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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in 충무아트센터, 2019.12.27 8시
류정한 막심, 옥주현 댄버스, 이지혜 이히, 최혁주 반호퍼, 최민철 파벨, 이소유 베아트리체, 홍경수 프랭크. 류옥졔. 류옥페어 자첫. 오연 류막심 자넷. 2019년 마지막 관극. 이번 시즌 들어 최고로 훌륭한 공연이었다. 노선 자체는 25일과 유사했는데, 류막심의 음색과 발성이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여 관극 내내 행복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간 특별한 날에 이렇게 레전공을 선사해주셔서 그저 감사하고 기뻤다.
스포있음
첫 등장 후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서는 객석을 향해 고개를 들고 씩 웃는 류막심 디테일이 삼연부터 계속 있었는데, 25일과 이날 모두 안했다. 대신 입술을 오므리거나 뾰족하게 내밀며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이는 귀여운 표정들이 다양하게 생겼다. 반호퍼의 손길에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는 건 이날 처음 봤다. 놀라운 평범함. 막심이라고 불러요, 하면서 이히에게 자켓을 입혀줄 때 왼쪽 아래부분이 걸려서 매무새 정리를 하는데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됐다. 몬테카를로의 절벽 계단이 높낮이가 들쭉날쭉하고 가파르기 때문에 놀평 중간중간 난간을 잡고 내려오는데, 이날 중간에 헛손질을 한 번 하셔서 귀여웠다. 청혼하는 거야, 라는 말에 네?!!? 하고 졔이히가 놀라자 돌아선 채 제 가슴을 주먹으로 콩콩콩 두드리며 "어우 답답해, 어우 속터져, 말귀를 못 알아먹어," 이렇게 꿍얼거리는 것도 귀엽다. 결혼할 거라는 말에 혁주반호퍼가 클러치를 떨어뜨리며 입을 떡 벌리자, 가방을 주워 다시 손에 끼워넣고는 그의 입을 턱 닫아주는 류막심이 슬쩍 현웃까지 터져서 재미있었다. 크고 힘찬 목소리로 "오마이갓, 갓!" 하고 퇴장했다.
"존경하는 마님을" 방으로 안내하라는 류막심 디테일은 들을 때마다 감탄이 나온다. 댄버스의 말에 내포된 비아냥을 읽고 굳이 그 단어를 강조하며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으로 암묵적인 경고를 보내는, 이토록 우아하고 우회적인 귀족의 화술이라니. 자신들의 시간을 방해하는 댄버스를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 역시 고압적이다. 비싼 물건이고 뭐고 전혀 관심이 없는 류막심은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싶지만, 예상치 못한 이히의 고백에 나지막하게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묻는다. 대사 속도 때문인지 신댄에 비해 옥댄에게 더 빨리 짝짝짝, 박수를 치고는 "잘 됐네, 이제 알게 됐으니까" 하고 비꼰다. "큐피드상은," 하며 집착하는 옥댄의 말들에 짜증스러워하던 류막심은, "생전에 드 윈터 부인은," 라는 말에 "댄버스 부인!" 하고 버럭 화를 낸다. 비아냥의 어조가 명확한 신댄에게는 뜨겁게 분노를 토해냈는데, 차분하고 사무적인 톤의 옥댄에게는 분노를 차갑게 속으로 눌러내며 짓씹듯 말했다. 이날은 "제발 그만하고 나가보세요," 라고 했다.
이날 류막심에게서 유난히 떨쳐내지 못한 과거의 죄책감이 많이 보였다. 25일에는 이히를 붙잡고 흔들었던 왼손을 내려보는 류막심의 디테일에서 이히를 향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보였는데, 이날은 바로 그 손으로 밀쳤던 레베카의 기억이 한 걸음 앞서 다가오는 듯한 지치고 괴로운 표정이었다. 맨덜리에서 숨을 쉬고 걸음을 옮기는 순간마다 레베카의 기억이 계속 되살아난다는 듯 발작적으로 화를 내고 고통스럽게 절망하는 모습이, 칼날송으로 고해하는 진실에 대한 개연성을 높였다. 류막심의 모든 넘버들이 레베카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그의 상황을 여실히 드러냈다. 신경질적이지만 풍성한 음색이 황홀하고,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지?" 하며 착 내리깐 저음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칼날송에 담아내는 완벽한 서사는 아무리 찬사를 해도 모자랄 정도다. 확확 변하는 감정과 류베카의 목소리가 당시의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해낸다. 세부적인 디테일은 25일과 동일했는데, 죽은 레베카의 얼굴을 확인한 뒤 절망적인 목소리로 "웃는 얼굴로," 하는 디테일은 또 봐도 전율이 일더라.
