤가 주인공이다. 약혼자를 전쟁터로 떠나보내고 모스크바로 와서 대모의 집에 묵게 된 나타샤가 점점 변화해가는 과정이 이 작품의 중심 서사다. 약혼자 안드레이를 향한 애틋한 그리움과 지금 당장 뜨겁게 다가오는 아나톨을 향한 맹렬한 사랑 사이에서 두려워하고 고민하고 흔들리고 다잡는 감정이 세차게 일렁인다. 사랑스럽게 반짝이는 두 눈이 솔직하게 온갖 감정을 내비치는 걸 보고 있자면, 이 푸르른 청춘이 겪어내는 다채로운 이야기의 결말이 반드시 가혹해야만 하는가 의문이 들 정도다. 무대부터 객석까지 온 사방을 나풀거리며 뛰어다니는 이 어여쁜 소녀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걱정하는 사촌 소냐의 마음 또한 다정하기 그지없다. 나타샤의 치기와 소냐의 당연한 고지식함이 맞부딪히는 장면의 흡입력이 엄청났다.
방엘렌의 매력적인 아우라에 계속 시선을 강탈당하다가, Charming 넘버의 "샤망떼 샤망떼" 후크 부분에서 격침당했다. "달콤한 앵두처럼 물이 올랐어" 라던가 "손대면 톡 터지겠어 오 귀여워" 하는 부분의 그 매혹적인 표정에 나타샤만큼 설레는 기분이 되어버렸다. 피에르의 비난에도 사랑과 쾌락을 추구하는 본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내보이는 자신감이 멋졌다. 엄하지만 사랑이 가득한 류마리야의 엄격함도 매력적이어서 나타샤나 소냐와 함께 그의 "세심한 터치"를 받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커튼콜 때 코멧석 A구역 앞에 서주신 류수화 배우님께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원형 테두리를 혜성의 꼬리처럼 길게 늘어뜨리는 조명, 바닥에서 위로 솟아오르는 조명, 넘버의 클라이막스에서 피에르 한 사람에게 사방에서 꽂히는 조명이 그려내는 환한 별 모양의 빛까지. 직접 만나보지 못한 작품 두 도시 이야기가 연상되는 눈부신 빛의 향연에 심장이 절로 부풀어올랐다. 코멧석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무대 가장 안쪽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세로 두 줄의 강한 조명이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연출은 헤드윅의 피날레를 연상시켰다. 소품이나 구조물을 최소한 무대 위에서 조명과 배우만으로 꽉꽉 채워내는 세상이 지독히 아름다워서 벅찼다.
자첫자막으로 끝내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쉬운 극이기에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후기를 작성해봤다. 유니버셜 극장 자체도 자첫이었는데, 이 특별한 공연장에서 이 특별한 극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무대를 중심에 두고 사방으로 코멧석이 있는 원형무대의 형태로 돌아와 준다면 더 기꺼울 것 같고. 무사히 막공까지 마무리하시길 바라며, 부디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만나길 기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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