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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in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2019.12.10 7시
류정한 막심, 신영숙 댄버스, 박지연 이히, 이창민 파벨, 문희경 반호퍼, 이소유 베아트리체, 홍경수 프랭크. 류막심 및 류신지연 페어 자둘.
※스포있음※
지연이히는 첫공보다 더 단단하고 강해졌다. 본디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나, 가족도 친구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각박한 세상을 살아내려 아등바등 하느라 자존감이 짓눌려있다. 맨덜리에서의 어색한 행동은 막심과의 신분차를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조심스러운 태도는 예의를 갖춘 인격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지연이히는 부표 얘기에 불같이 화내는 막심을 향해 "나 너무 무서워요," 가 아니라 "나 너무 힘들어요," 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막심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기에,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리는 대신 감정적 고통을 호소한 것이다. 좌초된 배 때문에 사방이 정신 없는 와중에도 막심만을 애타게 찾다가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디테일도 잘 어울렸다. 유일한 걸림돌이었던 레베카의 진실을 알게된 지연이히는 당당하지만 따뜻한 태도로 막심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아우른다.
신댄 역시 더 강렬하고 묵직하고 뜨거운 아우라로 무대를 휘어잡았다. "도대체 무얼 바라고" 하는 첫 소절은 들을 때마다 짜릿하다. 이히가 떨어뜨린 장갑을 보고 한 번, 가볍게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또 한 번 나름의 평가를 마친 신댄은, "하녀가 없" 다는 이히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정말로 놀랍다는 목소리로 되묻는다. 귀족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 익숙해져 있기에, 다소 어설프고 솔직한 이히가 그 부류가 아님을 금세 파악하고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며 얕잡아본다. 레베카1에서 "격조가," 하며 레베카와 비교라도 하듯 지연이히를 곁눈질로 보더니 "남다르죠," 하고 피식 웃으며 노려봤다. 냉정하고 고압적인 대저택 집사의 태도에서 레베카를 향한 찬양을 쏟아내는 맹신과 집착의 광기로 삽시간에 돌변하며 오싹한 전율을 선사한다. 특히 이날 "지금 어디 있든 멈출 수 없는 심장 소리 들려와" 라는 가사를 장면에 따라 전혀 다른 질감으로 표현하여 인상적이었다. 레베카1에서는 레베카의 부재로 인한 고독과 망연함에 사로잡혀 있다가 파도소리에 섞여 밀려드는 그의 존재감을 삼켜내듯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레베카3에서는 그 소리 자체가 맨덜리라는 듯 레베카의 존재감을 온몸에 휘감은 채, "감히 드 윈터 부인의 자리를 차지하려" 든 이히를 몰아붙인다. 신댄의 묘사만으로 레베카는 고스란히 되살아나 맨덜리 저택을 압도한다.
굳건해진 지연이히나 강력해진 신댄과 다르게, 류막심은 첫공에 비해 감정적 동요를 더 많이 드러냈다. 이히를 향해 벌컥 화를 내고서는 금세 후회하며 자책과 고통에 휩싸이고, 베이커 의사를 찾아가겠다는 대령의 말에 "그러셔야죠," 라고 흔들리는 목소리로 즉답하면서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이날 류막심 주변으로는 "칼날 같은 그 미소" 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고독, 분노, 죄책감, 자괴감 등 복잡다단한 그의 감정들이, "칼날 같은 그 미소" 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순간 완벽하게 실체를 얻는다. 레베카의 그 미소로 인해 삶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한 사람의 절망이 이 넘버 하나로 완벽하게 설명된다. 공판과 저택에서의 회담, 진실을 담고 있는 한 통의 전화에 이르기까지 내내 그 미소에 사로잡혀있던 류막심은, 런던에서 돌아온 이히와 함께 밤의 저편을 노래하며 비로소 위안을 얻고 활활 불타는 맨덜리를 마주하며 과거를 완전히 떨쳐낸다.
류막심 위주 디테일 몇 개를 기록용으로 남긴다. 꼿꼿한 자세, 우아한 동작, 고급진 말투, 오만한 눈빛, 고압적인 행동 하나하나가 류막심의 태생을 드러낸다. 호텔 프론트에서 상대 배우에게 거슬러 받은 지폐 중 한 장을 꺼내 팁으로 건네고 길게 사인을 해줬다. "아침 식사 전엔 '절대로' 농담 안해!" 라고 했고, 답답한 이히의 말에 "말귀를 못 알아먹어," 하고 투덜거렸다. 양손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며 심호흡을 하고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내밀며 "나랑 결혼해줘, 어때" 라고 청혼 같지 않은 청혼을 했다. "모르겠어요," 하는 이히의 말에 내밀었던 왼손을 거두다 말고 오른손으로 툭 치며 민망함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반호퍼에게 작별을 고한 뒤 퇴장하면서 "오 마이 갓, 갓!" 하면서 오른손 검지를 가리키는 디테일은 왜 때문에 하시는 걸까ㅋㅋ 맨덜리의 사람들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강하게 "인사들 하세요," 라고 명령조로 말하고서는 신댄에게 "마님을 방으로 안내하세요" 하고 지시를 내린다. "부인" 이라는 원래 호칭를 "마님" 이라고 바꾼 건 류막심의 디테일인데, 덕분에 이히의 위치가 사람들에게 훨씬 정확하게 각인되는 인상을 받았다.
