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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제들

in 유니플렉스 1관, 2021.05.20 8시

 

 

 

 

조형균 최부제, 이건명 김신부, 박가은 이영신, 이하 원캐. 지혜근, 이지연, 심건우, 김정민, 이동희.

 

 

작년 알앤디콘에서 넘버 하나를 미리 들어보긴 했지만 크게 감흥은 없었다. 영화를 굳이 뮤지컬로 만드는 필요성에 대한 의문 반, 구마를 무대 위에 구현하는 방식에 대한 우려 반으로 기대치조차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동생이 이런 장르의 영화를 워낙 좋아하기에, 2층에서 알앤디 조명샤워나 한 번 해야지 하는 가벼운 마음을 안고 방문한 공연장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멋지게 걱정과 불신을 산산조각내는 멋진 관극이 될 줄이야! 다소 유치하지만 직관적이며 꽤나 혼미하지만 확고한 철학을 향해 나아가는 이 극이 무척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었다. 이 창작뮤지컬의 너무나도 "알앤디다운" 요소요소에 극찬을 보내고 싶다.

 

 

"인간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다"

 

 

알앤디웍스의 작품들은 전부 "인간의 선택"에 대해 논한다. 마돈크에서는 백작이 브이에게 선택을 권하고, 더데빌에서는 엑스가 존에게 갈림길을 제시하며, 그판사에서는 그레이맨이 페터에게 그림자를 팔라고 제안한다. 록호쇼에서는 프랑큰이, 호프에서는 원고지가, 킹아더에서는 엑스칼리버를 통해 취한 왕좌가, 인간들에게 삶의 방향을 안내하고 선택을 종용한다. 알앤디 작품 속 "인간"들은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이내 후회하지만, 끝내 포기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다른 길을 개척하고 선택하여 나아간다. 검사제 역시 결이 같다.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의심하고 번뇌하여 나락까지 내몰고, 마침내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포기하지 않겠노라 택한 그 끝자락에서야 비로소 구원의 빛을 건넨다. 더없이 간절하게 갈구할 때도, 더없는 절망에 빠져버린 순간까지도 보이지 않던 신의 손길이, 인간이 인간을 방관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긍정하였을 때 비로소 현현한다. 모든 것은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노라, 알앤디는 언제나 말한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

 

 

상기 언급한 주제에 도달하기 위하여 쌓아올린 초중반 장면들의 연출적 의도 또한 훌륭했다. 장면마다 몹시도 아랜디스러운 안무와 가사와 조명의 연출이 아무렇지 않게 툭툭 튀어나와 극에 녹아들었는데, 이야기 전개의 지나친 진중함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독특하고 발랄하지만 날카로운 아이러니를 담아냈다. 구마의식에 필요한 소품을 수집하는 최부제의 동선을 마치 유쾌한 우당탕탕 대모험처럼 표현하면서도, 그 과정 속에서 김신부에 대한 다양한 평가와 여러 사제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만나게 함으로써 부드럽게 핵심에 다가갈 수 있게 돕는다. '돈돈이를 부탁해요' 넘버의 처절하게 애틋한 감성과, 갑자기 장르가 바뀌어버린 '인류가 멸망한 지구의 마지막 남은 소녀를 구해라' 넘버의 휘황찬란 레이저쇼 너머 은유적인 가사가 극에 콱콱 몰입할 수 있게 했다.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이 이토록 아랜디스러운데, 이토록 묵직한 클라이막스로 귀결될 수 있다니. 곱씹을수록 감탄스럽다.

 

 

배우들도 하나하나 너무 좋았다. "악몽 꿨나" 하고 물으며 시작하는 쌀부제와 처음으로 통화하는 장면에서 금욕적인데 섹시한 건신부님의 목소리와 자태에 내적 비명을 오백번 질렀다. 성가대를 꿈꾸던 영신의 주변으로 악마들이 모여들어 건신부의 목을 조여오는 순간 무심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툭 털어내는 그 익숙하고 나른한 손짓과, 악마에 씐 스승의 말에 대꾸하는 지치고 괴로우며 못내 안타까운 음성과, 후반부 구마의식 넘버들의 묵직하고 풍성한 저음이 지독히 매력적이었다. '도망쳐' 넘버 하나로 모든 서사의 개연성을 완성시킨 쌀가토도, 악마에 빙의된 자를 자연스럽게 연기한 가은영신도 훌륭했다. 이 페어 두 번 남았던데 한 번 더 보고 싶어..

 

 

무엇보다 마귀를 연기한 이지연 배우에게 홀딱 반했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커다랗고 그로테스크한 몸짓과 표정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필요한 부분마다 연출에 딱딱 맞춰 압도적인 위압감을 그려내는 능숙함이 최고였다. 신예 같은데 앞으로 챙겨보고 싶다. 벌써 6년째 만나고 있는 지혜근 배우는 역시 믿고 본다. 제천법사로써 굿판을 벌이는 '개 박살' 넘버는 노래도 안무도 연출도 백미였다. 장면이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로. 알앤디 극에서 자주 본 심건우 배우와 나머지 두 남앙들도 맛깔나게 다양한 연기를 선보여서 만족스러웠다. 무대 위 배우들이 빠짐없이 훌륭한 공연의 관극만족도는 더없이 높을 수밖에 없어서, 2층임에도 기꺼이 커튼콜에서 기립했다.

 

 

 

 

"신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다"

 

 

여러모로 아낄 수밖에 없는 알앤디의 창뮤를 놓치지 않아서 실로 다행이다. 휘황찬란한 오색 조명의 레이저쇼와 형광색으로 가득한 조명과 과장스러운 안무와 삐용삐용 신선한 넘버로 가득한 연출을 결국 인간의 선택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모아내는 아랜디만의 정성과 고집스러움이 애틋하고 든든하고 믿음직스럽다. 앞으로의 행보도 꾸준히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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