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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in 샤롯데씨어터, 2020.04.30 7시

 

 

 

 

류정한 드라큘라, 조정은 미나, 강태을 반헬싱, 이예은 루시, 진태화 조나단, 김도현 렌필드. 류큘 12차, 류선녀 자넷.

 

 

평소보다 약간 뒤쪽이어서인지 혹은 샤롯데 공연장 내부가 너무 더워서인지, 이전 류선녀 공연에 비해서는 약간 몰입이 떨어졌다. 류큘이 나오는 장면들은 재미있는데, 그 외는 몰입이 떨어져서 전체적인 집중도가 아쉬웠다. 그러나 이 페어는 피날레 하나만으로 티켓값의 가치를 다한다. 이전 회차들보다 더 맹렬하고 처절한 선녀미나의 감정에 제대로 정신도 못차리고 완전히 빠져들었고, 마지막 장면에선 심장이 미어지기까지 했다. 이 쫀쫀한 결말 때문에 류선녀를 거듭 찾게 되는 거겠지.

 

 

스포있음

 

 

"하지만 내 사랑이 당신의 순수한 영혼을 파괴할 것 같아 정말 두려워요."

 

 

0425 공연부터 피날레에서 "당신의 모습"이라는 원래 대사 대신 "당신의 영혼"이라 바꿔서 말하던 류큘은, 이날 공연에서 "당신의 순수한 영혼"이라고 또 한 번 변주를 넣었다. 영혼이라는 단어는 드라큘라가 인간에게서 빼앗아버리는 대상으로써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반헬싱은 "미나의 영혼을 파괴하면서까지..." 하며 드라큘라를 비난하고, 미나 역시 렌필드에게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바칠 만큼 그렇게 값진 것"이냐 묻는다. 그래서 류큘 역시 미나의 "영혼"을 파괴할 수 없노라 말하는 것이다. 이 자체만으로 류큘의 디테일이 지닌 힘은 엄청난데, 이날 "순수한" 이라는 형용사를 덧붙이며 한층 파급력이 커졌다. 회차를 거듭하며 디테일을 쌓아가는 류큘 덕분에 회전 도는 게 행복하다.

 

 

다만 대사 간의 일관성에 집착하는 강박이 약간 있는 자로써, "순수"보다는 "순결"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기는 하다. 첫 장면에서 엘리자벳사의 초상화를 보며 "그녀의 눈을 보세요. 순결함이 느껴지죠?" 하고 묻는 대사도 있었고, She 넘버에서도 "순결한 사랑"이라는 가사가 있기 때문이다. 유사한 맥락이니 큰 차이는 없지만 괜히 아쉬워서 남겨본다. 공연마다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디테일을 선사해주시는 류배우님 덕분에 자꾸 작은 요소들에 섬세하게 신경 쓰게 된다.

 

 

 

 

2막 플돈미 시작 직전 미나가 허공의 드라큘라와 대화를 하는 장면. 여기서 드라큘라 영상이 총 네 번 나오는데, 처음 두 번은 형태마저 흐릿한 안개 같고 마지막 두 번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모습을 보인다. 바뀌는 시점은 이 대사.

 

 

"당신에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리고 그 공허함을 채울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예요. 그건 내가 평생도록 느껴온 나와 같은 공허함이니까."

 

 

진폭의 결은 달라도, 미나들은 전부 이 지점에서 흔들린다. 곧이어 "당신도 날 사랑하잖아," 하고 속삭이는 류큘의 목소리가 영혼까지 뒤흔든다. 사랑하면 안 되고 원해서도 안 되지만 이미 깨달아버린 감정이, 흡혈이라는 기제 없이도 미나에게 드라큘라의 이미지를, 그 존재를 선명하게 만든다. 지난주에 발견한 이 연출이 곱씹을수록 좋아서 미나의 감정에 한층 깊이 몰입하게 된다.

 

 

이날 선녀미나는 "쫓기는 사슴이 숲 속에 숨어있듯" 라는 윙즈의 가사에 정확히 부합하며 애써 감정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했다. 자석처럼 이끌려 드라큘라에게 가까이 다가서면서도, 내버릴 수 없는 이성이 양손으로 그의 품을 탁 뿌리치게 만든다. 그래서 시덕션의 키스가 그토록 맹렬하고 처절하며 숭고하다. 육체는 그저 매개일 뿐, 류선녀는 영혼으로 맞물린다. 그래서 반헬싱을 감싸는 미나를 이해할 수 없는 류큘의 당혹이 애달프고, 냉혹과 유약을 찰나에 넘나드는 선녀미나의 트시가 맹렬하다. 침대에 걸터 앉아 흘려내는 혼란이 짙을수록, 모든 걸 내던지는 피날레가 처절하게 아름답다.

