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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09.22 2시
류정한 시라노, 나하나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류라노 재연 열 번째 관극. 류하나용한 페어 둘공이자 세미막이자 자둘. 처음부터 끝까지 물 흐르듯 막힘없이 진행된 공연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다듬어낸 평소의 노선에 황홀할 정도로 풍성한 음색이 더해지니 가히 완벽한 공연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0919 가 정말 마음에 들었지만, 0922 공연은 반론의 여지없는 훌륭한 공연이었다. 재연 들어 처음으로 오피석에 앉아본 터라, 뒤쪽에서는 세세하게 보기 어려웠던 류라노의 섬세한 표정들에 집중했다. 무대 저 안쪽에서도 디테일하게 표정 연기를 하고 있는 류라노를 보며 그저 극 자체에 한껏 빠져들어 이야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단 두 번이었지만 너무나 감사했던 커튼콜데이의 결과물들이, 이 무대가 꿈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며 한껏 생명력을 뽐낸다. 류배우님의 공연을 마주할 수 있고, 류배우님을 향해 맘껏 애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이 순간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더없이 행복하다.
※스포있음※
평소처럼 자잘하고 세세한 후기를 쭉 남기다가 문득 류라노의 이 디테일이 좋고 저 디테일이 사랑스럽다는 문장들 뿐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 날리고 핵심만 추린다. 록산이 키스한 손등을 내려다보며 그대로 일어나 객석을 등지는 류라노. Alone 반주가 흐르는데 오른쪽으로 고개를 크게 돌리더니 그대로 객석을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려 반대쪽까지 휘 둘러봤다. 아득한 절망에 휩싸여 끝 모를 암흑에 사로잡힌 듯, 흔들리는 동공이 초점을 잃고 어지러이 헤맨다. 그대로 다시 반 바퀴를 돌아 객석을 향해 선 류라노가 그대로 모자를 내팽개치며 "왜 신은 내게만!" 하고 넘버를 시작한다. 우아한 깃털 장식이 달린 모자를 내팽개치는 찰나의 표정을 늘 궁금해했었는데, 이날 명확하게 시야 가득 담을 수 있어 너무나 행복했다. 심장을 짓이기는 슬픔을 고통스럽게 짓씹으며 무너지는 류라노의 온몸에서 절규가 흘러넘친다. 그 모든 감정을 꾸역꾸역 제 안으로 주워 담으며, 지친 얼굴에 비통함을 가득 실은 채 힘겹게 입을 뗀다. "아무도 없는 이 길," 하고 시작하는 순간 무대가 어두워지고 뒤쪽의 푸른 밤을 배경으로 가스콘 부대가 일렬로 진군하는 실루엣이 펼쳐진다. 군중 속에서 가장 외로운 시라노의 고독을 드러내는 이 연출은, 2막 마지막 독백 장면에서 조명이 푸른색으로 바뀌고 수녀들이 일렬로 이동하는 연출과 포개진다. "기꺼이 맞서리라," 하고 "홀로," 하고 깊은 한숨처럼 묵직하게 찍어 누르는 목소리. 콤플렉스이자 모든 고통의 근원인 "콧!대를"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들며 눈을 번뜩인다. 굳게 지켜내야 하는 "진실하고 강한 빛" 을 이야기하며 꽉 쥔 주먹이 부들거린다. 아무리 운명이 잔혹해도 끝까지 나아가리라 다짐하는 그를 끌어안듯 커다랗고 동그란 달이 태양처럼 밝은 빛을 쏟아낸다.
