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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09.26 8시
류정한 시라노, 나하나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자열하나 관극. 류하나용한 페어 세번째 공연이자 페어막. 페어 전관. 용티앙 자막.
류배우님에게는 공연의 시즌 중후반 쯤 평소 노선들과는 완전히 결이 다른 극강의 노선을 취하는 일종의 루틴이 있다. 이날이 그러했다. 첫 대사부터 이전 회차들과 차이가 났고, 모든 넘버들에 성악톤의 웅장하고 공간감 가득한 울림이 들어갔다. 특히 록산 넘버는 완벽하게 달랐다. 연기도 발성도 톤도 전부 다. 1막 초반은 다른 배우로 다른 극을 보고 있는 듯한 새로움에 얼떨떨할 정도였다. 평소라면 변화와 변주의 신선함에 관극 내내 느낌표를 띄우며 행복해했을텐데, 이날은 물음표가 먼저 튀어나오며 몰입을 방해했다. 물음표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따라붙었으나, 의미부여와 공감의 미묘한 간극은 즉시성이 강한 무대의 호흡을 깨뜨렸다. 장면들이 잘 이어지지 않고 흐름이 끊기는 느낌이어서 전반적으로 아쉬웠다. 물론 이날 공연을 무척 마음에 들어한 관객들도 많은 것으로 안다. 같은 극을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보더라도 사람마다 감상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이 예술을 사랑한다. 이날처럼 혼란스러운 날이 있을지라도.
소소한 실수들과 엇나간 타이밍들이 적지 않아서 더 집중이 안된 것도 있다. 이 정도로 들떠 있는 분위기는 하루 쉬고 온 화요일 공연에서 자주 만났었는데, 이번엔 무슨 일이었을까.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보완이라도 하듯, 추가된 디테일이나 특정 장면들의 깊이감이 남달랐다. 그러나 평소라면 어떻게든 잘 풀어냈을 극 전체의 노선이 이번에는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음을 잘 알기에, 담백하게 디테일만 기록하는 선에서 후기를 정리해야겠다.
※스포있음※
록산의 가정교사 샤를이 전한 말에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인 류라노는, 평소처럼 몸을 살짝 틀어 객석을 향해 정면으로 서지 않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편이 훨씬 자연스럽기도 하고 르브레와 라그노가 코를 만져보려는 동작이 잘 보여서 좋더라. 두 사람의 호들갑에 평소에는 에이, 아니야 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쁨에 어쩔줄 몰라했던 것과 다르게, 이날은 웃지 않았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듯 굳어버린 표정으로 당황스러워 하며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어갔다. 넘버 중간에 난입한 라그노에게 쉿, 하고 조용히 시키던 평소와 다르게, 이날은 한 손을 들어 단호하게 그를 제지했다. 록산 넘버 가사의 서사에 맞춰 점차적으로 희망과 기쁨이 피어오르는 감정선이 무척 좋았다. 게다가 초반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가늘고 여리게 떨리는 음성을 담았던 이전과는 다르게,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성악 발성으로 묵직하게 불러서 새로웠다. 마지막 손키스도 조심스럽게 허공에 얹어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살짝 던지듯이 훅 날려보냈다.
패스트리와 시. 중간에 지나갈 때, 유난히 양팔을 몸에 딱 붙이고 눈을 이글거리면서 열정적으로 글자를 적어내려갔다. 거인을 데려와. 안쪽으로 걸어간 뒤 회전무대 위에 서야하는데 한걸음 정도 더 내딛었다. 그래서 회전무대가 돌아가기 시작할 때 탁 뛰어 제자리를 찾아갔다. 누군가. 제 말을 읊는 록산의 양손 동작을 따라했다.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라는 록산의 말에 작게 "괜찮아요," 라고 중얼거렸다. 2막 페어웰에서 그러하듯이. 가스콘. 양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드기슈를 지켜본다. 반주가 시작되고 대사 타이밍이 살짝 늦어서, "생각 좀 나게 해드려요" 하고 말한 뒤 "예?" 하고 소리치는 걸 안했다. 무대 가운데에서 하하하하, 하고 크게 웃고, 군무 뒤에 호오오, 하고 추임새 넣고, 마지막 부분에서 재차 하하하하 크게 웃었다. 끝나고 드기슈에게 침 뱉었고.
코그로에서 슬금슬금 매너다리를 한 용티앙이 이름을 밝히자 깜짝 놀라 주변 눈치를 보더니 그를 끌어올려 똑바로 서게 했다.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살짝 감싸안으며 환영하네, 하고 말한 뒤 제자리로 돌아간다. 잽싸게 코를 가리며 하하하하 웃음 선창을 한 르브레가 크리스티앙에게 눈치를 주는 디텔을 처음 봤다. 관극할수록 호중르브레가 눈에 들어온다. "어쨌든 그곳엔!!" 하고 이어가며 "환희에 찬 내 심장은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라고 끝까지 대사하는 부분이 있다. 이날 "내 심장은!!" 까지 하고 용티앙이 끼어들까 눈치를 보다가 잠시 텀을 두고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라고 바꿔서 말했다. 코옹닥 코옹닥, 하는 용티앙의 말에 "그럴 수 있지 뭐. 신참이잖아." 하고 이어나간다. 용티앙의 오른뺨을 툭툭 치며 대단히 잘생겼어! 하고 감탄한다. 완벽한 연인. 띠링, 하고 효과음이 나오고 잠시 텀을 준 뒤 바로 반주가 나올 때 대사를 해야 하는데, 이날 엠알이 빨리 나와서 가사가 싹 날아갔다. "달콤한 말재주!" 하는 디테일은 작게 했지만, "빌려주겠네! (뭐를요?) 얼굴 빼고 다!" 하는 부분이 생략되어 아쉬웠다.
