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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10.05 3시
류정한 시라노, 나하나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자열셋. 류하나 페어 막공.
※스포있음※
사람은 언제 죽는가. 마지막 숨을 토해내는 그 순간만을 유일한 죽음으로 명명하기에는 어폐가 있으리라. 각기 다른 인생을 살아내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죽음을 마주하게 되고, 그 죽음의 형태가 삶이 어떠했는가를 증명한다. 이날의 류라노는 각기 다른 태도로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다. 예측할 수 없었던 첫번째의 죽음 앞에서 절망으로 침잠하지만, 스스로 굳게 믿는 의지를 결코 버릴 수 없었기에 다시 칼을 빼어든다. 영혼의 일부가 죽어버린 채로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 싸워야 했던 15년의 세월 끝에 재회하게 된 죽음의 신을, 류라노는 반가이 맞이한다. 첫번째 죽음 이후로 줄곧 기다려왔다는 듯, 기꺼운 얼굴로. 거짓과 오만, 위선과 편견, 허영과 자만심. 최후의 날숨을 내뱉는 순간까지 이 모든 적들과 맞서며 온몸으로 두 번째 죽음을 마주한다. 자신을 할퀴는 사랑도 전쟁도 운명도 모두 끌어안은 채, 류라노는 티끌 한 점 얼룩 한 점 없는 고귀한 제 영혼만을 품에 안고 달나라로 돌아간다. 지독히 인간적이기에 너무나도 고결한 시라노를 보며 돈키호테를 자주 떠올렸지만, 이날만큼 완벽하게 겹쳐보인 적은 없었다.
풍성한 성악톤의 나의 코 넘버부터 대레전을 직감했다. "드높은 콧대는," 라며 오른손으로 높은 콧대를 표현하는 동작을 했다. "시라노 드 벨쥐락" 이라며 굵은 톤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드기슈를 비웃는 웃음소리를 크게 낸다. 양옆의 관객들을 향해 칼을 덜덜 두 번 흔들고 무대 정중앙으로 나와서 한차례 더 크게 흔들며 얼굴까지 푸르르 떤다. 아, 하면서 눈을 번뜩이며 진짜 위대한 시 하나를 선사하겠노라 말한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그노를 부르며 손짓하고 반대 방향인 왼손도 우아하게 펼치며 무대를 만든다. 장난스럽게 고개를 까딱이며 메르씨를 네 번이나 말했는데, 마지막에 왼손으로 칼 끝을 살짝 잡았다. "대단하신 나으릴 위한," 하고 시작하는 터치 도입부를 너무나 사랑한다. "니 수준에 맞춰줄게," 하면서 칼을 8자로 가볍고 빠르게 흔드는 디테일이 생겼다. 터치 직전 드기슈가 칼을 과하게 휘두르며 잘난척했던 것을 비웃듯이. 라그노의 손을 붙잡으며 의자 위로 올라가서는 "큰소리 치던 배짱은 쪼그라들었나" 라며 몸을 한껏 구기며 조롱한다.
록산의 가정교사 말에 "저를요?" 하며 몸을 평소보다 가까이 들이민다. "단 둘이서요,"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는 샤렌에게 좀 더 다가가며 "단둘이?" 하고 광대를 한껏 끌어올린다. 장면마다 능숙하고 재미있게 상황을 만들어내는 가희 배우님의 맛깔난 디테일들이 재미있다. 코를 만지려는 흑심 가득한 손길을 뿌리친 류라노가 뒤쪽 왼편 의자에 앉아 중얼거린 입모양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록산도 자네와 같은 마음일 거라는 라그노와 르브레의 설레발에, 말도 안 된다는 듯 굳은 표정으로 얼어붙어 있던 얼굴이 점차 희망으로 차오르며 밝아진다. 무슨 일일까 궁금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다가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넘버, 록산. 라그노에게 쉿, 하고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그 손을 잠시 그대로 허공에 둔다. 설렘과 기대로 반짝이며 떨리는 평소 목소리와 다른, 선명하고 곧고 명징하며 풍부한 음색이 너무나 좋았다. 깍지를 끼듯 양손가락을 살짝 겹치는 손동작을 지난주부터 몇 번 했는데, 록산을 향한 조심스러운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소한 동작이어서 마음이 가더라.
