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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19.11.17 7시
류정한 막심, 신영숙 댄버스, 박지연 나, 최민철 파벨, 최혁주 반호퍼, 이소유 베아트리체, 홍경수 프랭크, 이하 원캐. 류막심 오연 첫공. 지연이히 첫공. 류신페어 오연 첫공.
흠 잡을 곳 없는 기승전결을 기반으로 장면마다 좌중을 압도하는 박진감을 선보이는 이 작품은, 취향을 불문하고 공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강한 음악과 위압적인 회전무대와 스산한 조명과 서늘한 냉방은, 마치 이 공간이 바로 맨덜리 저택이라는 듯 생생하고 강렬한 경험을 선사한다. 탄탄한 원작의 맛깔나는 각색, 적재적소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매력적인 음악, 극적 반전을 조성하는 장면들의 구성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연출이 조화를 이루며 극을 온전하게 완성시킨다. 더불어 이 극은 여성이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여성극이다. 화자 이히의 성장물이자, 강력하고 매력적인 악역 댄버스가 시선을 장악하는 극이자, 이름 하나로 시공간을 지배하는 레베카의 이야기다. 강인하고 따뜻한 베아트리체와 제 욕망을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표현할 줄 아는 반 호퍼의 존재감도 결코 작지 않다. 다채로운 색을 지닌 여성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여성극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한계는 있다. 여성 개개인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한다고는 하지만, 그 범위는 남성을 도와주고 보살피는 조력자이자 안주인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별빛 같은 한 사람' 이나 '여자들만의 힘' 등, 중독성 있는 넘버들의 가사 하나하나가 현명함을 가장한 수동적인 여성상을 최고의 미덕인양 내세운다. 가문의 이름과 명예, 돈과 재산은 전부 남성에게 귀속되고, 여성은 그 소유물 중의 하나로 취급되며 부수적인 존재로 남는다. 남성의 시각에서 만든 여성극의 한계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나기에, 극강의 짜릿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하다. 창작진이 이 극을 진정으로 "자신의 힘을 찾아가고 자존감을 찾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출처)" 라고 생각했다면, "동시대 언어로 풀어나가(출처, 상동)" 려는 성의를 연출 상의 변화로 증명했어야 한다. 그러나 삼연('16년)과 사연('17년), 오연('19년)에 이르기까지 예당과 블퀘, 충무라는 극장의 차이만 있었을 뿐, 연출의 수정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극이 완전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출의 안이함을 반증한다.
사소하지만 찝찝했던 요소들에 대한 감상을 몇 가지만 더 남겨본다. 맨덜리 저택에 돌아온 막심은 여성 주방장의 이름을 호명하며 오랜만이라 반가워한다. 삼연에서는 "왜 이렇게 홀쭉해졌어요," 라는 말을 웃음포인트로 넣었으나 이번 시즌에는 다행히도 없어졌다. 막심이 육체적인 접촉을 통해 반 호퍼 부인을 직접적으로 밀어내는 동작도 사라졌다. 눈빛과 어조, 간접적인 동작 만으로도 혐오와 멸시의 감정은 충분히 표현된다. 그러나 반 호퍼 부인을 향해 "이런 건 남자가 할 일이죠," 라는 대사는 여전했다. 여성과 남성의 할 일을 구분 짓는 편견보다, 거세고 괄괄하며 천박할 정도로 솔직한 반 호퍼는 '숙녀' 가 아니기 때문에 '신사' 로서의 예의를 차릴 필요조차 없다는 사상이 더욱 불쾌했다. 그리고 문제의 칼날송. 류막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이 걸레 같은 년아!" 라는 부르짖음은, 아쉽게도 여전했다. 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온 고고하고 품격 있는 위선자가 제 바닥을 드러내며 처참하게 무너지는 이 장면에서, 극강의 표현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묻는다. 이 단어가 정말로 필요한가. 여자를 바꿔대며 음란하게 행동하는 남성에게는 지금껏 어떠한 호칭이 붙었던가. 평생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을 욕설을 토해내는 기품 있는 자의 추락은 극렬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함을 잘 알지만, 그럼에도 묻는다. 굳이 이 말을 고집했어야 하는가.
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류막심과의 재회는 너무나도 반갑고 기쁘고 행복했다. 류배우님 특유의 고급스러운 품위와 날카롭게 일그러진 감정과 신경질적인 예민함은 이 극에서 한층 빛을 발한다. 삼연의 여러 디테일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정석적인 노선으로, 류막심은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한 오연 첫공을 선보였다. 지연이히 역시 첫공을 멋지게 완성했는데, 강건한 심지를 지녔으나 자존감이 부족한 초반의 모습부터 "미세스 드 윈턴 나야!" 하고 외치는 후반의 굳건함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류막심의 분노를 능숙하게 다루며 완벽한 합을 선사하여 앞으로의 회차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신댄은, 말이 더 필요한가. 초연부터 오연까지 매 시즌마다 참여한 신영숙 배우님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이번 앙상블 떼창도 너무 좋더라. 삼사오연 통틀어 자다섯 관극이었는데, 처음으로 떼창의 모든 가사를 완전히 알아들었다. 공연장 음향도 음량이 너무 작아서 답답한 것 이외에는 깔끔하고 깨끗해서 듣기 편했다. 무대는 극단적으로 양 사이드에 치우쳐서 보기 힘들었다. 절벽의 계단이 너무 가파르고 위험해보여서 걱정된다. 누누히 말하지만, 무대 위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류막심의 목소리를 받쳐주는 오케의 존재도 너무나 감사했다. 커튼콜 인사 후에 "브라보!" 하고 육성으로 크게 외치며 김문정 음감님과 오케를 향해 박수를 보낸 류배우님이 갑자기 검지를 들어 쉿, 하는 제스쳐를 취하는 모습에, 순간 삼연 신댄 막공 무인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라서 마음이 덜컹댔다. 신영숙 배우님에게 격하게 환호를 보내며 신남을 감추지 못하는 류배우님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고, 커튼콜 노래를 부르며 앞쪽으로 다시 나올 때 신댄과 하이파이브 하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무대 위에서 행복한 배우들을 보면, 무대 아래의 관객 또한 감사하고 행복하다.
공연이 끝나고 로비의 첫공인사에서 류배우님은 "꽤 오랜 시간 공연을 할텐데요," 하며 이 극을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셨다. 극 자체가 너무나 완전하기에, 연초는 현업으로 너무나 바쁘기에, 이 작품은 쉬엄쉬엄 볼 예정이다. 긴 기간 동안 이어질 만큼, 긴 호흡으로 마지막 공연까지 함께하려고 한다. 무대 위에 배우님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만큼, 배우님 역시 마지막까지 행복하게 공연하시길 바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요, 류막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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