힘겨루기를 하듯 신댄과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장면들이 많은데, 사라진 조각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특히 쫄깃하다. 각자의 역할에 맞는 가면을 철저하게 쓴 상태에서도 서로를 향한 적대감과 비아냥, 조롱과 멸시를 명확하게 드러내며 극적 카타르시스를 높인다. 신댄의 난입에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소파에 파묻힌 자세 그대로 앉아있던 류막심은, 제 품에서 빠져나가는 지연이히에게만 시선을 두며 왜 당신이 일어나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연이히가 불안해하는 모습에 그제서야 신댄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듯 고개를 살짝 그 방향으로 돌리며 귀찮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는다. 신댄 또한 류막심의 빈정거림에도 그와 눈을 맞추지 않고 적절한 예의만 갖춘 채 제 할 말을 다 쏟아낸다. 아슬아슬한 선까지 상대를 자극하고 비꼬는 두 사람의 대립이 고급스럽지만 적나라하여 흥미진진하다.
"곤란해?" 하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토한 류막심은 "내가 왜!" 하고 버럭 화를 낸다. 이히의 양팔을 붙잡고 흔들며 "무슨 얘길 들은 거야" 하고 묻는 찰나 인상을 확 찌푸리는 서슬 퍼런 위압감이 엄청났다. 걷잡을 수 없이 분노를 토하다가 순간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듯 이히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를 붙들었던 제 양손을 내려다보며 고통스러워하는 디테일도 첫공 이후 생겼다. 하루 또 하루. 소파 등을 팡 내리치고 그대로 가죽을 꽉 붙든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세운다. 손으로 얼음을 집어 유리잔에 넣고 술을 따른 뒤 그대로 마시려다 말고, 문득 쓸쓸하게 남아있는 체스판에 시선이 닿는다. 소파에 다시 앉아 체스판을 만지며 행복했던 이히와의 시간을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술을 확 들이키고서는 왼쪽 손등으로 이마를 짚으며 괴로워한다.
신이여. 하또하에서 그랬던 것처럼 펼친 양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디테일이 있었다. 단호한 자신의 의지를 말하는 부분에서는 오른손 검지를 사용하는 디테일이 있었는데, 이는 칼날송에서도 한 번 더 있었다. 두려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도망치듯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이날 류막심 노선과 아주 잘 어울렸다. 파티장 아메리칸 우먼 넘버에서 반호퍼의 "앙앙앙앙" 을 귀엽게 따라 하기도 하고 쌍엄지를 척 내보이며 쿨하게 나가버리던 류막심은, "레베카" 라는 이름 하나에 표정이 완전히 돌변한다. 웃듯이 우는 칼날송은 명불허전이다. 간드러진 목소리와 번뜩이는 눈빛으로 레베카의 말들을 반복하는 류베카의 모습은 짙고 매혹적이고 강렬하다. 레베카를 밀친 뒤 무릎을 꿇은 채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서는 탁탁탁탁 기듯이 바닥을 치는 디테일은 처음 봤는데, 그 순간의 긴박감이 여실히 전달되어 짜릿했다.
재판정에 존재하는 류막심의 모든 순간과 공판의 연장선 상인 맨덜리 저택의 장면을 격하게 사랑한다. 창민파벨을 보자마자 "당장 꺼져, 용건이 뭐야," 라며 하대하던 류막심은, 편지 얘기를 꺼내는 그의 의중을 바로 파악하고 "네 잘 알겠습니다," 라고 반말을 존대로 바꾸며 허리를 숙였다. 굳이 예의를 강조하여 고압적이고 우아하게 비아냥을 선사하는 오만한 귀족미를 어찌 예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베이커에게 전화해보겠다는 얘기에 기품 넘치게 앉아 있던 다리 꼰 자세를 푸르는 사소한 동작이 그의 긴장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파벨의 도발에 대노했으나 지연이히의 다독임에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린 류막심은 프랭크의 손을 탁 떨쳐내고 옷을 정리하며 "제가 맨덜리를 벗어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며 짓씹듯 대령에게 대꾸했다. 레베카가 끝까지 자신을 파괴시키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처참한 감정에 휩싸이지만, 그의 곁에는 이히가 있다. 어젯밤 꿈 속 맨덜리 맆 마지막에 환하게 웃으며 이히에게 손을 내미는 류막심의 표정이 너무나도 후련하고 행복해 보인다.
극의 마지막 장면과 커튼콜에서 류배우님이 너무나도 행복하고 신나 보여서 같이 기쁘다. 변주의 여지가 적은 극이기 때문에 프랑켄이나 시라노처럼 잦은 빈도로 만나고 있지는 못하지만, 무대 위에서 행복하게 서계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12월 18일이 초연, 삼연, 오연 통틀어 류막심의 100번째 공연이라고 들었는데, 그 회차 대신 연말 다른 날짜에 관극을 가게 될 듯하다. 이번 연말에 흥미로운 일들을 잔뜩 벌려두어서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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