패스트리와 시. 빵 봉지로 사용된 제 시를 낭송하는 라그노의 뒤편에서, 류라노가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구절들을 입모양으로 따라 했다. 마지막 "날려주리 턱주가리" 라는 문장에, 고개를 좌우로 털면서 턱주가리를 얻어맞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웃는 디테일은 처음 봤다. 라그노가 기연 배우에게 "돈 내지마, 코코" 하고 말하는 건 공연 중반쯤부터 생겼는데, 앙상블 배우들에게 이름을 부여해주는 것이 참 좋다. 일부러 돈주머니를 흔들어 딸랑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는 예원 배우와 그의 거절에 에헤헤이, 에헤, 하며 입을 크게 벌리는 류라노 합도 좋아한다. 오른손으로 라그노에게 손짓하며 모든 공을 라그노 부인에게 돌린다. 라그노가 내민 손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연스레 붙들며 "왜?" 하고 묻던 류라노는, 그가 괜한 소문을 내려는 걸 눈치채고는 잽싸게 모자로 입을 틀어막는다. 류라노의 뽀뽀에 "아 이 친구 참," 하며 부끄러워하는 라그노. 라그노 부인에게 우아하게 귀족인사를 하고서는, 건네는 빵을 본 척도 하지 않고 퇴장한다. 넘버 중간에 재등장한 류라노는 문장들을 중얼거리며 일필휘지로 편지에 글을 적어 내리며 지나간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류라노는 어깨에 올린 르브레의 손을 뿌리치고 라그노 옆에 선다. 백 명이면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충분하다며 경고장을 세 번에 걸쳐 찢은 류라노는, 르브레의 설득에 미간을 한층 좁히며 고개를 젓는다. "그 펜!" 하며 오른손 검지를 들어 강조한 뒤, "절대 내려놓지 말게" 하며 그대로 검지를 아래로 향하게 한다. 9월 중순 즈음부터 브링미 넘버에서 이 손가락 디테일이 자주 있었는데, 단호하고 분명한 시라노의 의지를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볼 때마다 심장이 뛴다. 특히 이날은 공연 전반에 걸쳐서 이렇게 손가락 하나로 의지를 공고히 표현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하하, 웃으며 넘버를 시작하는 류라노. 구깃해진 경고장을 내던지며 아니, 하고 외치는 음성은 분노보다 결연함이 앞선다. 거인을 데려와. 늘 벅차오르는 넘버이지만, 이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했다. "시를 끄적이며," 하며 손으로 글을 끄적이는 제스쳐를 하고,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처럼 "한겨울에 비바람이 거칠게 휘몰아" 치는 모습을 펼쳐 보인다. "맞서리라-" 하고 점진적으로 굵고 풍성하게 퍼져나가는 음색을 사랑한다. "날! 아는! 친구! 미지의 운명" 에게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는 뒤돌아 걸어가는데, "지옥 끝에서 웃어주마," 하고서는 하하하하하하, 라고 초연처럼 웃음을 토했다. "세상 모든 거인들과," 하며 오른쪽으로 몸을 살짝 돌린 채 양손을 모으고 "맞서-리-라" 하며 칼을 치켜드는 부분까지 온전히 시라노 그 자체다. 어두컴컴한 무대를 홀로 꽉 채우는 류라노의 거대한 존재감은 직접 보고 듣고 온몸으로 느끼지 않는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
