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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in 아트원씨어터 2관, 2020.02.02 2시
배해선 알란, 오소연 알란1, 이형훈 알란2, 김보정 알란3, 전민준 알란4.
원작소설을 워낙 흥미진진하게 읽어서 이 방대한 내용을 어떻게 무대 위에 풀어낼지 몹시 궁금했다. 화려한 영상이나 커다란 무대소품 없이, 극작과 연출은 영리하게 배우들을 활용했다. "아직 연극이 시작된 건 아니"라거나 "원래 이런 극"이라는 설명, "성별은 신경쓰지 말"라는 조언 등이 도입부에 쏟아졌고, "인터미션이라는 뜻"이라며 1막의 끝을 알리기도 했다. 이러한 대사들을 통해 배우들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거침 없이 넘나들며 관객의 이해를 돕고 몰입을 높였다. 몸에 이름표를 붙여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분담하여 연기한 배우들은, 인물들의 각기 다른 성격을 어조나 목소리 등으로 분리시켰다. 극중 배경이 되는 다양한 국가들은 무대 위 서랍장들 곳곳에 숨어 있는 국기와 대표적인 소품들로 상징된다. 또한 배우들이 노래와 춤을 통해 생동감 넘치게 공간 전환을 드러낸다.
젠더프리 캐스팅 역시 극적 재미를 높였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성별의 구분 없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알란 또한 성별을 고정하지 않는다. 굳이 '남성'이 아니더라도, 여러 굴곡이 있는 인생을 살아낸 '노인'의 이야기는 충분히 부드럽게 또 당연하게 진행될 수 있다. 작년부터 대학로에 번지고 있는 '젠더프리' 시도의 유의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이 극이 아닐까. 성별에 집착하고 구분짓고 배척하는 대신, 다른 점을 인정하고 당연시하며 다양함을 존중하는 것. 이것이 삶이고, 이것이 평등이며, 결국 이것이 페미니즘이다.
※약스포주의※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난감한 상황 앞에서 알란은 오른쪽 목을 긁적거린다. 자신의 불운을 탓하는 친구를 위로한다.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고. 국경을 넘나들며 여러 지도자들을 만나지만, 사상보다는 술이 맛있는가가 중요한 알란은 고집대로 행동한다. 흐르는 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알란은 말한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노라고. 100세의 생일을 맞이하기까지 수많은 이별을 마주할 때마다, 알란은 담담하게 말한다. 안녕, 이라고. 무던하고 덤덤하게 흘러가는 대로 살았지만,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공유한 몰로토프의 죽음 앞에서만큼은 격렬하게 무너진다. "안녕, 몰로토프" 라고 말하지 못한다. "전쟁"을 선포하며 온몸으로 절규한다.
오직 사랑만이 존재했던 몰로토프와의 관계를 잃고 텅 비어버린 알란에게, 오랫동안 길을 잃었던 전보 하나가 날아온다. "그게 정말 가능할까?" 라고 평생 물어왔던 친구가 보낸 마지막 말. "그게 정말 가능했어!" 절망과 분노와 고통과 아픔과 허망함에 짓눌려 끝내 공허해진 알란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차오른다. 더이상 답답한 양로원의 좁은 방에 스스로를 가둬둘 이유가 없어진 알란은 창틀에 몸을 얹는다. 극의 첫 장면에서 극작가를 부르며 "누가 도입부를 이렇게 쓰"냐고 투덜거렸던 것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알란은 "이런 수미쌍관 같은 진부한" 결말에 대해 궁시렁거린다. 그러나 이 진부한 극적 구성은 알란의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하는 또다른 출발점이 된다. 창문을 넘는 알란의 뒷모습. 저 뒷모습은 다채로운 그의 삶 중 과연 어느쯤일까.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우리는 그저 얇고 낮은 창틀 하나만 넘으면 된다. 그 너머에 수많은 모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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