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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퀴리
in 충무아트센터 블랙, 2020.02.21 8시
리사 마리 스클로도프스카 퀴리, 이봄소리 안느 코발스키, 김찬호 루벤 뒤퐁, 김지휘 피에르 퀴리, 김아영 조쉬 바르다/이렌 퀴리, 이하 원캐. 장민수 폴 베타니/병원장, 주다온 아멜리에 마예프스키/루이스 보론스카, 조훈 마르친 리핀스키/닥터 샤갈 마르탱.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한 마리 퀴리의 여정을 담담하고 부드럽게 풀어내는 이 극은, 안느라는 인물을 통해 마리의 의지와 절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라듐이라는 새로운 원소를 찾기 위한 과정과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에 집중한 이야기의 구성은, 다양한 인물을 맡은 앙상블 배우들의 역할을 통해 한층 다채롭게 표현된다. 마리를 "폴란드의 별"이라 호명하는 폴란드 출신 노동자들은 전부 각자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이름은 동료 안느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반복되어 언급된다. 마리뿐만이 아닌, 인생을 살아낸 모든 이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듯이.
무대가 다소 어두운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인 무대 연출이 흥미로웠다. 조명의 색감을 통해 인물의 상황과 감정을 표현한다거나, 주기율표가 그려진 바닥 조명을 활용하여 극의 시작과 마지막을 관통하는 결말을 완성시킨다. 세 개의 무대로 분리되어 있는 중앙의 회전무대가 돌아가면서 공간이 변화하는데, 무대를 분리시키는 벽을 초월적으로 이용하는 연출이 재미있었다. 라듐의 부작용을 연구하는 장면에서 하얀 후드를 뒤집어 입고 실험실 쥐로 분했던 배우들이, 하나씩 옷을 벗고 라듐에 중독된 노동자들로 변하는 장면의 상징성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산업화라는 미명 아래 스러져간 수많은 생명들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1막 초반에 마리를 만난 피에르 퀴리가 묻는다. "당신은 왜 과학을 하느냐"고. 가운데에 선 마리가 자신의 생각과 신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동안, 그에 대한 감탄을 토하는 피에르와 그에 대해 배척과 비난을 쏟아내는 소르본 대학 사람들의 목소리가 포개진다. 마리의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관객으로서 다소 의아한 연출이었는데, 후반부에 그 첫 만남을 회상하는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마리의 의지를 한층 강조하는 효과를 부여했다. 마리가 과학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궁금하니까" 답이 없으면 답을 만들어내는 과학자이기에, 마리는 만들어낸 답이 이끌어내는 새로운 질문까지도 끝없이 갈망하고 탐구한다.
라듐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 자리에서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만면에 품고 있던 마리는, "피에리 퀴리! 그리고.. 마담 퀴리." 라는 목소리에 절망한다. 여성이자 이방인인 그의 이름은, 단 한 음절도 제대로 불리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는 꿋꿋하게 표정을 추스르고 단상 위에 선다. 독점 대신 지식을 나누고 공유하기를 택한 그는, 인간의 선의를 믿었다. 라듐의 긍정적인 면에 집중했던 마리는 라듐이 지닌 부작용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스스로에게 실험을 자행한다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다음 기회가 있을 거라며 말리는 남편에게 마리는 비명처럼 외친다. "다음에 다시!" 평생 자신을 구속하고 제한하던, 위로를 가장하고 한계선을 긋는 이 문장에, 마리는 진절머리 낸다. 다음에 할 수 있는 걸 왜 지금은 못하냐고 되묻는 마리는, 지금 당장의 시도와 도전과 변화를 갈망한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지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다.
안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회한에 잠겨 고요히 마지막을 마주하려던 마리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잔혹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며 최선을 다해 싸워왔던 자신의 업적을 대단치 않게 여긴 마리를 위로하는 안느의 말. "애썼어, 마리."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유의미한 것이라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다시 실험실 문을 연 바로 그 순간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고. 안느가 마리에게 직접 "충분한 삶이었어," 라고 말해주는 연출은 조금 과하다고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리는 물론이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안느의 위로가 벅차고 따뜻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한 여성들 덕분에, 지금의 여성들 역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이름을 끌어안고 삶을 살아내고 있다. "그댄 내게 별"이라 말하며 응원과 지지를 건네는 연대와 희망은 미래 세대에도 포기 없이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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