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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10.13 6시반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류라노 자열다섯 관극. 재연 시라노 총막.

 

 

막공에서 큰절을 하는 류배우님 루틴을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로 막공이 오랜만이어서, 성큼성큼 걸어나와 객석을 향해 절을 하는 류배우님의 모습에 새삼스레 울컥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로 시작되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로 마무리 된 무대인사도 너무나 감사했다. 무대인사 내내 울고 박수 치고 웃고 환호를 보내느라 드물게 허용된 류배우님 무인을 촬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 만족스러운 총막이어서 행복하다. 초연 시라노는 재연이 돌아오리라는 기약이 없어서 미련이 많이 남고 아쉬웠는데, 재연 시라노는 반드시 돌아올 삼연을 고대하며 아주 잠시 안녕이라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시라노가, 류라노가 건네준 용기와 의지와 신념은 죽는 순간까지 심장에 끌어 안고 살리라.

 

 

 

 

스포있음

 

 

이날 류라노는 세미막과 유사한 노선에 지금까지 쌓아온 여러 디테일들과 막공 다운 애드립을 담아내며 멋진 마지막을 선사했다. 단단하고 꼿꼿한 류라노는 불의에 당당히 맞서고 권력에 조롱을 날리며 자유분방하게 제가 굳게 믿는 길을 걷는다. "메르씨 메르씨 씨씨씨," 하며 시의 제목을 강조하고, "대~단하신 나으릴 위한," 하고 목소리 하나로 풍성하게 공간을 채워내며 무대를 장악한다. 잔뜩 겁을 먹은 시인들을 향해 "그 펜! 절대로 내려놓지 말게!" 하고 강하게 말한 류라노가 초연처럼 하하하, 웃음을 토해낸다. 공기마저 일렁이게 만드는 분명하고 선연한 의지. "진실하고 강한 빛을 굳게! 지켜내야 하니까" 라며 검지로 강조하고, "미지의 운명이여 어서 오라" 며 당당하게 양팔을 벌린 채 손짓한다. 그대로 뒤로 돌아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보폭이 크고 흔들림이 많아 여유롭고 자신만만하다. "지옥 끝에서 웃어주마," 하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하하하, 재차 크게 웃음을 토한다.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리라 외치는 류라노의 마지막 실루엣이 모든 부조리를 집어 삼킬듯 거대하고 눈부시다.

 

 

 

 

록산 앞에서 한껏 여유와 자신감을 내세우려 하지만, 설렘과 기대로 가득찬 초롱초롱한 눈빛은 숨겨지지 않는다. "들판으로 끝없이 달렸어," 하는 록산의 말에 "맞아요!" 하고 추임새를 넣는 재연 초반 디테일을 막공에서 다시 가져왔다. 넘버 마지막에 "내 영혼의 친구여," 하며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류라노는 오른손을 지연록산은 왼손을 가슴 위에 얹어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완전히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완벽한 영혼의 쌍둥이처럼. "얼굴도 어쩜 그렇게 잘생겼는지," 하는 말에 한동안 오른손만 얼굴에 댔는데 막공에서는 양손 꽃받침으로 돌아왔다. "네, 뭐, 그렇게 할게요," 하고 괜히 손을 문질대며 한숨처럼 말하다가, "정말요?" 하는 록산의 물음에 위쪽으로 시선을 잠깐 돌리더니 "네! 그렇게 할게요!" 라고 미소를 걸며 시원하게 답한다. 그러나 "아프게 해서," 라는 록산의 중의적인 말에 결국 얼굴 가득 울상을 짓고 만다. 터치에서 류라노가 "마지막 터치!" 하며 드기슈의 입술을 톡 쳤던 것처럼, 라그노도 마지막 터치라며 르브레의 입술을 툭 쳤다.

 

 

가스콘 부대의 커튼을 오른손으로 젖히며 멋지게 등장한 류라노는 "어디 있든 삶은 전쟁터," 까지 굵고 진중한 목소리를 내다가, "니까-요/" 하며 장난스럽게 톤을 올리며 제 큰 코를 드기슈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온 무대를 휘저으며 마지막을 불태우는 시라노 대장과 가스콘 부대원들. "새카만 하늘에 노오란 마카롱 같은 달이 동그랗게 떠올랐," 까지는 마치 구연동화를 하듯 풍만한 음성으로 말하던 류라노가 "따!" 하며 귀엽게 마무리하는 어미는 세미막과 총막에서만 했다. 런티앙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성호를 그은 호중르브레는 다음 생에서 만나자며 쿨하게 나가버린다. "이러니까 한 번도 연애에 성공을 한 적이 없지!" 라는 런티앙의 탄식에 "나도," 하고 중얼거린 류라노가 "뭐왜뭐," 하고 지레 발끈하는데, 세미막과 막공에서 "뭐 들었어?" 하고 디테일을 넣었다. 그리고 막공에서 런티앙이 "못 들었습니다" 하고 대꾸해서 재미있었다. "좋아 빌려주겠네!" 라는 류라노의 말에 "뭘요?" 하고 되묻는 대사를 런티앙이 계속 안했는데, 막공에서는 제대로 했다.

