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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

in 나온씨어터, 2019.12.24 8시

 

 

 

 

김정 피오나/에이드리언, 성수연 앨리스, 이지혜 렐라니, 마광현 조쉬.

 

 

로테르담, 네덜란드. 물류의 허브인 항구도시, 개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중시되는 나라. 다름에 대한 편견을 지양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자, 그렇기에 가깝지 않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얕은 곳. 극 중 조쉬의 대사처럼 수많은 컨테이너들이 다른 어딘가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리는 중간지 로테르담은, 타지인이 머무르고 정착하기에 좋은 도시는 아니다. 여타 도시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만, 자극들의 유혹 속에서도 안정과 현상유지를 택하는 소심하고 보수적인 사람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로테르담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은 했으나 그 다음 단계로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망설이던 앨리스의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적 배경이 된다. 마리화나, 독한 술과 고기가 들어간 음식, 신년맞이 폭죽놀이, 꽝꽝 언 운하 위를 걷기, 머리부터 발끝까지 형광 주황색을 휘감고 길거리로 나갈 수 있는 퀸즈데이 등등. 7년 동안 막연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거부감으로 어정쩡하게 뭉개고 있었던 이 도시는, 변화의 계기이자 극복의 대상이 된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유쾌한 대사들이 쉽지 않은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풀어낸 이 극이 좀 더 길게 이어졌다면 분명 자둘을 했을 것이다. 관극 내내 많이 웃고 행복했지만, 당연하게도 완벽한 극은 아니었기에 다시 곱씹어보고 싶은 부분이 많다. 결말과 그 이후에 이어질 삶에 대한 상상들도 잘 정리가 되지 않고, 앨리스 본인의 상황에 대한 맺음도 다소 부족했다. 무엇보다 변화와 갈등의 시발점이 된 피오나의 상황과 대사들이 지나치게 극적이어서 아쉬웠다. 육체와 정신의 젠더 불일치로 인해 평생을 고민하며 살아왔을 에이드리언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던 앨리스를 이끌어내면서, 무려 7년 동안 단 한 번도 "나는 남자야" 라는 힌트조차 흘리지 않았다는 게 크게 납득되지 않는다. 게다가 "넌 레즈비언이었던 적이 없어" 라니. 당황하고 패닉할만한 상황이었다 해도, 호르몬의 영향이 있다고 해도, 세상 그 누구보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게 했을 에이드리언이, 타인의 정체성을 그렇게 단정적으로 부인하는 선고를 내릴 수 있을까?

 

 

몇몇 대사들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대부분 조쉬의 대사들이긴 했는데, 조명사고가 났던 장면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계속 곱씹다보니 정황에 맞춰 이해를 할 수 있었지만, 관극 당시에는 "에이드리언이 자신과 같은 길을 갈 게 뻔히 보여 힘들었다" 던 조쉬의 말이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혼란을 남겼다. 남자로 보여지고 싶다며 예시를 드는 에이드리언의 말들은 불편했다. 바로 직전에 페미니즘을 운운했으면서, 남성으로 패싱당하는 것을 "무거운 걸 들 때는 날 봤으면 좋겠" 다고 표현하다니. 스스로의 정체성을 굳게 지켜내기 위해 모두가 평등하지는 못한 이 사회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에이드리언 역시 한계가 있음을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줬다. 보여지는 사회적 시선과 가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모습이, 현실적이지만 꽤나 희망적인 이 극에 크게 어울리지 않았다.

 

 

객석 계단의 활용이나 음향과 조명으로 폭죽을 묘사하는 연출 등이 재미있었다. 극 중간의 조명사고는 다소 아쉬웠지만, 이해한다. 렐라니와 함께 듣는 폭죽소리와 에이드리안의 옆에 서서 듣는 폭죽소리에 각기 다른 표정을 지음으로써 앨리스의 심리를 표현한 연출이 강렬했다. 옷을 개는 방법이 똑닮은 형제의 모습이나 사랑하는 이의 옷 냄새를 맡고 애써 팔을 끼워 입으려는 동작들도 인물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극 전체적으로 로테르담이라는 도시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담아냈다는 점이 보여서 무척 마음에 들었다. 끼룩대는 갈매기 소리, 모던하지만 추상적이지만은 않은 벽에 걸린 그림들, 신년을 맞이하는 폭죽 소리와 국경일과 다름 없는 퀸즈데이, 그리고 영어를 너무 잘하는 네덜란드 사람들 덕분에 7년 동안 제대로 된 네덜란드어를 배우지 못한 앨리스의 모습까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럼 나는 무엇일까, 하고 묻던 앨리스의 과하게 밝은 목소리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던 표정이 자꾸 밟힌다.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번뇌하고 의심하고 고통스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다시 마주하게 된 그 얼굴이 가끔 떠오를 것 같다. 그가 나름의 답을 얻은 곳이자, 예기치 못한 새로운 질문 앞에 던져지게 된 장소이자, 치열하게 부딪히며 다시 나름의 답을 찾아가리라 다짐하며 떠나게 된 도시 로테르담 또한 조금 더 자주 그리워질 듯하다. 앨리스만큼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앨리스처럼 살아본 경험을 지닌 바로 그 도시를 이렇게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아낸 무대 위에서 재회할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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