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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

in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 1관, 2019.09.24 8시

 

 

 

 

이석준 다이사트, 서영주 알런. 시즌이 올라올 때마다 봐야겠다 생각만 하다가 이제서야 만나고 왔다. 초대석이라서 뒤쪽이긴 했는데, 오히려 말들의 전체적인 움직임이 한 눈에 들어와서 보기 편했다. 다만 개개인의 마이크를 쓰지 않는 연극의 특성과 다소 뭉개지는 배우들의 딕션이 몇몇 대사를 놓치게 하여 아쉬웠다. 연극 아마데우스를 보며 수차례 감탄했던 극작가 피터 셰퍼의 대표작이 이 극 에쿠우스인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잘 다듬어진 대사들과 군더더기 없는 시각적, 청각적 연출들이 탄탄하게 극을 구성하며 결말로 치닫는다. 몰입도가 워낙 높아서 인터미션 10분을 포함한 두시간의 런닝타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이번 연출에서 관람등급을 16세로 낮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자극적이거나 불편한 부분이 거의 없었다.

 

 

※스포있음※

 

 

행동에 제약을 두는 아빠와 생각에 제한을 거는 엄마의 아래에서, 상상력과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 소년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현실과 종교의 간극을 메워내기 위해 알런이 택한 매개체는 말이다. 바닷가에서 처음 보고 만지며 오롯이 사로잡힌 말이라는 존재는 알런에게 신앙 그 자체가 된다. 현실을 강제하는 것보다 믿음에 사로잡히는 것이 훨씬 쉬웠기에, 아이는 제가 택한 대상을 경배하고 자신을 내던진다. 아이가 지나치게 먼곳으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부모는 그럴 성격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자신의 신앙심을 그 열기에 투영하며 그를 방치하고 방관한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견고한 울타리를 쌓던 아이는 타인과 교감하며 조금씩 현실로 다가선다. 스스로 믿음을 구축하고 빠져들만큼 총명했기에, 바로 그 믿음이 무언가 비틀리고 왜곡되어 있음을 서서히 알아차린다. 엄마의 광신에 지치고 아빠의 초라함에 당황한 아이는 두려움에 휩싸여 혼란스러워 한다.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발가벗을 수 있는 용기와, 그 맨몸에 승마모자를 씌우고 바지를 입혀야 하는 종교는 서로를 비난한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욕망과 내내 억눌러온 자유가 존재감을 내뿜으며 지독한 고통을 야기하는 순간, 아이의 감정은 폭발하듯 터져나온다. 경애하고 숭배하던 존재를 향한 저항은 폭력의 형태로 분출되며 몸과 마음을 억압하고 있던 껍질을 산산조각 낸다. 강력한 정열은 고통에서 비롯되었기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파멸을 통한 재창조의 길로 아이를 이끈다.

 

 

 

 

산산히 흩어진 껍데기의 잔해 한가운데에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한껏 날을 세운 아이는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달라 간절히 청한다. 그 소리 없는 절규를 들은 의사 다이사트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사랑하지도 않는 이의 정적인 모습을 밤새 지켜봐야 하는 늙고 지친 의사는 아이의 정열을 못내 부러워하기에 이른다. 아이에게 요구되는 정상이란 대체 무엇인가, 뜨거운 생명력으로 넘실대는 열정을 빼앗는다면 아이에게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그럴 권리가 자신에게 과연 있는가. 직접 모든 진실을 토해내는 고백을 통해 완전히 산화해버린 아이를 보며 다이사트는 절망한다. 유령이 되어버렸노라 오열을 삼키며, 파괴된 거대한 신전과 신앙 앞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스스로는 결코 창조해낼 수 없는 정열을 제 손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음에 끝내 무너진다.

 

 

제 질문에 오히려 역공을 하는 총명한 알런의 자기방어를 보며 다이사트는 말한다. 정신병이 있는 사람은 타인의 약점을 잘 알아내고 파악하여 핵심을 찌를 수 있노라고. 이는 결국 자기자신을 설명하는 말로써 되돌아온다. 정신병을 치료하여 환자를 정상으로 돌려놓던 그 역시, 정신병을 가진 또다른 평범한 인간이었다. 자각이 있든 없든, 누구에게나 역린은 있다. 다이사트에게 있어 알런이 그러했고, 그 정열을 동경하게 되어버린 다이사트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오랜만의 연극 관극이 무척 즐거웠다. 고전의 가치를 통감하며 여운을 곱씹고 있다. 인간에 대해 고찰하게 만드는 작품들을 더 자주 만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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