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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 앤틀러스

in 아트원씨어터 2관, 2020.02.18 8시

 

 

 

 

유리아 비지터, 황민수 맨, 김금나 우먼, 김미로, 신동민 멀티. 믿나 자첫.

 

초재연을 놓쳐서 아쉬웠던 이 극이 젠더프리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망설임 없이 예매를 했다. knock, knock, knock, 문을 두드리는 율지터가 무대를 날아다니는 모습에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 라이브 연주가 강렬하고 매끄러운 음악을 생동감 넘치게 풀어냈고, 반주와 효과음의 박자에 맞춰 휙휙 변하는 조명이 음산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매력적으로 살려냈다. 세련된 위압감은 율지터가, 불안한 광기는 금나우먼이, 처절한 변명은 민수맨이, 다양한 상황과 인물은 멀티 배우들이 감각적으로 표현하며 이야기를 클라이막스로 이끈다. 멈춰버린 시간의 묵직한 침묵을 보다 강조하는 연출이 있었더라면 극의 분위기가 한층 짙어졌을텐데. 프리뷰임을 감안하지만, 배우들 대사가 겹치고 살짝 씹히는 것도 아쉬웠다. 투명한 샴페인 잔이 두 번이나 떨어진 것도 사소하게 몰입을 방해했다. 잘 정돈된 깔끔한 공간이 갑자기 깨진 일상과 지독한 혼란을 효과적으로 드러냈다. 다만 2층 무대가 낮아서 위대한 권력을 상징하는 거대한 사슴뿔 하단에 배우들 머리가 부딪힐까봐 가끔 불안했다.

 

 

※스포있음※

 

 

극의 인물들은 이름을 부여받는 대신 맨, 우먼, 변호사, 변호사의 아내 등으로 호명된다. 살아남기 위해 내면의 악마를 끄집어내는 이들의 이야기가 특정인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누군가의 선택일 뿐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극 초반 위태로운 우먼의 불안감은 자기보호를 위한 위악이고, 뭉뚱그린 맨의 자신감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한 위선이다. 이 차이는 "손이 엉망" 이라며 손을 씻으러 들어가는 맨과 우먼의 동일한 행위로 명백하게 드러난다. 맨이 씻어낸 서류의 잉크는 무고한 자들을 고발한 생생한 흔적이다. 우먼이 씻어낸 비지터의 피는 감추고 묵과해온 진실을 부정하는 처참한 발악이다.

 

 

"회개할 시간에 선악과 두 개 먹어

누구나 악마죠 때로는"

 

 

1938년 새해를 알리는 자정 직전의 노크소리. 우리집만은 비켜가길 간절히 바랐던 엔카베데의 노크. 첫 번째 방문에서 율지터는 맨에게 집 안으로 초대해달라 청한다. 인간의 허락 없이 인간의 공간에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악마처럼. 두 번째 방문에서 율지터는 이미 초대를 받았던 손님이기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선다. 낯선 방문자가 채워야하는 할당량의 마지막 인물은 누가 될 것인가. 유쾌한만큼 기괴해지고, 발랄한만큼 잔인해지는 노래와 춤이 애써 숨겨온 내면의 악마를 한꺼풀씩 벗겨낸다. 특히 각하에게 직접 친구를 팔아넘기는 맨의 투서나, 치명적인 탱고 선율에 맞춰 "착한 척은 그만하고 가면을 찢어보"라 우먼에게 종용하는 비지터의 유혹이 아주 매력적이다. 이 탱고는 진실을 부정하고 저항하는 맨을 비지터가 제압하는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며 팽팽한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가끔 나 묻고 싶어 이렇게 살아야 해요"

"이렇게까지 나 살아야하나요"

 

 

내가 저 꼴을 당할 수는 없기에, 엔카베데 본부에 끌려온 이상 이미 저들은 죽은 목숨이기에,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선택 밖에 할 수 없었기에, 잔인한 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개인은 인간성을 버리고 거짓과 배신에 타협한다. 타인의 고통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비겁함은 무시무시한 화염 대신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지녔다. 수년 전 같은 이유로 반역자들을 처형한 심판자였던 변호사는 맨에게 고발당했고, '프로텍션'을 받았노라 호언장담하던 맨 역시 누군가에게 고발당한다. 폭력과 의심의 시대에서 온전히 안전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혁명은 피를 요구하고 독재는 피를 전제한다. 그 과정 속에 평온한 개인은 없다.

 

 

"저 위대한 권력은 항상 굶주렸지

혁명은 자기자신까지 먹어치워"

 

 

 

 

다른 사람도 다 이렇게 사는데 왜 하필 우리냐고 묻는 맨과 우먼에게 웃음기를 싹 걷어낸 매끈한 얼굴로 비지터가 되묻는다. "왜 내가 여기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자신들의 대화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 꽁꽁 감춰둔 공포와 불안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자. 빗겨선 채 부정해온 모든 진실을 까발리는 자. 멈춰세운 시간 속에서 악취를 풍기는 인간의 밑바닥을 조롱하는 자. 가장 안전하다 믿었던 집이라는 사적 공간을 침범하며 모든 문 너머에 존재하는 자. 내면의 "저주 속에 기도 속에 공포 안에" 스며들어 있는 자.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서 반복되는 인간의 어리석음. 잔혹하게 맨을 몰아세우던 율지터는 무심한듯 자연스럽게 2층 한가운데 위치한 창문 한쪽을 열어젖히며 그를 압도한다. 마치 맨이 선택할 결말을 암시하듯.

 

 

"역사는 반복되고 두드릴 문은 널렸지"

 

 

누구나 악마라는 넘버를 반복하며, 비지터는 음악도 있고 춤도 출 수 있지만 지독히 끔찍할 지옥으로 우먼을 이끈다. 그가 1937년의 마지막 할당량을 채우는 순간, 1938년을 알리는 첫번째 시계소리가 울려퍼진다. 소파 등받이에 양팔을 벌린 채 처참하게 널브러진 우먼을 향해, 2층 사슴뿔 박제 사이에 선 율지터가 붉은 장미를 내민다. 죽음만이 멈추게 할 영원한 사랑을 속삭이며 맨이 선사했던, 프로텍션이라는 보증을 듣기 전까지 불안을 떨치지 못하며 우먼이 창가에 내려놓았던, 뜨거운 피처럼 새빨간 장미를.

 

 

재연 버젼의 액터뮤지션 무대가 초연 버젼의 앤틀러스 무대와 얼마나 어떻게 다를지 몹시 궁금해진다. 같은 이야기를 전혀 다른 연출로 마주하는 경험은 새롭고 즐거울테니 꼭 챙겨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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