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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10.11 8시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자열넷. 류라노 세미막.

 

 

류배우님의 세미막은 늘 약속된 레전공이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상상하고 그려온 시라노라는 인물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류라노의 노선과 연기에 새삼스레 감탄하고 열망하고 반할 수밖에 없었다. 본공연의 처음과 끝까지, 더 나아가 커튼콜의 마지막 자세까지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공연이었다. 큰 틀의 노선을 단단히 받쳐주는 디테일들을 차곡차곡 쌓고 촘촘하게 엮어내어 마침내 온전하게 완성된 시라노를 고스란히 심장에 끌어안은 채, 무대 위 마지막 순간까지 시라노 그 자체로써 존재한다. 이 배우를, 이 배우가 표현하는 인물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로 박제하여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이날의 류라노가, 아주 조금 때로는 좀 많이 그리울 듯하다.

 

 

 

 

※스포있음

 

 

첫 등장부터 패기와 자신감이 넘치던 청년 류라노는, 자유분방하고 재치 있는 언행을 마음껏 뽐내며 삶을 즐긴다.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는 당당함을 온몸에 두른 채 곧게 칼을 빼어들고 정확하게 위선을 겨냥한다. 조롱도 풍자도 예술이라는 듯, 넘실거리는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을 센스 있게 버무리며 공간을 제 것으로 휘어잡는다. 록산은 그런 그를 망설이게 만드는 유일한 존재이긴 하지만, 류라노는 그 앞에서도 최대한 멋있게 보이려 스스로를 다잡는다. "그, 근데, 왜 사랑고백을 나한테 한거죠?" 라는 물음까지도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던 미련은, 크리스티앙이 가스코뉴 출신이 아니라는 록산의 설명으로 고백의 진의를 깨닫게 되며 산산조각 난다. 이어지는 록산의 말을 이미 짐작해버린 류라노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의 부탁을 먼저 입에 올린다. 비록 마음은 아프지만, 사랑하는 록산의 행복을 위해 그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노라 생각하며 류라노는 시원하게 약속해준다. 다친 손을 꽉 부여잡는 록산의 손길에 내뱉은 탄식은 정말로 육체적인 이유였지만, 사과 뒤에 텀을 약간 두고 "아프게 해서," 라는 그의 덧붙임에 상처 받은 류라노의 마음은 한차례 더 일렁이며 눈빛이 흔들린다.

 

 

부대의 커튼을 손으로 살짝 젖히며 위풍당당하게 제 공간으로 들어온 류라노는 권력을 앞세우는 자를 가감 없이 비웃는다. 강한 어조와 거리낌 없이 빼어드는 칼 끝에서 단단함이, 조롱이 뚝뚝 묻어나는 어미와 우아한 비유에서 유들유들한 풍자가 쏟아진다. 그 와중에 생경한 얼굴인 런티앙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는 자연스러운 손길에서 대장으로서의 리더십이 드러난다. 일당백이 덤벼도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불멸의 군대를 자랑스러워 하며 하하하, 웃는 목소리에서 자신감이, 낮일도 밤일도 성실하게 잘하며 인생을 즐긴다는 몸짓에서 위풍당당함이 한껏 부각된다.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위선자에게 분노할 가치도 없다는 듯 술병을 받아들며 피식 흘리는 비웃음에서 세상 두려울 게 없는 시라노의 성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크리스티앙에게 먼저 도움을 제안할 때도, 제 검과 펜이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함이 앞선다.

 

 

처음부터 다시 하겠노라며 진심을 다해 건넨 영혼의 고백이 고스란히 되돌아오자, 류라노는 기쁨과 희열이 흘러넘치는 얼굴로 행복을 만끽한다. "이토록 진실한 그대," 라는 록산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류라노는 문득 꿈에서 깨어나며 "난 아니야," 하고 중얼댄다. 진실하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자괴이자 잘못된 방향의 답가를 향한 부인. 이어 "난 아니야," 라고 재차 읊조리는 눈빛이 가만히 침잠한다. 록산이 사랑하는 대상은 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크리스티앙과 옷을 바꿔 입고 다시 록산의 집 그늘 아래에 숨은 류라노가 모자를 벗어 인사를 건네는 평소 디테일도 다르게 다가왔다. 그동안은 록산을 향해 인사하는 크리스티앙에게 건네는 인사로만 느껴졌는데, 이날은 제가 크리스티앙이 된 것마냥 그의 인사를 따라하는 것으로 보였다. 평소와 같이 고개를 푹 떨구는 것이 아니라, 모자를 벗은 채 천천히 얼굴을 숙이려다 문득 현실을 깨닫고 멈칫하며 절망하는 눈빛이 선연했다. 쓰디쓴 미소가 체념과 수용으로 이어지는 감정을 여실히 담아낸다. 록산 넘버의 끝에서는 자신 있게 꾹 눌러 담아 던지듯 날려보냈던 손키스를, 이 넘버의 끝에서는 깊게 꾹 누르며 떠나보내듯 허공에 얹는다.