록산도 크리스티앙도 진심으로 아낀 이 인간적인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끝 모를 슬픔과 절망에 턱 막혀오는 심장께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공간을 가르는 류라노의 허망한 목소리. 그토록 달을 동경하고 사랑하던 류라노는 "텅 빈 눈에 저 달빛이 사실 조금 두려운가," 라고 자조하듯 고해한다. 갈 곳을 잃은 망연한 눈빛에 아픔과 고통과 공포와 아득함이 서린다. 그러나 그는 안다. 자신을 괴롭히는 운명이 어떠한 놈인가를. "초라하고 어리석은 절망" 을 입에 올리며 회색빛으로 꺼져가던 목소리가, "사치라" 는 단언과 함께 굳건하고 강렬한 마지막 불꽃을 살려낸다. "자! 오만한!" 하고 죽음을 부르는 류라노의 절규가 마치 피를 토하듯 날 선 음색으로 공기를 가른다. 록산이 묶어준 하얀 손수건을 "내 심장" 이라 호명하며 매달리듯 꽈악 끌어안는다. 이젠 절대 밝힐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오직 그의 행복을 바랐으나 끝끝내 이루지 못한 절망을, 결국 이렇게 어긋나 버린 운명을. 류라노는 제 모든 걸 완전히 불살라 재로 만든다.
나의 코. 발베르가 "정체를 밝혀라!" 라고 외치면 시라노가 "못 밝히겠는데요. 극장 공기가 너무 추잡해서요." 하며 악취가 난다는 듯 코 앞에서 손을 흔들거린다. 그런데 이날 발베르가 "정체를 드러내라" 라고 말해서, 류라노도 그 대사에 맞춰 "못 드러내겠는데요," 라고 응대했다. 터치. 드기슈가 칼을 뽑아 들면 제 칼자루를 붙들고 과장스레 덜덜덜 떠는데, 이날은 칼을 쥐고 여러 번 몸을 흔들다가 손을 떼고 허공에서 한차례 더 덜덜덜 떨었다. 패스트리와 시. 에헤이~ 하면서 거절을 거절하는 장면에서 이날 류라노는 입을 털듯이 움직이며 한층 과장스럽고 유쾌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왼쪽 시인에게 가서 한차례 더 크게 입을 크게 푸우우, 해 보이며 장난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라그노에게 쪽, 뽀뽀해주고 반주 박자에 맞춰서 어깨를 흔들며 퇴장하는 뒷모습이 여전히 귀엽다. 몸을 살짝 숙였다가 잽싸게 라그노의 손에서 제 글을 되찾아오는 것도 역시 좋았고. 경고장을 찢는 건 이날도 초반 회차들처럼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말이지" 부분이었다. 거인을 데려와. "자유로운 불꽃처럼 독수리 날개짓처럼" 하는 부분을 0919 처럼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자리에서 불러주셔서, 표정을 정면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어 행복했다. 미지의 운명을 향해 어서 오라는 손짓과, 뿌연 영상이 피어오르는 무대 안쪽을 향해 가득 벌리는 양팔도 지난 회차와 동일했다. "맞서리라" 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고 양손을 모았다가 마지막 음에서 양팔을 허공으로 확 펼치는 자세를 정말 좋아한다. 객석의 박수가 잦아들면서 무대 안쪽에 일렬로 선 백명의 장정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번뜩이는 류라노 눈빛이 몹시 선명하게 보여서 새삼 설렜다.
벨쥐락의 여름. 검술을 배운다는 록산의 말에 항상 "우와~" 하고 감탄했는데, 이날은 "이야~" 하고 놀라워했다. 누군가. 고백을 시작하기 전 "시작하세요," 라고 하는 디테일과, 고백이 끝날 즈음 모자를 다시 쓰는 디테일이 고정됐다. 가스콘. "낮일도 밤일도" 하며 손을 아래쪽으로 내리는데, 이날 초연처럼 살짝 골반도 돌렸다. 요새 넘버 중간에 "호오~" 하고 추임새 넣는 걸 안 하시는데, 아무래도 0919 부터 음향이 좋아진 영향이 아닐까 싶다. 자리를 뜨는 드기슈의 등 뒤에 대고 퉤, 하고 침 뱉는 디테일도 거의 고정됐다. "저게 미쳤나," 하며 뛰어내려 가는 류라노가 크리스티앙 옆에서 까치발을 드는 디테일과, 그에 맞춰 슬금슬금 무릎을 굽혀 매너다리를 해주는 용티앙 디테일이 무척 귀엽다. 크리스티앙의 두 번째 코그로에, "그럴 수 있어, 응" 하고 말하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이었다. 모두를 쫓아보내고 우씨, 하며 두 번 칼을 허공에 대고 휘두르는데, 이날은 두 번째로 흔들기 전에 멈칫하고선 칼을 집어넣고 양팔을 벌렸다. 록산의 집 앞에서 크리스티앙에게 "좀 자연스럽게 안되니," 하며 투덜거리는 건 이날도 했다.
