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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09.29 6시반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자열둘. 류지연런 네 번째 공연이자 자넷.

 

 

가열차게 프랑켄슈타인 회전으로 새로운 경험들을 잔뜩 했던 2018년을 마무리하면서, 2019년 덕질 목표를 하나 세웠다. 류정한 배우님 사인받기. 꿈 정도는 크게 꿔보자 싶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기한을 내년으로 미뤄야겠다 생각하던 찰나,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상황이 도래했다. 사인회라니. 구전설화 정도로만 들어왔던 류배우님의 사인회가 실제로 열린다니. 당첨운이 제로에 수렴하는 스스로를 잘 알면서도 여섯 시간 전부터 공연장에 가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열정은 있었지만 요행은 없었고, 당첨운은 없었지만 인복이 있었다. 너무나 감사한 주변 분들의 선의와 도움 덕분에, 무려 4년 만에 마침내 류배우님의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설렘과 긴장감 때문에 막상 배우님께는 특별한 말을 하지 못했지만, 꿈만 같은 기회로 꿈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무엇보다 류배우님 덕분에 알게 된 소중한 분들과의 인연이 다시 류배우님을 향한 행운이 되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고맙고 행복했다. 일전에 배우님께 드린 편지에 썼던 말인데, 역시 팬은 배우를 닮는다. 나만 잘하면 되니, 더 노력해야지.

 

 

이날 공연은 또 어찌나 좋던지. 사인회도 있으니 감정적으로 동요되지 말고 즐겁게 관극하겠다는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1막 마지막과 2막 마지막부터 커튼콜까지 또 펑펑 눈물을 쏟았다. 모든 언행에 인간을 향한 애정이 짙게 깔려 있는, 타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본인의 아픔을 미처 돌보지 못한, 그리하여 모두에게 사랑과 존경과 미움을 받지만 끝내 가장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낸, 한 사람. 인간이기에 나락까지 무너지고 인간이기에 꿋꿋하게 일어나는 류라노의 걸음 하나하나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지독하게 인간적인 시라노를 향한 동경과 사랑은 죽을 때까지 안고 살리라.

 

 

 

 

※스포있음※

 

 

칼로 펜을 꺾으려는 자들은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 류라노는, 자유롭게 삶을 살아내며 시를 사랑하는 이들을 향해 끝없는 애정을 쏟아낸다. 힘없는 시인들을 위해 기꺼이 거인과 맞서고, 인생을 긍정하며 당당하게 권력과 불의에 맞서는 가스콘 대원들을 자랑스러워한다. 소외된 이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록산을 사랑하고, 화려한 언변은 없지만 진심은 가득한 크리스티앙을 아낀다. 크리스티앙의 뒤를 봐달라는 록산의 부탁에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이 스치더라도,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돕겠노라 미소 짓는다. "이토록 진실한 그대," 라는 록산의 말에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며 잘못 꿰어진 운명을 부인하면서도, 마침내 사랑을 향하는 크리스티앙에게 미소를 보인다. 걱정 말고 다녀오라며 "정말 축하해요," 라고 록산을 축복하는 얼굴에도 다정한 미소를 띄운다. 자신을 염려하는 친구들에게도 씁쓸한 미소로 도리어 위로를 건네며, 류라노는 더 깊이 스스로를 상처 낸다. 위험하지 않게 크리스티앙을 보살펴 달라는 록산의 잔인한 부탁에도 끝까지 미소를 걸어내던 류라노는, 결국 운명을 건넨 하늘을 향해 거세게 삿대질하며 절규를 토해낸다. 왜 신은 내게만 언제나 지독하고 가혹한 웃음을 짓는가. 바란 것은 그저 다른 이의 행복일 뿐이었는데. 끝 모를 절망 앞에서도 류라노는 제 감정을 꾸욱 밀어 넣는다. 스스로 선택하고 믿는 진실하고 강한 빛을 굳게 지켜내야 하기에. 떠오르는 태양만큼 밝은 거대한 달빛과 함께 강렬하게 타오르는 고결한 의지.

 

 

편지에 담긴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고백에 믿을 수 없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이 불안하게 일렁인다. 그러나 당장은 록산의 안위가, 크리스티앙의 무사함이 중요하기에 류라노는 제 마음을 삼키고 거짓을 통해서라도 두 사람을 보호하려 든다. 그 선의를 비웃기라도 하듯 운명은 잔인하고 서늘하게 미소 짓는다. 초라하고 어리석은 절망 따윈 사치라며 산산조각 난 제 심장을 꽉 움켜쥐고, 록산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유일하게 남은 영혼의 파편을 힘껏 끌어안는다. 부서진 마음은 애써 깊이 묻은 채, 류라노는 한결 같이 자상하고 따뜻하게 록산의 곁을 지킨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제 영혼과 재회하면서도, 끝까지 록산을 위해 미소 지으려 애쓴다. 영혼이 새어나가는 거친 날숨을 길게 두 번 토해내며, 아주 잠시 안녕이라 작별을 고한다. 크리스티앙을 위한 눈물 중 그저 한두 방울 만을 남겨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따스하다. 세상에 록산, 하며 떨려오는 음성은 고귀한 사랑을 향한 마지막 작별인사를 건넨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되지. 그렇지. 예의를 차려라, 시라노."

 

 

자, 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류라노. 죽음의 신을 마주하며 제 이름을 호명하는 디테일은 0926 공연부터 생겼는데, 이 짧은 문장 하나에 류라노의 인생 자체가 담긴다. 끝없이 스스로를 북돋우며 살아낸 삶. 회복이 불가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영혼을 기꺼이 끌어안은 채, 싸워야 할 적들을 똑바로 응시하며 콧대를 높이 치켜든 의지. 희망이 없을 때 싸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전사의 태도이기에, 류라노는 무너지려는 의지를 다잡듯 자, 하고 재차 힘을 끌어모은다.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거인이든 죽음이든 다 데려오라는 절규에 가까운 단언. 힘에 겨워 울먹이면서도 끝까지 맞서 싸우는, 지독히도 인간적이고 절박할 만큼 처절한, 그렇기에 그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숭고한 그 마지막. 얼룩 한 점 티끌 한 점 없는 자신의 영혼을 끌어안은 채, 류라노는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휩쓰는 축포에 둘러싸여 달나라로 향한다. 마지막 숨을 내뱉는 그 순간까지 포기도 타협도 안주도 하지 않은 이 영혼을 배웅하는 마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인간이기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인간이기에 그 고통을 딛고 나아갈 수 있음을, 류라노가 걸어온 길을 보며 절감한다.

 

 

 

 

문장으로 엮어내기 벅찬 이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없어 그저 속상하다. 이날의 엔딩씬을 되짚어 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전율에 눈물이 차오른다. 류라노를 마주하며 느끼고 감탄하고 통감하며 공감한 모든 감정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못하리라. 이 모든 찰나들이 모이고 누적되며 나 자신의 영혼을 풍성하고 깊이 있게 만들고 있다. 류라노의 말에 공감하고 그의 행동에 동의하며 그 영혼에 물들어갈 수 있는 이 순간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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