록산을 발견한 류라노는 환하게 웃다가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듯 후, 하고 숨을 내쉰다. 그리고 주먹쥔 손을 입가에 가져다대며 후, 하고 숨을 불어넣었다. 가스콘맆에서 성호를 긋고 마지막 의지를 불어넣던 바로 그 자세로. 모자를 벗어 가슴팍에 얹고 다시 심호흡을 짧게 한 뒤에야 "좋은 아침입니다," 라며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정중하고 멋진 목소리로 엮어내던 시라노의 기품 있는 문장들은 록산의 포옹에 녹아내린다. 여성문학지를 만들고있다는 록산의 말에 눈빛을 반짝이고 양손을 맞잡으며 "정말 대단해요," 라고 감탄한다. 당신의 편지를 기다렸다는, 정말 보고 싶었다는 록산의 말에 격하게 동감하며 안타까워 한다. 벨쥐락의 여름. 록산처럼 양팔을 벌리며 무대 안쪽으로 걸어가는 류라노의 뒷모습에서 행복이 뚝뚝 떨어져내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 들을 준비가 다 되어 있습니다" 라고 단정지으며 다리를 꼰 류라노가 후, 하고 숨을 내뱉고서는 록산을 향해 "자, 진정하고," 라고 말한다. 한껏 광대를 끌어올린 얼굴로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는 그의 앞에서 록산이 고백을 시작한다. 누군가. 평소보다 자신감과 여유가 많이 보였는데, "그이의 미소는 내 영혼을 위로해요," 라는 말에 느긋하게 미소를 건네줄 정도였다. "당연히 같은 마음일 거예요," 라고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힘을 불어넣어주며 기쁨을 숨기지 못한다. "얼굴도," 하는 록산의 말에 평소에는 양손으로 꽃받침을 했는데, 이날은 오른손만 뺨에 대며 얼굴 가득 미소를 걸었다. 슬슬 고백이 끝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모자도 챙겨쓰고 품에서 편지를 꺼낸 뒤 키스부터 하고 탁탁 종이를 편다. 으으으, 하고 두번째로 신음을 토하는 류라노의 애드립에 하나록산이 살짝 터지며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양손으로 제가 일러준 운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록산을 바라보는 류라노. 그의 의중을 이내 파악하고서 허탈하게, 하지만 진심으로 행복을 바라며 웃어보이는 류라노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드기슈를 향해 "세 치 혀 끝으로 덤비는 곳은 더더욱 아니죠," 하고 비아냥 거리는 대사를 "아니겠죠," 라며 단정짓는다. "어디에 있든 삶은 전쟁터니," 까지는 묵직하게 얘기하고선 "까-요↗" 하며 얼굴을 들이밀며 빈정댄다. 드기슈의 웃음소리에 맞춰 같이 웃음을 토해낸다. 0929 공연에서 "그 시는 내게 노래를 불러줍니다," 하고 "영혼의" 라는 수식어를 빼먹었었는데, 이날은 정확하게 대사를 다 했다. "백작님!" 하며 제가 들고 있던 모자를 내팽개친 류라노가 크리스티앙을 향해 손가락을 탁 튕기며 신호를 주는 건 평소 디테일인데, 이날은 가볍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전리품들 챙겨가셔야죠," 라는 평소 대사와 다르게 이날은 "챙겨가십시오," 라고 단언했다. "가스콘이 어떤지 잊으셨습니까? 생각 좀 나게 해드려요, 예?" 하는 대사를, 지난주부터 "잊으셨습니까, 예? 생각 좀 나게 해드려요?" 하고 묻는 것으로 바꿔 말한다. 발을 구르며 "예?!" 하는 가스콘 부대의 추임새는 동일하다. 가스콘 용병대. 부대원들을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는 시라노 대대장의 성격이 부각되는 미소와 동작들. "용감한 사내들," 이라 소개한 가스콘 대원들이 "신이 사랑한 신이 축복한," 라고 노래하는 중간에 하하, 웃음을 토했다. "이빨을 갈며 으르렁대네," 하며 무대 정가운데에서 객석을 향해 검 끝을 살짝 휘두르며 눈을 이글거린다. 