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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in 샤롯데씨어터, 2021.04.09 3시
전동석 팬텀, 이지혜 크리스틴, 신영숙 카를로타, 홍경수 카리에르, 에녹 샹동, 임기홍 숄레, 김주원 벨라도바, 김현웅 젊은 카리에르, 이시목 어린 에릭, 이하 원캐. 팬텀 4연 자첫자막. 팬텀 자여덟, 동릭 자넷, 신칼롯 자다섯.
반가면 도입과 이에 대한 제작사 EMK의 생각 짧은 발언 때문에 이번 시즌 또한 삼연처럼 패스하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시간이 났고 또 우연히 엄청나게 좋은 페어였고 또 우연히 덕친이 현매로 꿀자리를 잡아주셔서 결국 파리의 지하묘지를 방문하게 됐다. 초연 충무와 재연 블퀘와는 또 다르게, 폭이 좁아 아늑하고 객석과의 거리가 다소 가까운 샤롯데 무대는 또 다른 인상을 자아냈다. 초재연 관극 시 매번 불안했던 무대 구조물 안전문제는 여전해 보였으나, 그때보다는 덜 산만하게 느껴진 건 이 작품에 지나치게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재연 관극 이후 무려 4년 만의 만남이었음에도, 워낙 애틋하고 특별한 작품이기에 모든 장면들이 반갑고 그립고 익숙했다. 조금은 나아진 오버츄어의 촌스러운 폰트마저 반가웠고, 오페라의 유령에 비해 작고 앙증맞은 샹들리에까지 눈부시게 느껴졌으며, 아름다운 음악이 풍성한 오케스트라 연주로 펼쳐지는 순간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역시 나는 이 극을, 파리 오페라하우스 지하에 사는 하얀 가면을 쓴 팬텀을, 온 마음을 다해 지독히도 사랑한다.
비록 카리에르는 에릭이 "고작 오페라를 통해 세상을 배웠고, 환상 속에 살고 있" 다고 탄식했지만, 그 환상이야말로 팬텀이 실재토록 한 근간이자 이 모든 이야기의 핵심이다. 화려한 무대와 아름다운 음악, 그리고 그 너머의 삶을 꿈꾸고 동경하는 이에게, 무대 위 세상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이 극을 "종합예술"로써 관극한 것은 자여덟 만에 처음이었다. 언제나 불만족스러웠던 팬텀의 푸가에서 앙상블의 화음이 어우러지는 느낌을 받았고, 오페라와 발레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극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제 역할을 다한다는 인상도 처음 받았다. 다채로운 장면들이 쌓이고 모여 하나의 온전한 비극적인 이야기를 완성하는 희열을 만끽하며 오롯이 극을 음미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다. 1막은 작품 전체를 관조하며 흥미진진하게 관극했고, 2막은 피크닉부터 비극맆까지의 노선과 디테일이 무척 취향이어서 푹 빠져들었다. 1막 레슨씬에서 카를로타의 오페라를 본 것도, 비스트로에서 구석구석 배우들의 잔망을 구경한 것도, 파리의 얼굴 없는 이들을 조금 더 주의 깊게 응시한 것도, 이날이 처음이었다.
각오했던 반가면은 생각보다 덜 어색했고 더 몰입을 방해했다. 팬텀의 감정에 따라 변화하는 가면의 다양성이 충분히 이 극의 정체성이 될 수 있을 텐데, 굳이 얼굴을 최대한으로 드러내는 방향성을 택한 연출의 무지와 태만함을 용납하기가 어렵다. 평생 스스로를 숨기고 부정하며 살아온 에릭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 믿게 된 음악의 천사 앞에서 굳이 제 치부를 한껏 드러내는 위험을 감수하리라는 개연성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어렵다. 부디 다음 시즌에서는 이 연출에 대해 재고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굳이 파리의 오페라극장을 찾아 나선 관객은 결코 팬텀의 잘생긴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것이 아니다.
※스포있음※
재연 때 무척 사랑했던 동졔 페어를 다시 만나서 즐거웠는데, 동릭의 노선이 유난히 애정 가득한 연애 노선이어서 흥미로웠다. 이날처럼 스킨십 많은 레슨씬과 유아뮤직은 처음이었다. 등을 돌린 채 난간 너머로 손을 뻗는 졔크리의 동작에 맞춰 그를 향해 손을 뻗는 동릭의 손끝이 똑닮아서 짜릿했는데, 그 직후 정반대로 동릭이 등을 돌리고 졔크리가 그를 향해 손을 뻗는 장면에서 동릭이 난간 너머로 손을 뻗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비스트로가 끝나고 "벨라도바" 라는 이름을 듣자 고개를 살짝 돌려 쓸쓸함과 처연함을 내비치는 동릭의 옆얼굴은 무척 좋았다. 이그그품 후반부 중블 오른편 앞에 무릎 꿇은 채 "붙잡으려 해도 내 손 틈 사이로" 하며 양손의 손가락 사이로 속절 없이 흘러넘치는 감정을 걷잡을 수 없는 눈으로 응시하다가, "내 사랑 전부 녹아 흩어져" 하며 바닥을 닥닥 긁으며 절박하게 애달파하는 동릭 디테일 또한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동릭은 피크닉씬부터 내가 잘 알고 또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노선으로 돌아왔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노래하는 My mother bore me 넘버 속 음색이 무척 좋아서 푹 빠져들었는데, 졔크리 역시 그 짙은 감정에 계속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빤히 보며 "왜 울어요?" 라고 묻는 동릭의 질문이 담백한 애드립이라고 생각했는데, 2막 피날레에서 유아뮤직 맆을 부른 졔크리의 뺨을 닦아주며 "울지마요" 라고 동릭이 마지막 말을 속삭이는 순간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제 삶을 이해하고 아픔을 공감하여 대신 눈물을 흘려준 크리스틴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 전하는 말. 날 위해 울지 말라는 속삭임.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어둠 속에 살며, 어둠 그 자체가 되어 버렸던 그가 비로소 만난 구원.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크리스틴을 향해, 에릭은 더없이 만족스럽고 따스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으리라.
동릭의 발성이 재연에 비해 사뭇 달라졌는데, 묵직한 성악톤과 맑은 미성을 혼재하여 사용하는 스타일이 새로웠다. 1막에서는 이 극렬한 차이를 넘나드는 연결 고리가 약간 아쉬웠는데, 2막 비극맆은 그 변주가 유려하고 부드러워서 넘버 자체가 강렬하고 경탄스러웠다. "이 무대에 '펼쳐진'" 하며 소리를 긁어내는 처절함이 특히 매력적이었다. 울음기를 섞어내며 일부러 흐릿하게 맺는 끝음의 질감도 보다 정돈되었고, 길고 풍성하게 뽑아내는 마지막 음도 이전보다 짜임새 단단한 소리가 나서 귀가 즐거웠다. 얇고 애틋한 미성의 활용만 조금 더 능숙하고 자연스러워진다면 이날 1막에서 느꼈던 아쉬움마저 해소될 듯하다. 이 배우도 꽤 오래 보고 있는데, 아직도 짜릿함과 부족함이 혼재되어서 놓을 수가 없다.
이 극은 앞으로 몇 연으로 돌아오든 결코 완벽히 놓을 수 없으리란 것을 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배우를 처음 만난 작품이기도 하고, 너무나도 사랑하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부디 인물의 감정선을 퇴색시키거나 캐릭터 자체를 왜곡하지 않는 연출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다음 시즌은 불편한 마음 없이 즐겁게 회전을 돌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이번 시즌은 몹시 만족스럽고 행복한 이 날의 관극으로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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