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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님이 보고계셔

in 유니플렉스 1관, 2020.02.14 8시

 

 

 

 

한보라 여신님, 조성윤 한영범, 박준휘 류순호, 강기둥 신석구, 홍우진 이창섭, 조풍래 조동현, 진태화 변주화.

 

 

여보셔. 이 유명한 극을 지금껏 보지 못했기에 이번 육연은 꼭 챙겨보리라 다짐했다. 자첫자막 관극을 고를 때 늘 그러했듯 꼼꼼하게 캐슷을 따져 표를 잡았는데, 마음 아픈 일로 당일 캐슷 변경이 됐다. 성두섭 배우 자첫은 미뤄지게 되었으나 마음을 잘 추스리고 다른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길 바란다. 무대 위 배우들 모두 남다른 다짐을 하고 나왔는지 초반부터 연기가 단단하더라. 유려하게 흐르는 전개 사이사이의 애드립과 재치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내내 웃었고, 각자의 이야기와 예견된 결말이 애틋하고 가슴 아파서 펑펑 울었다. 커튼콜 촬영이 가능한 중소극장 극은 기립을 잘 안하는 분위기임을 알지만 이날 공연이 너무 좋아서 튕겨나듯 벌떡 일어났는데, 객석 모두 같은 마음이었는지 이곳저곳에서 기립이 있었다. 대레전 회차를 마주해버리니 얼마 남지 않은 이번 시즌은 더 잡지도 못하겠다.

 

 스포있음※

 

 

때는 한국전쟁. 살아남기 위해 납작하게 튀지 않게 숨죽이며 살던 영범은 어쩌다보니 대단한 포로의 수송을 맡게 되며 커다란 파도에 휩쓸린다. 어딘가 가볍고 어설퍼 보이지만 그 너머에는 살아남겠다는 굳건한 의지가 묵직하게 중심을 잡고 있다. 순호의 상태를 파악하고 설득할 묘안을 찾아내 여신님이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영범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 이야기에 맞춰 포로가 된 자신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영범은 지략가이기도 하다. 창섭 몰래 무전기로 남측에 연락을 취하는 등의 행동이 영범을 기회주의자로 보이게 할 수도 있는데, 엉영범의 죄책감과 짙은 후회가 모든 정당성을 부여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개개인은 살기 위해, 스스로를 위해, 때때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지만, 같은 인간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여 연대하고 만다. 남쪽에 내려주겠다는 창섭의 말에 이미 터뜨려버린 신호탄을 턱 막힌 심정으로 후회하던 영범은, "미안해요, 내가 불렀어요" 하며 고개를 떨군다. 배신감에 그의 멱살을 잡는 창섭 역시 그 입장을 알기에 끝내 용서한다.

 

 

모두들 각자 돌아갈 곳이 있지에 절실하지만, 넘을 수 없는 선으로 분리되어 있기에 작별이 아프다. 왼편과 오른편에 셋씩 서있는 마지막 장면,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선명하게 존재하는 휴전선이 무대 정가운데를 가로지르며 군인들을 나눴다. "다시 안 만나는 게 좋갔다" 라는 창섭의 말에 "오래오래 살자" 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엉영범. 그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 맞잡는 홍창섭. 괜찮겠냐며 서로를 먼저 걱정하는 그들은 이미 피아 구분 없는 동료다. 쫓아낸 정찰선 대신 돌아온 전투기의 무겁고 날카로운 굉음과 거대한 그림자가 무인도를 집어 삼키는 순간, 현실이 짓누른다. 살고자 했지만 죽음이 예정된 결말. 그러나 그림자가 스쳐지나가며 엉영범의 눈물로 얼룩진 얼굴과 미소가 보이는 순간, 희망이 현실을 압도한다. 살아남았으리라고. 창섭과 순호와 주화는 무사히 섬 뒤로 돌아 북측으로 돌아갔을 것이고, 영범과 석구와 동현은 무사히 백기를 흔들어 남측으로 돌아갔을 것이라고. 창섭의 변명과 영범의 뻥이 모두를 살아남게 했으리라고.

 

 

 

 

군인들의 바람, 꿈을, 믿음을 투영한 존재인 여신님은 모두들 각자의 삶과 이야기를 지닌 다같은 인간임을 환기시킨다. 전쟁의 참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매일밤 "악몽에게 빌어" 가며 고통 받던 순호는, 자신이 해맑게 믿는 여신님이 모두의 평화를 가능케함을 깨닫는다. 여신님은 석구의 사랑이자, 주화의 동생이자, 창섭의 오마이이자, 동현의 절실한 믿음이다. 숨고 회피하던 순호에게 여신님은 그들이 "나의 사람들" 임을 일깨우는 또다른 자아가 된다. 여신님의 자리에 몰래 숨겨둔 화포를 꺼내며 "싸우려는 게 아냐. 돌려보내려는 거지." 라던 순호의 단호한 말은 중의적이다. 모두를 돌아갈 곳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의지. 굴 하나를 숨겼다고 손가락을 잘라버리려고 했던 이들은 서로의 어죽을 퍼주며 마음을 표현하는 사이가 됐고, 애틋한 마음은 대단한 말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걱정하며 작별을 고하게 한다.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는 누군가에게 이렇게 외치며. "여신님, 나 보여요?"

 

 

처음 남측의 정찰선이 왔다가 떠나간 뒤, 자신들에게 총을 겨눈 창섭을 질책하듯 바라보던 엉영범의 침묵이 짙은 잔상을 남긴다. 이 순간에도 그들 사이에 휴전선이 있었다. 말이 통하고 역사를 공유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눴던 과거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보이지 않음에도 명백하게 존재하는 이 휴전선을 도려내고 끊어낼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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