공판에서 검사가 말을 걸어도 오만하게 눈을 내리깐 채 시선을 제대로 맞춰주지 않던 류막심은, 이날 평소보다 고개를 살짝 더 들어올리며 그와 눈을 맞추는 등 불안한 내색을 평소보다 많이 내비쳤다. 쓰러진 이히를 향해 달려가고 부축하면서 "여보, 여보!" 하고 부르는 육성은 이날 처음 들었다. 파벨에게 "꺼져, 용건이 뭐야," 하며 반말을 하다가 증거 이야기에 바로 존대를 하며 비꼰다거나, "알겠습니다," 하면서 고개를 숙여 굳이 예의를 갖추는 디테일이 계속 유지되어 좋다. 베이커 의사가 '산부인과' 라는 프랭크의 말에 얼굴이 급격하게 흔들리며 불안함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쉽게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것도 이날 노선과 잘 어울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파멸시키려 했던 레베카 때문에 괴로워하던 류막심이 이히로 인해 위로를 받는 밤의 저편 넘버도 아름다웠다. 불맨은 매번 짜릿한데 이날 마지막 "타올라" 부분이 너무너무 좋아서 울뻔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최고였다.
옥댄은 허스키하고 강력한 음색으로 맨덜리를 지휘한다. 신댄과 노선 자체도 다르고, 대사들의 어미나 단어들에도 차이가 있어서 흥미로웠다. 카랑카랑하고 날카로운 신댄은 감정이 적나라하게 담긴 얼굴을 이히에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하고, 옥댄은 친절을 가장한 표정들을 일부러 내보이면서 위선을 떤다. 신댄은 감히 새 사람을 들이는 막심에게 화가 나있고 감히 맨덜리에 들어온 이히에게 분노하고 있지만, 그 감정을 애써 짓누른다. 반면 옥댄은 레베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이히를 덜 경계하고 더 얕잡아본다. 하녀가 없다는 이히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톤을 높이는 신댄과, 무덤덤하게 그렇군요, 하고 말하는 옥댄의 차이가 새로웠고, 영생에서 난초를 대하는 태도 역시 레베카를 향한 감정의 색감 차이를 여실히 느끼게 했다. 신댄은 난초가 레베카의 분신이기에 더없이 소중하게 여긴다면, 옥댄은 난초가 레베카 그 자체라고 여기며 지독히 집착하고 사랑하는 느낌이었다.
이히에게 가장무도회 의상을 추천할 때 신댄은 최대한 격식을 차리며 유혹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옥댄은 부드럽고 설득력 있게 이히의 반응을 끌어낸다. "이 일은 우리끼리의 비밀로," 하자며 이히가 팔뚝을 잡을 때 신댄은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도 잡힌 팔을 내려다보기만 하는데, 옥댄은 이히의 손이 닿자마자 진절머리내듯 신경질적으로 탁 뿌리친다. 이히가 팔을 손에서 떼자 바로 레베카의 방을 소개하는 신댄과 다르게, 옥댄은 "비밀이 새어나갈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다. 이히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레베카에 대한 찬양을 쏟아내는데, 신댄은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이라면 옥댄은 바로 그 자리에 레베카가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덕분에 옥댄이 묘사하는 레베카를 상상하던 졔이히가 문득 화장대 위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고 화들짝 놀라는 디테일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레베카3에서 "감히 너 따위가 드 윈터 부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으니까!" 라고 폭발하는 것도, 신댄은 벼르고 벼른 순간이었다면 옥댄은 더 이상 참지 못해서 폭발한 순간이었다. 저 바다로 뛰라고 종용하는 것도 신댄은 계산적이었지만 옥댄은 불현듯 떠오른 아이디어 같아 보였다. 그래서 비상경보가 울린 순간 신댄은 바로 가면을 다시 쓰며 차분하게 대답한 뒤 이히가 도망치자 아깝다는 듯 난간을 퍽 내리치며 무섭게 눈을 빛냈지만, 옥댄은 이히와 함께 화들짝 놀라고서는 마치 그 소리가 레베카의 기억을 되살린 듯 비통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레베카에게 있어 남자들은 다 "게임" 이었노라 절규하는 신댄과 "놀이" 였다며 비웃음을 토해내는 옥댄의 노선이 완전히 다르다. 레베카4에서 레베카를 향한 배신감과 그로 인해 폭발하는 감정에도 차이가 있다. 신댄은 평생을 헌신한 대가가 배신이었다는 충격으로 광기에 휩싸여 미쳐버렸고, 옥댄은 끌어안고 있던 마지막 희망이 툭 끊어지자 폭발하고 이성을 놓아버렸다.
