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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스피치
in 아트원씨어터 2관, 2020.12.04 8시
서현철 라이오넬, 조성윤 버티(조지6세), 양서빈 엘리자베스, 이선주 머틀, 정원조 데이비드/코즈모 랭, 최명경 조지5세/윈스턴 처칠.
콜린 퍼스와 제프리 러시가 나오는 영화를 워낙 재미있게 봤던지라, 한국 초연인 이 연극의 프리뷰 공연을 챙겨봤다. 장면들의 공간적 배경을 관객의 상상력에 어느 정도 의존해야 하는 장르의 특성과 무대와 객석의 가까운 거리 때문에, 영화에 비해 버티가 더 인간적이고 가깝게 다가왔다.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변화해야만 하는 기득권의 혼란과 두려움을 매끄럽게 담아내며 몰입과 공감을 높였다.
"나도 말할 권리가 있어요! 인간으로써! 목소리를 가진 한 인간으로써!"
특징적인 소품과 조명 등을 활용하여 작은 무대 위에서 여러가지 공간적 배경을 펼쳐냈다. 무대 바닥이 계단식으로 되어있어 장면의 변화와 인물들의 눈높이 차이 등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그러나 세모꼴의 중간 무대가 배우들 동선을 제한하여 잘못 디디면 크게 휘청할 것만 같은 아슬함이 신경쓰였다. 무대 안쪽의 조명을 통해 극적인 상황의 긴장감과 수많은 시선에 압박당하는 버티의 아득함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다양한 엘리자베스의 의상들이 왕족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효과를 냈다. 다만 라이오넬과 언성 높여 다투다가 그대로 대관식으로 넘어갈 때 스카프를 매고 있는 버티의 의상은 별로였다. 장면 전환의 연극적 허용을 감안하니 대관식용 의상이나 왕관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그 공식적인 자리에서 외출용 스카프를 두른 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조성윤 배우를 올해 연극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데, 안정적인 캐릭터 해석과 연기가 이야기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극 내내 말을 더듬을 때마다 꺼억꺼, 하는 목에서 단어와 음절이 턱 걸리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사이사이 섞어내며 현실감을 더했다. 주변 모든 것들에 짓눌리고 압도당해 초조함과 공포에 휩싸인 괴로움이 넘실거리는 눈빛이 특히 좋았다. 분출되지 못한 채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외로움과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두 눈이, 주변적 상황과 학대로 인한 후천적 습관에 대한 서사를 온전히 담아냈다. 극 중간에 딸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동화책을 들어 펼치면서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책을 사랑하던 엉톰이 겹쳐보였고, 온 몸의 긴장을 풀기 위해 라이오넬 앞에서 그 긴 기럭지를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드는 웨이브에서 장례식장 앨빈을 따라들어가는 엉톰이 포개졌다.
"왕은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해야할까요. 아니면 국민의 기대하는 것을 해야할까요?"
지구 사분의 일을 점령했던 제국주의 대영제국의 상징으로써 왕이 해야할 책무를 요구하는 정치인 윈스턴 처칠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기업으로써 주어진 의무 아니 업무를 수행해야만 한다는 왕 조지 5세를 같은 배우가 연기해서 재미있었다. 왕의 책무보다 개인의 사랑을 우선시한 데이비드와 그를 비판하고 퇴위시키는데 일조한 대주교 역시 동일한 배우여서 역설적인 매력이 있었다. 히틀러에 동조하는 왕과 신을 맹신하는 종교인 모두 불편하고 짜증스럽다는 일관성까지 좋았다. 서빈엘리자베스와 선주머틀은 각기 다른 위치와 생각을 단단하고 매끄럽게 표현했다. 버티를 든든하게 지지해주는 서빈엘리의 목소리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스스로가 왕이라고 믿어지십니까?"
지위와 배경과 역할과 가치관이 완전히 다른 버티와 라이오넬의 대립은 서로를 상처 입히는 동시에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라이오넬에게 고작 배우 주제에 감히 주제 넘게 굴지 말라고 역정을 내는 버티와 왕인 당신 또한 배우로써 연기해야 할 뿐이라고 지적하는 라이오넬은, 본질적으로 닮았다. 다른 점은, 배우는 무대 위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 왕은 무대 위 모든 소품과 상황이 진짜라고 믿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연설문 직전 라이오넬이 묻는다. 이제 스스로 왕이라고 믿어지느냐고. 왕이 될 준비가 되었느냐고.
"지금이 우리 역사상 가장 운명적인 순간일 것입니다."
2차 대전을 알리는 조지 6세의 연설문이 근래의 시국과 많이도 겹쳐서 울컥했다. 최전선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사람들. 내일은 험난하고 힘들겠지만 어두운 날은 곧 끝날 것이고, 우리가 걷고 있는 옳고 정의로운 길은 끝내 승리로 이어질 것이다. 벅차고 감동적인 연설문을 무사히 끝낸 버티에게 라이오넬이 씩 웃으며 모음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자, "일부러 그랬어요. 난 줄 모를까봐." 하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는 엉버티의 목소리가 여즉 귓가에 남는다. 현재를 인정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 인간의 의지가 담긴 그 얼굴의 잔상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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