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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유래 없이 위태로운 시국의 한가운데에서, 수많은 노력과 준비가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스러져버렸다. 예기치 못하게 빼앗긴 예매내역서를 보며 가슴이 찢어졌고, 각오했던 일괄 취소 안내 문자를 받으며 속이 쓰렸다.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원동력이 없으니 일상이 무사하지 못했다. 하반기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라만차가 개막 연기된 후로는, 악착같이 살아낸 하루들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연초에 세웠던 덕질 목표는 달성 코앞에서 수차례 좌절되다가 끝내 해를 넘기고 말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으로 인한 무력감 때문에 꽤 깊게 절망하고 꽤 짙게 울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맹렬히 분노하고 끝없이 우울해하기에는 너무 길고 지난하며 무거운 나날들이었다. 잃어버린 공연들로 인한 상실감을 대신 채워내지는 못해도, 살아남은 공연들이 건네는 다정한 격려와 따뜻한 희망이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끝까지 무대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수많은 노력이 고맙고 애틋한 한 해였다.
류큘의 삼연 합류 공식 발표 덕분에 한없이 들떴던 정초와 류정한 배우님의 지천명을 양껏 축하해드릴 수 있었던 1월의 기억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벅차고 행복하고 짜릿하고 고맙고 즐거웠던 경험 덕분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찰나에도 기억을 되새기며 미소를 걸곤 한다. 올해였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퀸 내한콘도 무한한 영광이었다. 코로나로 위협받지 않을 수 있었던 마지막 자유의 시기는 소소한 다작으로 채워졌다.
입덕 이후 매 순간 갈망했던 류큘을 마침내 영접했다. 상상만했던 무대 위의 백작님이 매번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격렬한 자극을 선사하여, 만날 때마다 짜릿하고 마주할 때마다 벅차올랐다. 총 29번의 류큘 회차 중 21번을 관극했다. 류선녀 12회 중 6회를, 류임 10회 중 10회를, 류린 7회 중 5회를 만났고, 류임 페어전관을 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했다. 삼연 기간 동안 류배우님 공연 100번째 관극과, 입덕 5주년이라는 특별한 기록도 남길 수 있었다.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3/25 마티네 퇴근길을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4월 초 3주 간의 공연 중단은 길고 고통스러운 잔상을 남겼다. 재개된 드라큘라 삼연은 다행스럽게도 총막까지 무사히 마무리됐다. 그러나 위태하게 이어지던 레베카 지방공은, 드큘 총막 이후 회차들이 전부 취소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입덕 5주년에 맞춰 완성한 선물은 아직도 어두운 상자 속에 잠들어 있고, 공연일자 때문에 포기한 5월 말 부산 류신젼 1열은 여전히 아른거린다.
뎅옵의 첫 번째 연극으로 렁스라는 극을 만날 수 있어 기뻤다. 사랑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렌트를 시기 상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해 무척 아쉽다. 다음 시즌에는 크리스마스가 있는 한겨울에 만날 수 있기를 고대해본다. 헤드뱅잉과 떼창으로 신나게 즐겨야만 하는 리지의 커튼콜을 조용히 박수만 칠 수밖에 없는 시국에 만나서 고통스러웠다. 이 멋진 배우들과 함께 돌아올 재연에서 "머리가 왜 없어!" 라고 목청 터지도록 떼창 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올해는 드큘뿐만 아니라, 첫 만남에 바로 본진극으로 등극해버린 오페라의 유령까지 있었다. 심장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오유의 오버츄어가, 환상이자 환상이 아닌 무대 위 세상을 사랑하는 연뮤덕으로써의 본질을 일깨워졌다. 영영 만날 길 없는 류라울을 향한 갈증과, 언젠가는 기필코 만나리라 믿는 류팬텀을 향한 갈망이, 절망적인 무대 바깥의 세상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만든다. 지독히 찬란하여 더없이 아름다운 밤의 노래가 환상을 꿈꾸게 한다. 오유 류팬텀 오면 공연장 근처에 집 구해서 전관해야지.
광복절 집회로 야기된 팬더믹 때문에 한 달이 넘게 공연장을 찾지 못하다가, 여름휴가를 기점으로 소소하게 다시 관극을 시작했다. 벌써 10주년인 창뮤 베르테르를 이제야 만났고, 작년에 내한공연으로 봤던 썸씽로튼을 라이센스로 다시 마주했다. 신선하기 그지없었던 은롤라를 통해 배우의 역할과 매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었다. 힘겨운 시기에 관극 하나하나가 더없이 귀하고 고마웠다.
다작하려 노력한 11월과 텅텅 비어버린 12월. 젠가 재연 첫공으로 재회한 뎅몬티를 자둘하는 게 이토록 어려울 줄 미처 몰랐다. 노담 한국 1000회 공연을 만날 수 있어 영광이었는데, 이 또한 자둘이 여의치 않아서 괴롭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국이기에, 현장성과 찰나성이 핵심인 공연예술이 너무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보이지 않는 끝을 향해 내달리다가 여러 번 주저앉기도 절망하기도 했던 2020년에 마침내 작별을 고하며, 낙담보다 희망이 슬픔보다 기쁨이 많은 2021년에 기꺼이 악수를 청해 본다. 견뎌낸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한 해를 과거로 흘려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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