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 (2020.01.30 8시)

여명의 눈동자

in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2020.01.30 8시

 

 

 

 

최우리 여옥, 오창석 대치, 마이클리 하림, 한상혁 동진, 김진태 윤홍철, 임선애 동진 모, 김승후 대운, 이하 원캐.

 

 

대극장 무대 위 나비석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던 이 극이 재연으로 돌아왔다. 초연 당시 여러 악조건들로 인해 텅 비어버린 무대를 오로지 배우들이 꽉꽉 채워냈고, 그 열정을 향해 관객들은 뜨거운 응원과 함성을 쏟아냈다. 이 단단하고 애틋한 교감이 여명이라는 극을 다시 돌아오게 한 큰 힘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무대 연출이 있었다면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궁금해했던 초연의 장면들은 세종대극장 무대 위에서 아낌 없이 펼쳐졌다. 무대의 규모와 배우들의 숫자, 다양한 소품 및 조명 연출 등 달라진 모든 것들이 새롭고 아쉽고 재미있었다.

 

 

떼창과 군무가 기대만큼 웅장하지 못했으나, 근현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토해내는 절망과 기쁨과 좌절과 희망은 크고 강렬했다. 경사무대가 다소 위험해보였으나, 수많은 연습으로 맞춰낸 동선은 흐트럼없이 무대를 구성했다. 꽉 막힌 음향과 낮은 조도의 어두운 무대가 답답했으나, 명징한 음색 몇몇과 필요한 순간에 확 밝아지는 조명이 몰입도를 높였다. 한쪽 폭이 좁아지는 사다리꼴의 영상 화면은 과거 자료화면을 보고 있는 듯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왼편 돌출무대와 아래쪽 오케피트의 계단 활용은 다양한 동선을 활용하게 하여 지루함 없이 장면을 환기시켰다. 무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서 관극을 하니,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굵직한 사건들이 혼재된 극의 흐름을 따라가기 편했다. 초연을 본 관객은 변화에 집중할 수 있고, 초연을 보지 않은 관객은 이야기의 큰 줄기에 몰입할 수 있는 재연이다.

 

 

초연에서는 여옥과 대치, 하림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기어코 살아낸 개개인에게 공감과 연민과 미안함과 분노와 애틋함을 느꼈다. 반면 재연에서는 앙상블들을 비롯한 조연 배우들이 역사의 흐름에 맞서고 저항하고 휩쓸려가는 줄기들로 보였다. 그리하여 각자의 방식대로 그 역사를 살아내는 주연 세 사람에게 더 포커스가 맞춰졌다. 여옥을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극의 구성과 진행이 암담하지만 굳건한 인간의 힘을 기대하게 했다. 그러나 바뀐 가사나 추가된 넘버들이 있었음에도, 대치의 서사는 오히려 초연보다 더 납득이 되지 않았다. 넘버의 가사와 넘버 직후의 행동 사이에 설득력이 없으니 장면들이 뚝뚝 끊어져서 아쉬웠다. 그저 사랑하는 이와 함께이고 싶었던 여옥의 마음이 대치의 선택과 계속해서 어긋나기만 해서 마음이 아렸다.

 

 

 

 

※스포있음※

 

 

마하림의 디테일과 감정선 덕분에 하림의 삶이 이해됐고 하림의 마음이 공감됐다. 여옥의 재판이 진행되는 장면 어드메에서, 왼쪽 돌출무대에 선 마하림이 고통스럽게 제 가슴께를 손으로 붙들었다. 상황에 대한 절망이겠거니, 했던 이 동작은 그의 과거에서 비롯된 섬세한 디테일이었다. 일제의 생체실험에 침묵으로 동조했던 과거를 고통스럽게 넘버로 토해내던 마하림은,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을 향해 총탄이 발사되는 순간 마치 그 총알에 관통당한듯 몸을 크게 움직이며 가슴께를 꽉 붙든다. 허망한 죽음을 맞이한 죄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꾸역꾸역 살아있는 마하림의 가슴 속 영혼은 바로 그 때 산산조각났다.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상흔으로 텅빈 껍데기가 된 그를 살게한 건, 여옥. 잔인한 말을 뱉어내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뱃속의 아이가 유일한 희망이라 애걸하는 곧은 눈빛. 생에 대한 강한 의지로 어떠한 길이든 꿋꿋이 살아내려는 여옥으로 인해, 멈춰버렸던 하림의 시간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죽은 것과 다름 없었으나 여옥으로 인해 삶의 이유를 알게 된 하림은 연모 그 너머의 감정으로 그의 곁에 머문다. 그래서 하림은 "이만하면 오래 기다렸" 다고 제 입으로 말할 수 있을만큼 여옥의 기다림을 기다린다. 긴 기다림을 끝낼 눈앞의 행복을 붙잡는 대신 여옥의 손이 대치의 손을 붙잡게 돕는다. 그것이 여옥의 바람이기에. 여옥이 어떻게든 살아남은 이유이기에. 여옥이 행복할 수 있노라 믿는 길이기에. 그렇기에 마하림은 뒤로 물러나 여옥이 "행복하길" 기원한다. 여옥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니까. 온전하게 서사를 담아낸 마하림의 행복하길 넘버는, 그저 완벽했다.

 

 

마하림은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주연이자 서술자로써 극의 안팎을 넘나든다. 마치 노담의 그랭구와르처럼. 여옥이 향한 제주를 주시하며 그 외롭고 다정한 섬을 보호하고 변호하고 함께 고통스러워 한다. 제주 4.3사건의 희생자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노라 울부짖듯 외친다. 이전 장면들에서 마하림은 서술자처럼 넘버를 부르고 퇴장할 때 무대 중앙의 사건들을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번, 제주 사람들의 무고함을 입에 올리고 퇴장할 때, 한데 모여 행복하게 웃고 있는 제주의 사람들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의 행복을 반드시 기억하겠다는 듯이.

 

 

마지막 장면. 탕, 하는 두 번째 총성에 이미 무너져있던 마하림은 그대로 얼어붙는다. 오직 바람소리. 생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적막. 마하림은 문득 양팔을 들어 제 몸을 끌어안는다. 슬픔과 비통에 잠겨 미처 느끼지 못했던 추위가 온몸을 휘감는다. 예상하는 결말, 믿고 싶지 않은 결과. 추위보다 더 맹렬한 오한이 치밀어들고 마하림은 그 고독을 밀어내듯 제 팔을 쓸어내린다.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향해 마하림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터져나오는 흐느낌.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절망.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 이곳, 같은 하늘 아래의 세 사람. 남겨진 하림. 편을 나누고 상대를 짓밟고 타인을 삭제하는 시대의 폭력에, 그저 행복하길 바랐을 뿐인 이들이 상처 입고 시들어갔다.

 

 

이 아픔은 마주하고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야 한다. 역사는 기록되고, 기록된 역사가 기억되며, 기억된 과거가 반성을 부르며, 반성만이 더 나은 미래를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함께 여명을 꿈꾸고 바라보며 새날을 희망한다. 노예가 아닌 삶,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삶, 다같이 행복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