 

 

 

 

류라노는 설레발을 치는 친구들에게서 몸을 돌려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를 담은 구조물을 다시 시야에 담는다. 록산의 입에서 나오는 결혼이라는 단어에 사뭇 놀라던 류라노는, 심상치 않은 록산의 태도에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간다. 문장 몇 개에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서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축하해요." 라고 진심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사랑해요, 라는 록산의 말에 금세 허망함이 번져든 얼굴로, 류라노는 빵가면을 뒤집어 쓴다. "안돼!!!!" 하는 절규와 함께 바닥에 엎드린 채 엉엉 울음을 토해내는 절망은 발랄하고 경쾌한 반주에 녹아들며 장렬하게 번뜩인다. 괜찮냐는 라그노의 눈빛에 애써 웃으며 손을 들어 록산과 크리스티앙을 가리키는 류라노의 슬픔은, 드기슈의 선언으로 산산히 흩어진다. 비겁한 권력의 남용에 저항하지 못하고 짓씹듯 명령을 내린 류라노는, 평소처럼 록산을 걱정하며 바라보고 서있지 않았다. 가스콘 부대의 대장으로써 부대원들의 뒤를 따라 걸어나가다가, 록산이 무너지는 소리에 비로소 뒤를 돌아보고 곁으로 다가간다. 록산의 잔인한 부탁을 예상치 못했다는 듯 흔들리던 눈빛은, 매번 그러했듯 다정하게 그를 안심시키는 미소로 이어진다. "날 살아 숨쉬게 하는 단 하나의 운명" 을 이해하냐는 물음에 바닥까지 뚫고 들어가는 저음으로 "그럼요," 하고 짓씹는 목소리가 무겁고 아득하다.

 

 

애써 끌어안았던 슬픔을 흐느끼듯 토해내며 세차게 모자를 내팽개친다. 객석에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왜 신은 내게만!" 하고 절규한 류라노는,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삿대질 하며 "언제나 지독하고 가혹한 웃음을 짓는가," 하고 쏟아낸다.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파도," 하며 천천히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뒤 그대로 눈을 감고 흘러넘친 감정을 주워담는다. "승리도 패배도 다," 하며 목소리가 강해지고 "내 몫이니 늘 그랬듯," 하며 어조가 단단해지며 "기꺼이 맞서리라," 하며 톤이 묵직해진다. 흔들림보다는 강건함이, 좌절보다는 의지가, 쓸쓸함보다는 굳건한 고독이 앞서는 모습으로, 류라노는 제 삶에 부여된 모든 운명을 기꺼이 감내하겠노라 선언한다. "날 할퀴는 사랑도," 하며 고개를 옆으로 살짝 떨군 채 서있다가, "난 두렵지 않아," 하며 절망을 분연히 떨쳐내듯 고개를 치켜든다. 곧고 반듯하게 똑바로 앞을 응시하며 온세상을 끌어안듯 양팔을 가득 펼친 채 나아가리라 외친 류라노는,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살짝 숙인 마지막 실루엣을 남긴다.

 

 

그 어느 때보다 시라노와 닮아있는 2막의 런티앙에게 류라노 역시 마음을 더 많이 내어준다. 런티앙이 가슴 속에서 꺼낸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말들 하나하나에 공감하며 그 마음을 공유하던 류라노는 품 안의 편지를 꺼내 내어준다. 영광을 향해 넘버에서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끌어안는 모습을 발견한 류라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쳐지나가지만, 이내 활짝 웃으며 들고 있는 술병을 그들을 향해 축복하듯 들어보인다. 매일매일 전달한 편지들을 "뭐, 하다보니," 라며 별 것 아니라는 듯 입에 올리는 류라노의 눈빛에 그 시간 속의 온갖 이야기가 스쳐지나간다. 하루 또 하루 쌓아올린 모든 감정과 마음과 기억의 총체가 글자 하나하나를 눌러담은 한 장 한 장의 종이 위로 포개진다.