 

 

막공이라고 배우님들이 자꾸 마지막을 강조하여 마음이 한층 애틋해졌다. 라그노의 빵집을 찾아와서 "우리들의 '마지막' 경고장을 가지고 왔다" 라고 말했고, "시원하게! 남자답게! 마지막으로!" 류라노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 말에 류라노가 "마지막으로?" 하고 피식 웃는데, 육성으로 작은 탄식이 절로 터져나왔다. 가정교사 샤렐은 "아가씨, 행복하셔야 해요," 하며 지연록산의 손을 꼭 붙들었다. 좀 자연스럽게 해봐! 라는 류라노의 구박에 런티앙이 "대장님이 보여주십시오," 하고 대꾸했다. 순간 멈칫한 류라노가 "보여줘?" 하며 웃으니 런티앙이 "그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류라노가 양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멋지게 치켜들며 우아하고 귀여운 자세를 취해서 객석이 웃음으로 넘실댔다. 솔로곡을 부르고 시무룩해 있는 런티앙을 끌고 온 류라노가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라고 하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댔다.

 

 

 

 

록산의 답가에 "록산," 하고 중얼거리며 한껏 행복에 취해있던 류라노는 한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다. "난 아니야," 하고 울먹이며 망토를 꼭 붙들고서는 다시 "난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며 헤매이듯 불안하게 고개를 움직이며 울음을 참아낸다. 제 눈물을 계속 훔쳐내면서도 활짝 웃으며 크리스티앙을 위해 문을 열어준 류라노는 아득히 침잠한 감정을 얼굴 가득 담아내며 두사람을 향해 몸을 돌린다.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하며 잔을 들고 있는 구조물의 왼쪽 동그란 부분을 가볍게 짚으며 씁쓸한 웃음을 토해낸다. 신부님의 등장 전까지도 재차 구조물을 올려다 보며 잔인한 영광을 곱씹는다. "축하해요," 라고 진심으로 인사를 건넨 류라노는 "달에서 떨어지면 이런 기분일까," 라며 쓰디쓴 미소를 입에 건다. 모자를 르브레에게 건네야 하는데 라그노에게 건네서 뭔가 정신이 없었지만 무사히 빵가면을 뒤집어 쓰고 드기슈 뒤에 쪼그려 앉았다. "못쉥긴 지구인 삐리빠라 삐리빠라 삐리빠라 뽕뽕뽕!" 하며 세상 귀엽게 시비를 걸고서는 다급하게 드기슈를 붙든다. 혼인서약을 하는 두 사람을 뒤에서 지켜보며 바닥을 탕탕 내리치는 절규가 아득하고, "안돼!" 하며 드기슈의 다리를 붙잡는 절박함이 아프다.

 

 

세미막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부대원들을 따라가려던 류라노는, 록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뒤를 돌아본다. 록산과 거리를 둔 채 그의 입에서 쏟아지는 잔인한 말을 고개를 떨군 자세로 듣고 있는 류라노. 마지막 부탁을 하며 록산이 깊은 키스를 남긴 제 오른손을 망연하게 바라보는 류라노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오른다. 새어나오는 울먹임을 삼켜내지도 못하고 흐느낌을 토해내며 사방을 휘휘 둘러보는 아득함의 끝에 결국 모자를 내팽개친다. "언제나 지독하고" 하며 무대 안쪽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가혹한!" 하며 그 손을 한차례 더 강조한다. 그저 바란 것은 그의 행복이었노라며 처절하게 무너져내리는 류라노. 절망의 낙폭이 클수록 "기꺼이 맞서리라 홀로" 하고 스스로 일어나는 고결한 의지가 숭고하게 다가온다. 양팔을 가득 벌리며 나아가리라 외치는 강건함과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살짝 떨구는 마지막 실루엣의 굳건함이 눈이 부시게 고귀하다.

 

 

 

 

2막. "낚시 잘 하십니까?" 라는 런티앙의 평소 디테일에 이날 류라노가 "그럭저럭" 이라고 답해서 웃음이 터졌다. 시상이 떠오른다는 라그노의 말에 "못말려,"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좋은 목소리로 마들렌 운 좀 띄워달라는 라그노의 부탁에 "좋아," 하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를 내더니 흠흠, 하며 목을 다듬는 류라노. 그 옆에서 너무 좋아, 하고 추임새를 넣는 라그노와 "마!" 하고 평소보다 더 강하게 운을 띄워주는 류라노가 몹시 귀여웠다. 영광을 향해 넘버 마지막에 무대 안쪽에서 평소에는 라그노가 류라노를 들어올렸는데, 막공에서는 류라노가 라그노를 들어올리는 것도 좋았다.