그의 입술에 닿은 나의 이야기.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가사를 록산의 집 앞 구조물 앞에서 부른 뒤, 천천히 회전무대 경사면으로 이동하는 동선도 고정됐다. 눈물자국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오피석이어서 감정 몰입이 한층 깊고 강했다. 달에서 떨어진 나. 빵가면의 형태를 보고 짜증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뒤집어쓰고 쪼그려 앉는다. 이날은 관자놀이에 양 검지를 바로 올려놓지 않고 손을 오므린 채 있다가, "삐리빠라," 하고 고개를 들면서 검지를 쫙 폈다.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나는 귀여운 디테일은 동일했다. 빨리 지나가라며 록산과 크리스티앙에게 손짓하는 위치가 이날은 무대 한중간이어서 몹시 가까웠다. 이어서 "보내달라, 달나라로!" 하는 가사가 있는데, 이날 류라노가 "보내달라, 달!" 까지만 불러버려서 순간적으로 반주 없이 정적이 흘렀다. 하필 반주 없이 음성만 있는 부분의 가사를 빠뜨려서 실수가 티 났다.
죽음은 언제나 부담스럽고 불편하게만 느껴지지만 어느새 부자연스러운 일부로 존재하게 된다면서 "이 코처럼 말이야," 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한동안 코를 가리키지 않았는데, 이날은 코를 가리켰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그렇고, 코라는 콤플렉스를 늘 안고 살아온 시라노였다. 크리스티앙의 이별 편지. 좋은 생각만 하라며 크리스티앙을 북돋아줄 때 보통 "기분 좋아지지?" 하고 묻기만 하는데, 이날은 용티앙의 등을 쓰다듬고는 그대로 손을 얹은 채 그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럼 나한테 말해봐" 하면서 하늘의 별을 응시하며 크리스티앙의 말을 듣는 류라노의 표정이 복잡한 감정으로 차오른다. 영광을 향해.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포옹하는 모습에 걱정을 담아 자신을 돌아보는 르브레의 눈길을 피하며 손에 든 술병을 한 번 더 들이켰는데, 이날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걸면서 왼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그들을 향해 높이 치켜들어 보였다.
안녕 내 사랑. 종이 위의 글자에서 피어오르는 짓눌린 기억들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던 류라노는 록산의 절규 같은 목소리에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면서 "그건 내가 아니었" 노라 속삭이지만, 이미 진실을 알아버린 록산은 고통스럽게 자신을 사랑한 건 그대였노라 외친다. 의자에 몸을 푹 파묻은 채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라고 재차 부정하지만, 록산은 그 말을 듣고 있지 않다. 편지를 그를 향해 들어 보이며 "그 피는 크리스티앙의 것이었으니까!" 라고 절규하는 류라노는 "이렇게 마주쳐버린 운명" 을 비명처럼 쏟아낸다. 다 죽어가는 색색거리는 숨을 토해내며, "아주 잠시 안녕" 을 고한다. 오직 한 영혼만을 사랑해왔고 그게 바로 당신이었노라 말하는 록산의 말에 "세상에, 록산" 하는 디테일은 0914 공연과 이날 봤다. 나 홀로 맆. 꺼져가는 생명력을 끌어모아 마지막까지 거인과 맞서는 류라노의 마지막 독백. 동공에 힘이 풀리며 맥없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는 마지막 모습이 갈수록 극적이다.
초연 시라노도 이런저런 이벤트가 많아서 즐거웠는데, 재연 시라노는 커튼콜데이에 ost에 영상집에 사인회까지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하다. 들고 있는 표가 고작 네 장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 모른다. 끝이 보이는 만큼 매 회차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순간순간을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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