군무 마지막 부분에서 칼을 어깨에 턱 걸치며 하하, 하고 묵직하고 낮은 톤으로 자신만만한 웃음을 재차 흘린다. "밤일도 성실하게 너무 잘하셔," 하면서 허리를 왼쪽으로 살짝 탁 튕기는데 표정까지 너무 좋다. "믿어봐-" 하고 화음을 쌓는 가스콘 노래 중간에 "호오-"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풍차의 날개가 저 하늘에 있는 달을 향해," 한 다음에 "날 날려줄 수도 있지요," 하고 가볍게 폴짝 뛰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 봤다. 드기슈를 향해 크고 묵직한 비웃음을 하하하하, 내뱉은 뒤,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칼을 다시 허리춤에 찬다. 평소처럼 퉤, 하고 침을 뱉지 않았는데, 그럴만한 가치도 없다는 자신감과 자만심이 가득했다. 크리스티앙의 목소리에 칼자루를 꽉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류라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누가 내 코 얘기했는데?" 하고 중얼댔다. 뭔가 찜찜한 표정의 류라노는 과하게 입으로 숨을 쉬는 대원들 한가운데에서 약간 부담스럽다는 듯 손을 살짝 내저었다. 얘기를 해달라는 부탁에 입꼬리를 슬쩍 올리고, 우아하게 귀족인사를 하는 대원들에게 둘러싸이자 피어오르는 미소를 애써 감추지 않는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그만해," 할 때는 진심으로 귀찮다는 얼굴이지만, 이내 구연동화를 하듯 숨도 안쉬고 멋들어지게 이야기의 도입부를 풀어낸다. 크리스티앙의 코그로에 "저게 미쳤나, 씨" 하면서 달려든다. "자네가 크리스티앙 드 뇌빌레트," 하며 ㄹ 발음을 멋들어지게 굴린 류라노는, 주변의 눈치를 보다 그의 어깨에 양손을 턱 얹으며 "환영하네," 라고 말해준다. 재차 이어진 코그로에 "신참이니까 이해해야지.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며 자신의 괜찮음을 강권한다. 다시 한다며 애써 이어나가보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든다. "빨리 나가 씨, 다 나가라고 다 나가!" 하며 승질을 낸다. 런티앙에게 모자를 씌워주고 성호를 그은 르브레가 손키스까지 날려주며 명복을 빌었다.
초연에서는 "내가 록산의 오빨세, 왜 좀 닮지 않았나?" 라고 말했는데, 재연에서는 문장 사이에 "뭐 정확히 말하자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인데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초연 뎅라노처럼 첨언을 넣는다. 뎅라노의 이 디테일을 좋아했기에 재연의 변화가 반가웠는데, 이제서야 기록으로 남긴다. 허리춤에 다시 집어넣은 칼자루가 약간 돌아가 있어서 불편했는지 대화를 나누다가 슬쩍 만져서 똑바로 돌렸다. 편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시라노의 어깨를 퍽 때리는 런티앙 디테일 재미있다. "왜? 왜 안되는데 왜," 이런 식으로 화들짝 놀라던 류라노는, 이어지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그래?" 라거나 "싫어하지," 하고 추임새까지 넣으며 귀기울여 듣는다. "달콤한 말재주?" 하고 중얼거린 뒤 손뼉을 짝, 치며 "좋아 빌려주겠네," 하는 대사 끝에 MR이 시작되는 것으로 고정되어 안정적이다. 다만 이날 런티앙이 "뭐를요?" 하고 묻지 않고 "예?" 하고 물어서 "얼굴 빼고 다," 라는 류라노의 말이 약간 뜨더라. "자넨 잘생김만 준비하게," 하며 시작되는 완벽한 연인. "꿀 같은 말투," 와 "넘치는 센스," 라는 류라노의 꿀 떨어지는 목소리를 몹시 사랑한다. "정성 가득 담아 / 웃으며" 라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하하, 웃고, "전문가 뺨 치는 / 내 미소" 라는 부분에서도 만족스럽다는 듯 크게 하하하 웃었다. 왈츠를 출 때 런티앙은 유난히 류라노를 꽉 붙들고 세게 확 끌어당긴다.