록산 집 앞에서 좀 자연스럽게 하라는 구박에 용티앙이 한차례 더 자세를 취하자, 류라노는 됐어 됐어 하며 그를 끌어당겼다. 마침내 사랑이. 오블이어서 류라노 표정이 아예 안보였다. 덕분에 하나록산 표정을 꼼꼼하게 볼 수 있었는데, 넘버 가사에 맞춰 변화하는 감정이 무척 좋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진다면 좋겠어," 라는 가사에서 류라노가 아파하며 고개를 뒤로 젖히며 록산네 집에 기대는 디테일은 매번 있다.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티앙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 류라노.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가사에 맞게 구조물을 오래오래 쳐다보는 디텔 계속 해주셔서 좋다. 라그노가 찰빵궁합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다시 구조물 앞으로 걸어가 씁쓸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이었다. 드기슈의 편지를 읽은 류라노는 록산에게 다녀오라고 말하며 "축하해요," 라고 덧붙였다.
달떨나. "너 지구인!" 하면서 드기슈에게 몸을 디밀고는 삿대질을 하며 "모쌩긴 지구인!" 이라 강조했다. 나홀로. 울음을 토하기 보다는 고통에 짓눌린 비통스런 신음을 쏟아내며 객석 쪽을 향해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휘휘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신경질적으로 모자를 내팽개치며 넘버를 시작한다. 뒤돌아서 무대 안쪽의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는 디테일이 류라노와 잘 어울렸다. "아파도," 하고 무너져내리며 심장께를 꽈악 붙든 채 눈을 질끈 감고 숨을 멈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나아가리, 하며 달을 그리듯 동그랗게 팔을 움직이는 동작도 좋았다.
2막. 영광을 향해. 드기슈가 정체를 밝히라고 말하자 "밝히지 못하고 있군," 이라 말하는 대사는 잘 이해가 안간다. 드기슈의 이 대사는 1막 나의 코 넘버 직전의 발베르 대사와 이어진다. 그래서 광호발베르가 22일이나 이날처럼 "정체를 드러내라!" 라고 하지 않고, 다시 처음처럼 "정체를 밝혀라!" 라고 해주면 좋을 것 같다. "브라보 록산! 정말 대단한 여자야!" 하며 사람들의 박수를 유도하는 초연 디테일은 좋아하지만, 바로 이어서 록산에게 다가가며 "록산 여긴 너무 위험해요," 라고 말하는 것도 약간 의아한 부분이다. 류라노가 드기슈에게 함께 하시겠냐 물으며 품에서 꺼내는 스카프가 유난히 우아하고 멋지게 펄럭여서 기억에 남았다. "하루 또 하루," 라고 넘버를 시작하며 회전무대의 경사면 왼쪽으로 걸어올라가는 동선은, 1막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넘버에서 잔인한 영광을 입에 올리며 걷던 동선과 일치한다. 재연 시라노 연출을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렇게 장면을 뛰어넘어 포개지는 구성이 많다는 점이다. 이런 연출을 나열하는 것으로 후기 하나를 꽉 채울 수 있을 정도인데, 나중에 여력이 되면 정리해봐야겠다.
탕, 총소리가 나자 마주한 크리스티앙 얼굴을 응시하는 눈빛이 순간적으로 얼어붙는다. 그대로 천천히 내려가는 시선 속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현실을 마주하는 그 표정이, 찰나임에도 지나치게 생생하여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일렁이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 부분부터 가스콘맆까지 어마어마하게 좋았다. 가스콘맆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깃대를 거의 떨어뜨릴듯 축 내려서 위쪽 끝이 바닥에 살짝 닿았다. 내 심장이라며 록산의 손수건을 끌어안는 디테일을 포함하여, 심장께를 고통스럽게 부여잡는 부분이 아주 많았다. 평소처럼 동작 하나하나를 꾹 눌러담듯 성호를 긋고서는, 그대로 제 손등을 입가에 가져가 꾹 키스했다. 엔딩 장면에서 한 영혼만을 사랑해왔노라는 말을 듣고 "세상에 록산," 하며 그의 왼쪽 손등에 꾹 눌러 담는 키스와 똑같은 동작으로.
내 친구 달을 반가이 맞이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하나의 인간. "예의를 갖춰야지, 시라노" 하고 말하면서 지팡이를 집어들고서는 평생을 맞서 싸운 거인들을 나열하며 울부짖는다. 용감하게 모든 불의와 맞서 싸웠던 그는, 마지막을 앞에 두고 인간답게 파들거린다. 겁에 질린 얼굴로, 그러나 한치의 물러섬 없이 끝까지 두 다리를 딛고 서있는 사람. 얼론맆에서 무너지듯 기대며 록산을 끌어안은 채 노래를 이어간다. 독백에서 "희망이 있을 때만 싸우는 게 아니다," 하는 부분에서 "희망이 없을 때만 싸우는 게 아니다" 하고 틀리게 말해버린 건 조금 아쉬웠지만.
덕질을 함에 있어 매번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시는 류배우님이, 또다른 기억을 남겨주셨다고 생각한다. 불호를 매끈하게 다듬어낼 여력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일요일에 만날 류라노는 어떠한 모습일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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