 

 

 

 

록산의 고백을 들은 류라노는 "영혼만을?! 아니야," 하고 부인하면서 "크리스티앙!" 이라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스러져가는 그를 끌어안고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는 지연록산에게서, 그에게 애써 "괜찮아요," 라고 말해주던 류라노의 모습이 겹친다. 울먹이며 크리스티앙의 이름을 재차 중얼거리던 류라노가 천천히 성호를 긋는다. 이전에는 크리스티앙의 죽음으로 인해 류라노의 영혼 중 일부가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러나 이날은 조금 달랐다. 크리스티앙의 영혼 자체가 이미 류라노의 영혼이 되어 버렸기에, 그의 죽음은 말그대로 류라노의 죽음이었다. 록산을 향한 마음을 온전히 공유하고 공감한 영혼으로써 제 일부가 되어 버린 크리스티앙의 죽음으로, 사랑을 품은 류라노의 영혼도 완전히 죽어버린다. 이날의 런티앙은 류라노에게 있어 아름다운 대리인이나 감정을 전하는 매개체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부분을 담당하는 제 영혼을 뚝 떼어낸 자신의 일부였다. 비록 일부가 완전히 죽어버렸지만, 아직 지켜야 할 게 남아있는 류라노는 부서진 영혼을 끌어모아 다시 깃발을 높이 치켜든다. 평생 그래왔던 것처럼.

 

 

류라노는 비상처럼 우아하길 바라는 낙엽의 추락에 제 인생을 얹어본다. 전쟁 때 다친 상처가 가끔 이렇게 아파 온다며,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배의 상처를 툭툭 친다. 마치 15년 동안 그 상처를 기다리기도 했다는 듯이. 피와 눈물로 얼룩진 채 오랜 세월을 담아온 종이 한 장을 손에 고이 올린 채, 류라노는 피어오르는 기억을 가만히 마주한다. 록산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며 "그건 내가 아니었어요," 라고 말하는 류라노의 마음이 이날 온전하게 이해됐다. 그 어느 날 달빛 아래에 서서 록산의 고백에 "난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던 류라노는, 그가 사랑한 대상이 자신이 아님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크리스티앙에게 록산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자네라고 말해줄 수 있었고, 록산에게도 크리스티앙이 당신의 사랑이노라 웃으며 알려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날 류라노는 "세상에," 라는 감탄사를 전쟁터에서도 페어웰맆에서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한 영혼을 사랑해왔고 그게 바로 당신이었" 다는 록산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류라노는 그저 미소를 건넬 뿐이다.

 

 

영혼이 새어나가는 숨을 흘리던 류라노는 가늘게 눈을 뜨며 비로소 자신을 마중나오는 달을 반가이 맞이한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그럼," 하고 웃음을 흘리던 류라노는 "자, 예의를 갖춰라 시라노," 하며 지팡이를 주워들고 일어선다. 무대 정중앙으로 걸어나온 그는 오른손의 지팡이로 몸을 지탱한 채 왼손으로 허리를 짚는다. 결코 몸을 숙이지 않겠다는 듯 당당하고 꼿꼿하게 선 류라노는 희망이 없을 때 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사의 태도라 단언한다. 평생 맞서 싸워온 적들을 일일이 나열하며 끝까지 싸우겠노라 지팡이를 휘두르는 류라노는 내 코가 보이느냐 흐느낌을 섞어 절규하듯 외친다. "오늘밤 내가 달나라로 들어갈 때," 라는 초연 독백 부분 중에서 "오늘밤" 이라는 단어가 10월 들어서 없어졌다. 이미 달나라에 제 영혼의 일부를 보내버린 류라노에게는 굳이 그 단어가 필요치 않았던 것이리라. 록산에게 몸을 기대면서도 꿋꿋이 왼손을 허리춤에 얹고 스스로 똑바로 서있으려 애를 쓰면서, 류라노는 다 죽어가는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선명한 목소리로 선언한다. "티끌 한 점 없는, 얼룩 한 점 없는 나의 영혼" 만은 가지고 돌아가리라고. "날 할퀴는 사랑도," 하며 록산을 향해 웃어보인 류라노는 "난 두렵지 않아," 하며 그를 끌어안는다. 나아가리라 외치며 마지막 영혼이 새어나가는 바로 그 순간, 류라노가 미소 짓는다. 마치 이 삶을 잘 살아내었다는 듯, 후련하고 행복하게.

 

 

 

 

커다랗고 동그란 달을 향해 뛰어간 류라노가 팔을 쭉 뻗는다. 달을 붙잡아낼듯 가볍게 손가락을 움켜쥐고 다시 쫙 펼쳐낸 그가 주먹을 움켜쥔다. 그대로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류라노는 고개를 치켜든다. 얼론 마지막 장면보다도 더 깊게 고개를 숙이던 평소의 커튼콜이 아닌, 당당하고 올곧게 제 코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마무리 자세.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곧은 의지를 굳게 믿고 지켜낸 본공의 류라노는 단단히 두 발을 딛고 선 채로 웃으며 세상과 하직했고, 마지막까지 거인과 당당히 맞선 커튼콜의 류라노는 당당히 코를 들어올린 채 달나라로 돌아갔다. 스스로 믿고 추구한 삶을 꿋꿋하게 살아낸 고귀한 자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며 웃음 짓는 숭고함을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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