자연스럽게 해보라는 류라노의 말에 "이게 최선입니다," 라고 답하는 런티앙. "됐고," 하며 편지를 다 외웠냐고 물어본다. 좌절한 크리스티앙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명심해. 자넨 멍청하지 않아," 라고 말해주는 류라노. 록산의 집 아래에 숨어서 "부드럽게," 하고 재차 강조한 뒤, 부드러운 런티앙의 목소리에 "그렇지," 하고 칭찬한다. "어둠에 그대 가리워져 보이지 않아도," 라고 부드러운 손짓과 함께 일러주고선 "천천히," 하고 첨언한다. 엉망인 크리스티앙의 전달에 화들짝 놀라며 건물 외벽에 찰싹 눌러붙는다. 어떻게든 수습하려 노력하려고 하지만, "털 없는 여인" 이라는 말에 기함하며 "털..!" 하고 탄식처럼 내뱉는다. 달달달 외운 문장들을 쏟아내는 런티앙의 목소리에 "아니, 그게.." 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류라노는, 너무 놀라서 하늘을 가리키는 손동작조차 하지 못했다. 런티앙이 알아서 "아니 저기 별똥별이!" 하고 뛰쳐들어오자 황급히 모자를 바꿔쓰고 망토를 벗긴다. "암흑을 뚫고...!" 하며 빛 속으로 나왔는데, 망토의 끈이 걸렸는지 한참을 꼼지락대다가 다시 "암흑을 뚫고 빛날 자리를 찾아가듯," 하고 이어나갔다. 안녕 내 사랑. "사랑해요, 록산." 하고 조심스레 건넨 고백이 제대로 록산에게 닿았음을 깨닫고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러나 록산의 대답은 그를 향하지 않는다. 진실되지 못한 스스로의 비겁함과 아름다운 답가의 어긋난 방향으로 절망하며 "난 아니야, 난 아니야," 하며 고개를 내젓는다. 꼼꼼히 크리스티앙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준 류라노는, 다시 어둠 속에 숨은 채 비참함이 묻어나는 얼굴로 모자를 벗어 인사를 건넨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진다면 좋겠어" 라는 록산의 말에 넘실대는 비통함으로 고통스러워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 감정을 애써 밀어넣으며 오른쪽 문을 연다. 크리스티앙에게 축하의 미소를 지어주며, 모자를 든 왼손으로 그를 록산을 향해 안내한다. 무겁게 걸음을 옮겨 다시 빛 속으로 나오지만, "내게 와준 사랑," 의 끝은 찬란하여 참담하다.
회전무대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채 씁쓸하게 패배 뿐인 승리를 입에 올린다. "내게 허락된 것은," 하며 무대 오른쪽 구조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앞까지 걸어가고서는, 그대로 응시하며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까지 말한다. "사랑이란 짐승은," 하며 록산을 다시 한 번 바라본 뒤, 무거운 걸음으로 천천히 경사면을 오른다. 눈물을 닦으며 애써 괜찮은 척 하던 그는, 혼인이라는 록산의 말에도 크게 놀라지 않는다. "사랑해요 시라노," 라고 말한 하나록산은 "축하해요," 라는 류라노의 말을 제대로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려버렸다. 이로 인해 덩그라니 남겨진 류라노의 고독과 아픔이 한층 적나라하게 다가왔다.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달에서 추락하면 이런 기분일까," 라고 말한다. 라그노의 가면빵을 집어 들고 "그래, 이거!" 하더니 대충 뒤집어쓰고 무대 왼쪽으로 달려간다. 일부러 드기슈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서 쪼그려 앉은 뒤, 양 검지 끝으로 관자놀이를 짚는다. 달에서 떨어진 나. 혼인서약이라는 말에 "안돼에-" 하고 절규하며 끝을 울먹이고, 으으, 하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한다. "정신이 번쩍 날텐데," 하며 양손을 머리께에 올리고 반짝거리는 손동작을 했다. 괜찮냐는 르브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준다. 걱정스러운 라그노의 표정에 애써 웃어보이며 오른손을 들어 록산과 크리스티앙을 가리킨다.
