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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in 샤롯데씨어터, 2020.04.29 8시

 

 

 

 

류정한 드라큘라, 린지 미나, 손준호 반헬싱, 김수연 루시, 이충주 조나단, 조성린 렌필드. 류큘 11차 관극. 류린페어 자둘. 이 페어의 첫공을 보고 페어 자체막공을 선언했었다. 그러나 3주라는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하듯, 공연 재개 첫주 3회차 내내 류큘이 너무나도 짱짱했고 끝내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오직 류큘 하나만 보고 감행한 관극이었고, 오직 류큘 하나만 완벽했다.

 

 

류큘이 너무나 훌륭한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어마어마했던 프블을 자체적으로 다시 재생하며 다음 장면을 흘려보냈고, 맹렬하던 She를 재차 곱씹으며 홀로 연기하는 류큘의 감정선에 설득력을 덧씌웠다. 분명 무대 위에 여러 인물들이 서있었지만, 오직 류큘만이 오롯이 존재했다.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는 류큘의 넘버와 연기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빠져들었다가, 다음 장면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눈물을 주륵주륵 흘렀다. 이야기에 감화되어서가 아니라 류큘에게 매혹당해서, 이어지는 감정에 몰입해서가 아니라 류큘에게 온 마음을 빼앗겨서. 너무 좋아서, 끝내 서러웠다. 종합예술을 만나러 왔음에도 오직 한 사람만이 온전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 그런데도 그 한 사람이 지나치게 훌륭하여 감당할 수 없는 짜릿함으로 기뻐하고 마는 스스로가 자꾸 우스워져서.

 

 

 

 

스포있음

 

 

묵직하고 무시무시한 존재였던 이날의 류큘은 제반 넘버들을 전부 강하게 눌러내며 압도적인 위압감을 선사했다. Fresh Blood가 11번의 관극 중 최고로 좋았다. "강인한!" 하고 세게 강세를 넣었고, 이전과 다르게 "나를 두려워하는" 부분에서 객석을 응시하며 약간 젊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노래했다. 젊어진 뒤 오블 쪽으로 걸어오면서 머리를 쓸어넘기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건 채 왼블로 걸어가 뒤돌기 직전 한 번 더 머리를 쓸어넘기며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압도적인 검은 머리 붉은 코트의 류큘이 위트비베이 직전까지 무대 앞쪽에 아른거렸다. 탈선 드립을 치며 장난기가 넘실대던 류큘은, 대놓고 어이없어하는 미나의 대꾸에 고개를 숙이고 "농담입니다..."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연구까진 아니더라도 노력하겠습니다." 라는 애드립도 귀여웠다.

 

 

She에서 신을 저주한 류큘은 "엘리자벳.." 하며 말을 잇지도 못하고 울먹인다. 꾹꾹 눌러부르는 후반부가 완벽해서 박수조차 칠 수 없었다. 정적 속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는 류큘의 숨소리가 명확하게 들려왔다. 러빙유가 끝나고 쏟아내는 고함에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운명을 향한 서슬 퍼런 노여움만이 가득 담긴 건 처음 봤다. 잘 받아낸 부케를 든 손으로 루시를 가리키며 흉흉한 눈빛을 이글거린 뒤, 그대로 들고 퇴장했다. 랖앺랖은 이미 런던 정복을 끝낸 듯 강렬하고 어마어마했다. 어쩜 이렇게 매번 쩌렁쩌렁하고 완벽할 수 있지?

 

 

랖앺랖 끝나고 무대 상수가 아니라 하수로 퇴장하는 류큘을 이날 처음 봤다. 0423 공연에서는 윙즈의 "모두 버리고" 에서 무대로 들어왔는데, 0425와 이날 공연에서는 조금 더 앞쪽인 "하늘 위로" 부분에서 들어왔다. 인비테이션 넘버 중간에 무대 오른쪽 벽들 틈 사이로 조명이 보이고, 그 앞으로 뱀슬 세 명과 류큘이 지나가는 인영이 스친다. 등퇴장이 다 보이는데, 퇴장하자마자 벽 뒤쪽으로 커튼이 쳐지면서 조명이 가려진다. 왜 미리 가리지 않고 그 시점에 가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동안 수없이 재창작된 드라큘라 백작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아낸 듯 새하얗고 맑고 단정한 시덕션 류큘의 미모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잇츠오버 도입부 "너 따윈 날 대적하지 못해" 부분을 "너 따윈 날 대-적하지 못해" 하고 살짝 변주를 줬다. 트시에서 "영원해" 하며 풍성하고 묵직하게 목소리가 돌변하는 순간 내 세상이 멈추고, 마지막 "영원한 삶" 하고 세게 긁어내는 목소리에 내 심장이 멈춘다. 더롱거에서 관쪽으로 내려오기 전 "내 세상 멈추네" 하는 류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맘의 빛 태양이 아니라 류큘 음성임을 여실히 깨닫는다. "세상 모든 걸 알 줄 알았는데" 하고 바닥까지 파고드는 저음부터 회한과 절망에 젖어 맹렬하게 내뿜는 클라이막스까지, 더없이 완전한 더롱거였다.

 

 

"400년 동안 당신을 사랑해왔어요. 당신은 내 삶의 유일한 빛이야." 라던 류큘은 넘치는 감정에 뒤로 고개를 살짝 젖혔다가, 눈을 감고 "하지만 내 사랑이 당신의 영혼을 파괴할 것 같아 정말 두려워요." 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노래도 "나의 절망 속에" 다음 부분인 "너를 가둘 수 없어" 하는 가사에서만 눈을 감았다. 마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그의 영원한 어둠을 상징하듯이.

 

 

이날 류큘이 입에 올리는 사랑이 애정보다는 소유욕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피날레 전까 그 사랑이 "당신의 영생을 포기할만큼 그렇게 값진 것인가요?" 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제 감정이 사랑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정복이든 영생이든 죽음이든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해진다. 많은 날들을 지낸 그의 삶 내내 갈구하던 단 하나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찰나의 허망함이 모든 서사를 완성시켰다. 그래서 미나도 엘리자벳사도 없었던 이날조차 온전한 개연성을 지닌 결말을 만나고 왔다.

 

 

본 회차에 후회는 없지만 볼 회차에 회의가 생기는 관극이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객석에 앉아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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