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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김씨 집안 박씨
in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장유희, 김재훈, 김다경, 맹원태, 전혜진, 박도현, 김수현, 정지훈, 정은영, 박혜림, 임태섭, 장희원.
생각지도 못하게 초대로 만나고 온 극이었는데, 그리 무겁지 않게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관극이었다. 무대 위 열두명의 배우들이 빠짐없이 잘하는 건 오랜만이어서 더 기껍기도 했다. 여리면서도 심지 곧은 주인공 여성 박씨를 연기한 장유희 배우의 흡입력 강한 정적의 매력이나, 목소리로 꽹과리 씬을 감칠맛나게 살리고 움직임으로 빨갱이 씬을 처절하게 표현한 남편 김씨의 김재훈 배우가 지닌 다양한 매력이 무척 안정적이었다. 시라노 초연과 지바고, 지킬 등 여러 대극장에서 만나 이미 알고 있는 맹원태 배우를 오랜만에 만난 것도 반가웠다. 자세와 걸음걸이, 목소리와 어투에 차이를 두는 것만으로도 나이/출신/성별/성격 등이 완전히 다른 인물들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을, 이 극의 배우들이 자연스럽고 멋들어지게 증명했다.
제반 연출도 흥미로운 지점들이 많아서 관극이 더 다채로웠다. 발랄한 조명의 색감, 적재적소에 활용된 적은 소품, 능숙한 배우들의 마임, 여러 형태로 변주한 반주와 넘버, 효과음 등이 수십 년의 세월과 다양한 상황, 여러 공간들을 무대 위에 그려냈다. 은유적 묘사만으로 무대와 객석 모두의 암묵적 합의를 끌어내는 연극적 허용이 영리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즐거웠다. 마당극의 형식을 기반으로 톡톡 튀는 센스가 돋보이는 연출을 곳곳에 심어둔 점이 좋았다. 젓가락으로 바닥을 탁탁 치고 딱딱 젓가락질을 하는 소리를 화음처럼 쌓아 올리는 장면과, 악기 하나 없이 배우들의 목소리 만으로 꽹과리 씬을 맛깔나게 살리는 장면, 전신주를 연상케 하는 기둥 하나하나에 선 자식들을 통해 전화만으로 간신히 이어져있는 고독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장면, 공간을 분리하고 선을 긋는 하얗고 긴 광목천을 사용한 수많은 장면 등이 기억에 남는다. 푸른 하늘 은하수 같은 익숙한 멜로디를 섞어낸 음악이 귀에 설지 않고 편안했는데, 무반주의 담담한 노래를 적절한 장면에 추가함으로써 짙고 큰 울림을 남겼다.
때로 미소 짓고, 때때로 한숨을 뱉고, 다시 또 웃으며 그의 일생을 바라보다가, 너 빨갱이지 하는 넘버의 연출에 숨이 턱 막힌 듯 힘들었다. 겹겹이 음성을 쌓아 올려 공간감을 최소화한 음악과, 한 사람을 마녀 사냥하며 조여드는 사람들의 밀집감을 극대화한 동선이 너무나 갑갑하고 고통스러웠다. 다른 슬픈 장면은 그저 애틋하게 봤는데 여기선 눈물이 투둑 떨어지더라. 무척 잘 짜인 장면이었으나, 남자 넷이 남편 김씨를 들어 올리고 휙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부분에서 배우의 머리가 당장이라도 바닥에 부딪힐 듯 가까워서 조금 위험해 보였다. 위태로움을 표현하기 위함은 이해하나, 무대 위의 안전이 걱정되는 순간 극의 몰입이 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고 부디 안전을 최우선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과 남편의 얼굴로 "남자는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른다"고 말해주는 연출만큼은 몹시 불호였다. 평생을 삼종지도에 매여 살아온 여성이 자유케되는 찰나를, 굳이 남성의 입으로 족쇄를 풀어주듯이 표현해야 했는가. 그대는 그렇게 살지 않았어도 됐노라는 말이 몹시 시혜적으로 들려서 거북했다. 작별을 고하는 여성 박씨의 앞에 펼쳐놓는 꽃이 "장미"인 이유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극 중에 장미와 관련된 내용이 나온 것도 아니었고, 포스터 속의 꽃 또한 동백꽃처럼 생겼으니 말이다. 그래도 새하얀 국화가 아니라, 붉은 톤의 화려한 색의 꽃을 사용한 것만큼은 좋았다. 꽁꽁 묶여 사는 대신 자유로운 신여성을 꿈꾸었던 박씨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얼굴로 양손에 꼬옥 꽃을 쥔 박씨의 화사함이 아름다웠다.
어디어디의 사대손이신 남편 김씨의 이름은 도련님이라 불리며 나왔던 것 같은데, 정작 주인공 여성 박씨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평생 딸, 아내, 어머니로만 불렸던 여성. 90 평생 슬하의 아이들을 챙기고 길렀다는 단순한 문장으로 설명되는 삶인 동시에, 들여다볼수록 다양한 굴곡과 사연과 감정으로 가득한 삶. 마땅하지 않은 희생으로 가득했던 그 인생이 익숙하고 평범하여 더욱 소중하다. 거칠게 변화하던 근현대를 고스란히 마주하며 살아온 어느 한 "여성"의 일대기가 꼭꼭 묵혀둔 설합 속에서 풀려나 다채롭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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