드기슈의 소집명령에 이럴 수는 없다는 듯 좌우로 내젓던 고갯짓이 어쩔 수 없다는 먹먹함으로 이어진다. 시선을 돌리며 "실시," 라고 명령을 내린 류라노는, 무너지는 록산에게 달려간다. 그를 부탁해요. 선의가 비극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함께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 록산이 양손으로 꼭 붙드는 제 왼손을,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던 바로 그 손을, 흔들리는 눈빛으로 내려다본다. 오른손을 들어 록산의 손을 마주 붙들어준 그는, "방패가 돼줘요," 라는 록산의 부탁을 예상했다는 듯이 미세하게 미소를 건다. "날 살아 숨쉬게 하는 단 하나의 운명," 이라는 록산의 말에 무릎 꿇고 있는 허벅지 위에 양손을 얹은 채 고개를 푹 떨구며 슬픔을 씹어 삼킨다. 다정하게 웃어주며 록산을 일으켜 세운다. 그대로 혼자 남겨진 류라노는 망연히 텅 빈 주위를 둘러보다 흐느낌을 토해낸다. 뒤돌아서서 모자를 세게 내팽개친 그가 절규하듯 외친다. 나 홀로. "언제나 지독하고 가혹한 웃음을 짓는가" 라며 뒤편 하늘을 향해 삿대질한다. 굳은 의지를 표명했던 그 오른손 검지로. 세번째 "아프고," 하며 감내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아픔으로 천천히 무너져내리다가, 마지막 "아파도," 에서 무릎을 바닥에 쿵 내려놓으며 절망한다. 눈을 꾹 감은 채 고독을 짓씹으며 제가 걸어야 할 길을 마주한다. 평소보다 목소리의 떨림이 짙고 길었지만, "콧!대를!" 높이 치켜든 류라노는 "진실하고 강한 빛을 굳게!" 지켜내야 한다며 다시 한 번 검지를 강조한다. 객석을 등지고 걸음을 옮기며 "거친 광야 속에서 이슬 맞으며 잠을 자도" 라고 말하는 그의 뒷모습이 외롭지만 단단하다. "길이-겠↗지" 라며 변주를 넣고, 이대로 앞으로 나아가리라 선언하며 양손으로 모든 의지를 끌어안는다. 홀로.
2막. 목숨 걸고 포위망을 들락날락하는 자신을 향한 르브레의 걱정에 "하여튼 걱정도 팔자야," 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0929 공연에서 "걱정도 태산이야," 라고 했었다. "전쟁터 정말 싫어요," 라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한숨처럼 "나도 싫다," 하고 말한다. 가끔 "나도 정말 싫어," 이렇게 어미를 바꾼 회차도 있었다. 크리스티앙의 이별 편지. 록산한테 편지를 써야한다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흔들리는 눈빛. 품에서 종이를 꺼내며 "마지막 편지," 라는 그의 말에, 류라노가 "내 마지막 편지," 하고 입모양으로 중얼거리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 봤다. 일전에 쓴 재연 후기들 중에서,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에게 마지막으로 건넨 편지는 그가 유언처럼 늘 품에 간직하고 있던 본인의 마지막 편지라는 해석을 남긴 적이 있다. 류라노의 이 디테일이 마지막 편지에 대한 강조점이 되었고, 그리하여 제 마지막 편지를 건네주는 그의 다정한 결심이 한층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끌어안는 모습에 가스콘 대원들은 어우, 하면서 등을 돌리고, 드기슈는 허공에 칼을 휙휙 휘두르며 분노를 표출하는 애드립이 9월 중순 즈음부터 있었다. 전쟁터를 뚫고 온 록산의 기지에 박수를 보내며 "브라보 록산, 정말 대단한," 까지만 하고 "여자야," 라는 대사는 하지 않았다. 코가 왜 이렇게 홀쭉해졌냐는 라그노의 발언에 가스콘 대원들이 일제히 코를 가리는 디테일도 9월 중순부터 생긴 것으로 기억한다. 시상이 떠올랐다는 라그노의 말에 "어후 또 시," 하면서도 웃으며 운을 띄워주는 류라노.