여성 배우들이 다양한 캐릭터에 다채로운 노선을 입혀 보여줄 수 있는 대극장 공연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중요한가를, 레베카3를 보며 느꼈다. 신댄과 옥댄이 완연히 다른 만큼, 젼이히와 졔이히 역시 다르다. 젼이히는 주체성은 강하지만 자존감이 낮았다면, 졔이히는 원작이나 이전 시즌에서 강조했던 정석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소심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댄버스가 원하는 대로 '레베카' 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더 많이 휘둘린다. 레베카1에서 레베카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는 댄버스를 보면서 젼이히는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경계심을 높이는 반면, 졔이히는 그 말들에 스며들듯 물들어간다. 레베카의 독한 향수에 젼이히는 질색하면서 팽개치듯 향수병을 내려놓지만, 졔이히는 이것이 레베카의, 막심이 사랑하는 강렬한 향이구나, 라는 생각에 잠긴 채 향수병을 내려다보다가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병을 내려놓고 뚜껑까지 잘 닫아놓는다. 레베카의 물건에 대해 젼이히는 불편해하지만, 졔이히는 무서워한다. 굳건한 젼이히에게 레베카는 맨덜리를 지배하고 있는 망령이자 잔재이고, 불안한 졔이히에게 레베카는 음습한 맨덜리 그 자체다.
레베카3에서 젼이히는 절망적이고 고독한 상황에 휩쓸렸다면, 졔이히는 쌓아올린 레베카를 향한 열등감이 절정으로 치닫으며 바다로 뛰어들 뻔한 느낌이었다. 류막심이 털어놓은 진실을 들은 젼이히는 더이상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자신감과 의지를 얻지만, 졔이히는 깨달음과 용기를 얻는다. "당신, 예전에 내가 알던 당신 모습이 아니야," 라는 류막심의 말에 젼이히는 부드럽고 단호하게 동의하고, 졔이히는 진실을 곱씹으며 기나긴 악몽에서 깨어나듯이 현실로 돌아온다. 미세스 드 윈터는 나야 넘버에서도 귀족 출신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색깔로 맨덜리를 채워나가는 젼이히와, 기품 있는 안주인의 모습이 완연한 졔이히의 태도가 사뭇 달라서 재미있다. 파벨의 도발에 발끈하는 류막심을 진정시키는 것도, 젼이히는 어깨부터 가슴팍까지 차근차근 토닥이며 어르듯이 다독인다면 졔이히는 어깨 부근을 끌어안으며 온몸으로 진정시킨다. 맨덜리가 불타버린 덕분에 지중해가 보이는 호텔을 전전하게 된 결말이, 젼이히는 훨씬 자유롭고 편안했을 것 같고 졔이히는 더 수월하고 안심됐을 것 같다.
2019년의 마지막을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할 수 있어 기쁘다. 연초는 늘 그러했듯 몹시 바쁠 예정이라서 류막심 자다섯 관극은 다소 미뤄질 듯하지만, 그 때까지 음습한 맨덜리를 가득 채워주고 계시리라 믿는다. 지천명에도, 그 이후도, 꾸준히 무대에 서주시리라 굳게 믿으며, 류배우님 덕분에 올 한 해가 호화롭게 알차고 황홀하게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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