 

 

록산이 편지 이야기를 꺼내도 놀라지 말라고 운을 띄운 류라노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깊은 눈빛으로 런티앙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매일매일 썼다네," 하며 고개를 돌린 뒤 "뭐, 하다보니," 하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건다. 경사면을 올라간 뒤 항상 모자를 벗고 무대 왼편을 바라보며 서있었는데, 이날은 넘버 시작 직전까지 록산을 향해 몸을 살짝 돌린 자세였다. "글자 하나하나에," 하고 록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마음을 담아," 하며 살짝 빗겨나듯 고개를 떨군 류라노가 "당신을 위해 난 편지를 써요," 하고 정면을 바라보는 건 세미막과 막공에서만 했다. 감정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듯 자꾸만 미소를 짓는 류라노의 마음이 애틋하고 아련했다.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 제 영혼의 죽음을 맞이하는 류라노의 두눈이 고통과 슬픔에 젖어 반짝인다. 처절하고 허망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나오던 류라노의 가라앉은 눈빛은, 지원군이 아니라는 발베르의 외침에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한다. 분노와 절망을 쏟아낼 수 있는 적이 눈앞에 생긴 그 순간, 다시 번뜩이는 류라노의 의지. "르브레!" 하고 강하고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1012 토요일 공연에서 회전무대에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여파인지, 가스콘맆 마지막 무대 연출이 달라졌다. 바깥쪽 회전무대 대신 안쪽 회전무대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류라노는 창이 가득 꽃힌 소품 사이가 아니라 탁 트인 무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다. 오직 가스콘 부대원만으로 가득 채워진 무대가 생경하면서도 극적이어서, 천천히 돌아가는 마지막 실루엣이 강렬하고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이 극적인 마지막 장면에 끝없이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것만이 객석에서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크리스티앙의,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손에 올린 류라노가 부르는 이날의 페어웰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마치 15년 전 그때로 돌아간 듯, 젊고 선명한 당시의 목소리로 직접 입에 올리는 진실한 영혼의 고백. 평생을 끌어안고 살아온 제 영혼을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마주하는 류라노의 마음이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울먹임에 반가움을 담아 "내 친구 달이 나를 마중나왔어요," 라며 하늘을 올려다본 류라노는, "이러고 있으면 안되지. 그럼, 그럼," 하며 주섬주섬 지팡이를 줍는다. "자, 예의를 갖춰라 시라노,"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류라노는 오른손은 지팡이를 짚고 왼손은 허리에 올린 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한다. 평생 싸워온 적들을 일일이 나열한 류라노는 "좋아," 라고 스스로를 다잡듯 중얼거리고서는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다 데려와라," 하고 선언한다. "내 말이 들리는가," 하며 웃고, "내 코가 보이는가!!!" 하며 절규하는 류라노는, 삶의 끝까지 자기자신을 북돋우고 있다. 그리고 록산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섬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다.

 

 

"내가 달나라로 들어갈 때, 날 위한 축포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휩쓸 것이다. 월계관도 장미꽃도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가도, 내가 가져가야할 단 한 가지. 티끌 한 점 없는, 얼룩 한 점 없는, 우리의 영혼."

 

 

"날 할퀴는 사랑도," 하며 록산을 향해 미소 짓고, "전쟁과 운명도," 하며 울먹인 류라노는 "난 두렵지 않아," 라며 아이 같은 울음을 섞는다. "난 앞으로 나아가리 나아가리," 외치던 류라노가 턱, 숨을 멈추며 멈칫한다. 마지막 숨이 새어나가는 순간, 가느다란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퍼진다. 제 인생을 충만하게 살아낸 자만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지을 수 있는 그 완전하고 후련한 미소. 고통도 슬픔도 절망도 좌절도 온전히 제 몫으로 끌어안은 삶이었기에 기꺼이 맞이하는 죽음. 무너져내린 류라노는 "록산," 하고 중얼대며 그의 손에 편지를 쥐어준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과, 록산의 영혼이 모두 담겨있는 그 낡고 빛바랜 종이 한 장을.

 

 

 

 

무대인사까지 전부 끝난 뒤, 객석을 향해 손키스를 날려준 류라노는 쌍엄지를 들어보이며 무대 안쪽으로 뛰어들어간다. 늘 그랬듯 달을 보고 서는 것이 아니라, 객석을 향해 뒤돌아선 류라노는 활짝 웃더니 양팔을 크게 벌리며 머리 위로 큰 하트를 그렸다. 양손을 팔랑팔랑 흔드는 마지막 인사에 아쉬움보다는 벅참을 가득 안고 객석을 나설 수 있었다. 류라노 덕분에 행복했고, 류라노 덕분에 큰 위안과 의지를 건네 받았던 2019년 여름이 이렇게 잘 마무리 됐다. 여러 이벤트와 선물들은 추후 정산글에서 정리하기로 하고, 일단 작별인사를 건네본다. 류라노! 아주, 잠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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