영광을 향해. 초연에서는 시라노와 가스콘 부대가 이끌었던 이 넘버를, 재연에서는 록산이 앞장서서 부른다. 모두가 마차 주변에 몰려들어 용기를 다잡을 때, 시라노만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바라보고 있다. 르브레가 건넨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좋아하다가,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다시 포옹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씁쓸하게 웃는다. 그리고 술병을 든 손을 그들을 향해 축복하듯 들어보인다. 이 디테일은 딱 두 번 봤는데, 이날 류라노의 노선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 넘버에서 시라노는 "오늘 죽어도 기억 속에 영원히 살리라" 합창과 마지막 떼창에서만 목소리를 얹는다. 혼자 무대 안쪽에 서있는 그에게 르브레와 라그노가 다가간다. 라그노가 류라노를 끌어안고 들어올리는 건 이전부터 있었는데, 이날 들어올려진 류라노가 양 다리를 ㅅ자로 쫙 펴는 건 처음 봤다. 하하하- 웃으며 팔다리 합을 맞춰 퇴장하는 두 사람과 그들을 쫓아 성큼성큼 뛰며 따라나가려는 크리스티앙. 록산이 편지 얘기를 꺼내도 너무 놀라지 말라 말해주는 류라노. "더," 하고 말하며 크리스티앙에게 미소를 지어주곤 했는데, 이날은 건조하고 담담한 톤이다. 어떻게 전달했냐는 크리스티앙의 물음에 그제서야 하하, 웃으며 "뭐, 하다보니," 하고 죽음을 넘나들며 쌓아올린 매일매일을 별 것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린다. 하루 또 하루. 완벽한 삼중창 속에 세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포개진다.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 재차 울리는 포화 소리에 몸을 푹 숙이고서는,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라고 중얼거린 류라노는 "어, 드기슈! 드기슈 백작에게 가서 알려!" 라며 크리스티앙에게 지시를 내린다. 큰 소리에 놀라 뛰쳐나온 록산은 위험하다는 시라노의 말에 "위험해," 라고 중얼거린 뒤 크리스티앙이 이상하노라 말한다. "영혼만을!?" 하며 놀란 류라노의 눈빛이 거칠게 흔들린다. "어서, 어서요!" 하며 록산을 들여보낸 시라노는 당혹과 놀라움에 휩싸인 채 "아니야, 아니야," 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수세에 몰린 크리스티앙을 도우려 달려간 시라노는 "아니야!" 하고 절규하며 칼을 휘두른다. "당신을 닮은 그 말투와 눈빛을 아니라 하지마" 라는 크리스티앙 솔로의 반주 음량이 확 줄은 것이 9월 초중순 즈음부터로 기억하는데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갈래의 새빨간 조명이 크리스티앙을 비춘다. 런티앙의 가슴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뜬 류라노가 평소보다 칼을 세게 내던지며 그를 다급하게 끌어안았다. 젊고 아름다운. 안돼, 안돼, 하며 뒷걸음 치는 류라노. 떨리는 손을 들어 성호를 긋지만, 절망으로 얼룩진 영혼은 끝모를 절규를 소리 없이 쏟아낸다. 크리스티앙, 하고 울먹이는 류라노의 마지막 부름. 죽어버린 영혼의 일부.
