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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드
in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 2021.03.19 7시반
손승연 엘파바, 나하나 글린다, 서경수 피에로, 남경주 마법사, 이소유 모리블. 위키드 라센 자둘.
자첫 때 손나나 페어를 봤으니 자둘은 손정 페어를 보려고 스케쥴에 맞춰 예매를 해놨는데, 공연 시작을 한 시간도 안남기고 글린다 역의 배우가 변경됐다는 공지에 마음이 상했다. 관객에게 굳이 알리지 않은 무대 뒤 사정이 있겠지만, 변경된 배우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와서 대기를 하고 있었을텐데 이렇게 급박하게 통지 식의 변경 안내를 해야 했을까. 결과적으로는 이날 공연이 너무너무너무 좋아서 박수를 치다가 손바닥에 멍이 들 정도로 행복하게 즐기고는 왔지만, 조금만 더 일찍 공지를 했더라면 앞줄의 빈 좌석을 덜 볼 수 있었으리라는 확신이 있어 거듭 아쉽다.
다섯 번째 만나는 이 극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는데, 중블 4열 정중앙에 앉으니 첫 장면부터 생생한 4d 뮤지컬이었다. 굿뉴스를 외치며 팡 터진 축포가 객석까지 닿아 머리와 어깨와 의자에 가득 걸렸고, 화려하게 등장한 글린다의 비눗방울이 한가득 쏟아져나왔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오즈라는 동화 속에 퐁당 빠져드는 짜릿한 환상의 찰나가 황홀하고 행복했다. 무대 사이드 상단에서 거대한 조명을 직접 움직이는 스탭이 있는 것도 신기했고, 무대 연출 전반을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애써 미소를 걸어내는 선한 글린다의 아픔과 카랑카랑하게 쏟아내는 엘파바의 용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감동이 배가 됐다.
이날 손파바가 너무 좋아서 벅찬 마음이 주체가 안될 정도였다. 1막 첫 솔로곡인 The Wizard and I 넘버가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고 싶은 걸 희미한 이성을 붙잡아 가까스로 참아냈다. 숨기고 살아야 했던 골칫거리가 실은 위대한 재능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희열과 꿈을 향한 희망으로 잔뜩 부풀어 세상을 향해 제 존재를 마음껏 외치는 당당함과 자유로움이 눈부시게 찬란했다. 2막의 클라이막스 No Good Deed 넘버에 담긴 서사를 온전히 풀어내며 어마어마한 분노와 결심을 담아 끝끝내 맞서겠노라 외치는 카타르시스도 엄청났다. 1막 마지막 넘버 Defying Gravity 에서는 세상의 비밀을 마주하고 분연히 싸우겠노라 결심하는 소녀의 치기가 엿보였는데, 2막 노굿에서는 한 차원 더 나아간 것이다. 과거의 순수하고 어린 소녀와는 완전히 달라진 존재가 되어버린 초록 마녀가 당당하게 오즈를 향해, 세상을 향해, "나는 Wicked! 사악해" 라고 선언하며 오롯한 주체로 선다.
1막과는 전혀 다른 2막의 손파바에게서 1막의 앳되고 순수한 일면들이 드러나는 찰나가 그의 변화와 성장을 한층 극적으로 보여줬다. 반면 나나글은 자신이 계속해서 환하게 빛나고 있음에도 무언가 이상하며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점진적으로 깨닫는다. 속으로 썩어들어가지만 겉으로는 모두를 위해 한껏 아름답게 미소를 지어보여야 하는 괴리가 이야기의 진행 속에 아주 적절하게 녹아들어갔다. 2막 Thank Goodnees 넘버에서 피에로를 떠나보내고 "치룰 대가가 있고 또, 포기할 것이 있고 또, 힘든 시련도 견뎌내야죠" 하며 짓는 혼란스러운 미소가 그의 내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기쁜 게 당연해" 라거나 "더없이 행복해" 라고 노래하면서 전혀 기쁘지 않은 그 표정이 아팠다. 친구의 선택을 믿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홀로 굳건히 걸어가는 마지막 장면의 글린다 얼굴이 오래도록 생각날 것 같다.
"행복을 빌어 네가 선택한 길. 너를 축복할게.
다 이룰 수 있기를 후회 따위는 없기를.
행복해야 해 친구야. 너의 행복을 빌게."
어린 소녀들이 예기치 못한 상황 앞에서 서로의 손을 꼭 붙든 채 두려움에 떨다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마주하며 서로의 길 앞에 행복을 빌어주는 이 우정이 벅차게 아름답다.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시련과 갈등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고 자신만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기로에 서게 된다. 이전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그리하여 결국 내일로 나아가야만 할 시간. 내가 선택한 이 길을 함께 걸을 수는 없지만, 그 길을 이해하고 축복해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발걸음이 보다 굳건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이 눈부신 우정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음주 마지막 티켓팅도 손나나를 잡을 예정이다. 사랑에 빠져버렸어, 손파바와 나나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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