 

 

비로소 제 운명을 끌어안은 선녀미나이기에, 그대를 내 어둠 속에 갇히게 할 수는 없다는 류큘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발작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눈앞에 강제로 들이밀어진 현실을 거부해보지만, 사랑만을 위해 살아온 류큘을 알기에 차마 그 손을 놓아버리지 못하고 이끌리듯 끌려간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강하게 부인하고 버티는 붉고 처절한 임미나와 다른, 무엇도 물들일 수 없는 아득한 단색의 절망. 제 손으로 영원한 안식을 건네야만 했던 선녀미나는 날숨을 토해내는 것조차 잊고 밀려드는 감정에 휩쓸린다. 들끓는 오열이 잇새로 비져나오는 순간 쏟아지는 고통. 관 위로 몸을 던진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온몸을 파들거린다. 러빙유 직후의 류큘이 그랬던 것처럼. 비틀대며 관 옆에 가까스로 선 선녀미나는 "용서..해.." 하며 양손을 모으고 천천히 손가락들을 포갠다. 당장이라도 생명이 꺼져버릴 듯한 목소리로 "..요.." 를 중얼대며 깍지낀 손가락을 접는다. 간절한 기도를 담은 그 떨리는 손끝이 길고 긴 잔상을 남긴다.

 

 

 

 

프블에서 뱀슬들을 쫒아보낸 뒤 양팔을 벌리며 곧 있을 짜릿한 만찬을 미리 만끽하듯 탐욕스러운 표정을 짓는 디테일을 몹시 사랑한다. "나를 두려워하는" 부분을 0429처럼 중블 왼쪽 앞 객석을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불렀고, 이어 "나를 알고 있는" 부분 역시 비슷한 톤의 젊은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왼팔을 성벽 쪽으로 확 펼치고 눈을 번뜩이면서 "여기 이 성을 떠나" 까지 이어가는 순간, 비밀스러운 계획을 미리 귀뜸하며 이어질 사건들을 예고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솔리터리맨은 구전설화가 되어버린 제 과거를 풀어내는 서술자 같았다면, 이날 프블은 직접 만들어나갈 제 미래를 선언하는 예언자 같았다. 젊어지기만 해도 충분히 강렬한 이 넘버에서 이렇게까지 변주와 디테일을 넣어주시다니, 대체 배우님의 섬세함은 어디까지인가. 바로 이어지는 "새로운 피로" 부분은 다시 세월이 묻어나는 묵직한 톤으로 순식간에 바꿔버리는 것까지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0425부터 계속 낮춰불렀던 She의 "악마에게" 부분을 다시 높여부르는 순간 짜릿한 카타르시스에 사로잡혔다. 비명처럼 찔러내는 류배우님 고음을 몹시 사랑하기에. 뒤쪽에 앉으니 넘버 후반 어두운 무대 위를 오롯이 노래와 존재감 하나로 가득 채워내는 류큘의 거대함이 명확하게 보여서 새삼 경이로웠다. "이미 결혼했잖아.." 하고 어미를 흐리며 울먹거리는 애절한 절망. 무릎 꿇은 채 한 번, 일어서서 한 번, 고함을 뱉어내며 양손을 파들파들 떤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는 것까지 완벽해서, 무대가 전환되는 내내 여운이 짙었다. 부케는 완벽하게 잡고 그대로 퇴장했고.

 

 

예은루시와 함께할 때 성량을 줄이지 않기에 더욱 짜릿한 랖앺랖. 음성만으로 희열이 느껴지는 이 넘버는 들어도 들어도 들을 때마다 짜릿하다. 0429와 동일하게 "나를 대-적하지 못해" 라는 잇츠오버 변주가 있었다. 아, 프블 앞머리 쓸어넘기는 건 이전처럼 오블에서만 한 번 했다. 대신 왼블 쪽에는 오른쪽 검지를 탁 가리키며 치명적인 미소를 걸어냈다.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사랑."

 

 

무사히 무대로 돌아온 류큘 덕분에 세상이 다시 밝아지고 삶이 보다 아름다워졌다. 8일 동안 5번이나 류큘을 만났음에도 또다시 보고싶어 끙끙 앓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또 행복하다. 4월 전관을 했으니 5월도 힘내서 트란실바니아 성을 방문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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