휘청이며 앞으로 걸어나오던 류라노는, 스페인 군대라는 발베르의 외침에 눈을 번뜩인다. 아직 지켜야 할 것이 남아있음을, 살아야 할 이유가 존재함을 알리는 최후의 전투. 브링미에서 거인들을 향해 내뿜던 선연한 의지가 다시 불타오른다. 깃대를 탕, 내려치며 반드시 승리하겠노라 선언하는 그의 온몸이 처절한 분노와 고통으로 일렁인다. 가스콘맆. "무뎌진 이 발걸음은," 하며 비틀거리는 걸음. "내 심장아," 하며 눈을 꽉 감고 깃대에 묶인 록산의 하얀 손수건을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죽음을 각오한 이들의 마지막 포효는 압도적이다.
15년 전과는 다르게, 시라노가 건네는 모자를 자연스럽게 받아드는 록산의 모습이 두 사람의 관계성을 드러낸다. 낙엽의 마지막 비행을 향해 "비상처럼 우아하길 바라는 거겠죠," 라고 읊조리는 류라노의 말은 본인을 향한 것과 다름없다. 매주 그러했던 것처럼 록산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전하는 마지막 주간소식. 비록 육체는 죽어가지만, 형형한 눈빛은 여전히 번뜩인다. 크리스티앙의, 나아가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손 위에 올린 류라노는, 과거 속에 온전히 박제되어 있던 제 영혼을 다시 마주한다. 지나간 추억이 되어버린 기억을. 안녕 내 사랑. 류라노가 마지막 편지의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입에 올리는 이유는 록산에게 제 마음을 전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첫번째 죽음 앞에서 깊게 묻어버린, 그리하여 15년 간 꺼내보지 않았던 자신의 영혼을 끌어안고 온전하게 제 인생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잠시 안녕," 이라 마지막 인사를 건넨 류라노는, 제 역할을 다한 촛불이 스러지듯 전신의 힘이 탁 풀리며 무너지듯 휘청인다. 한 영혼만을 사랑해왔노라는 록산의 고해에 "오 세상에 록산," 하며 그의 이마에 조심스레 키스한다. "내 코가 보이는가!!" 하는 절규 끝에 "오늘밤 내가 달나라로 들어갈 때," 라고 시작하는 독백 부분에서 "오늘밤" 이라는 단어가 이날은 없었다. 마치 그는 이미 달나라에 들어가 있었다는 듯이. 나홀로맆. 양손으로 록산의 얼굴을 감싸쥐고 "날 할퀴는 사랑도," 하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웃음을 건다. "전쟁과 운명도," 라고 울먹이며 "난 두렵지 않아," 라고 어린아이처럼 발음을 뭉갠다. "이대로 난 앞으로" 하며 록산을 끌어안고, "나아가리, 나아가리" 하며 지팡이를 오른쪽으로 내팽개친 채 오롯이 홀로 선다.
커튼콜에서 왼쪽 오른쪽 정면 2층까지 인사한 류배우님이 다시 양팔을 활짝 벌린 뒤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시는데, 그 표정이 코를 살짝 찡긋하며 먹먹함을 삼켜내는 얼굴이어서 마지막까지 울컥했다. 양손을 입가에 꾹 누른 뒤 객석에 손키스를 날린 류배우님 엄지를 척 내보인 뒤 뒤쪽 달을 향해 뛰어간다. 오른손을 쫙 폈다가 달을 붙잡듯이 주먹을 꽉 쥔 다음 다시 손을 피는 이 사소한 동작이, 마지막까지 달을 붙잡아내려는 류라노의 의지 그 자체여서 더욱 강렬했다. 이렇게 자주, 많이 보면 감흥이 덜해질 만도 한데, 관극마다 눈물을 쏟게 만드는 건 텍스트와 해석의 힘이겠지. 세월이 유수와 같아 재연 막공이 벌써 코앞으로 다가왔다. 모든 순간순간들이 소중했던 만큼, 마지막까지 잘 보내주고 싶다. 초연에서 늘 그러했듯, 재연에서도 커튼콜의 거인을 데려와 넘버를 매번 따라불렀다. 시라노 각 배우들의 막공에서 관객 모두가 소리 높여 함께 부르는 싱얼롱이 예정되어 있어 여운이 한층 깊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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