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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19.09.19 8시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류라노 재연 자아홉. 류지연런 페어 삼공이자 자셋. 초재연을 통틀어 21번째로 만나는 극임에도 유난히 새로운 느낌이어서 공연 내내 많이도 울었다. 록산 넘버부터 1막 내내 울고도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2막 시작하기도 전부터 또 줄줄 눈물을 쏟았다. 커튼콜데이 덕분에 폰을 들고 영상을 찍기 시작했으나, 환호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 좋은 공연이었기에 평소처럼 큰 함성을 쏟아냈다. 무대 위 류배우님을 직접 렌즈에 담을 수 있기까지 했던, 본공과 커튼콜까지 온전히 행복한 관극이었다.

 

 

※스포있음※

 

 

장난기가 넘실대는 눈을 빛내며 가볍고 유쾌한 태도로 오만과 위선, 거짓과 편견들을 비웃는 이날의 류라노는 몹시 어렸다. 직전인 0914 공연은 평소보다 묵직함이 강했기에 이날의 류라노가 한층 더 발랄하게 느껴졌다. 칼에 쥐가 났다며 덜덜덜 칼을 과장스럽게 흔들 때 좌우로 스탭을 한차례 더 밟으며 조롱의 강도를 높였고, "와우" 라고 내뱉는 감탄사도 자신감을 기반으로 상대를 꾹 짓누르는 강세가 달랐다. 세상의 모든 이들 앞에서 당당한 시라노지만, 록산만큼은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고귀한 대상이다. 생각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 혹여 누라도 끼칠까 봐 제 성정마저 누른 채 조심스럽게 행동하게 만드는 사람. 행복이 뚝뚝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한없이 설레는 마음을 담아내는 록산 넘버가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조심스럽게 전하는 손키스마저 애틋하여 자꾸 마음이 일렁였다.

 

 

발랄한 걸음걸이로 나온 류라노는 어깨를 부드럽게 들썩이며 르브레에게 장난치다가 라그노의 부인에게 돈주머니를 건넨다. 류라노가 입가 옆에 쪽, 소리를 내며 뽀뽀를 해주자, 라그노는 부끄러워하며 "위대한 전사에게 뽀뽀를 받다니" 라는 애드립을 했다. 패스트리와 시 넘버에서 부인 역의 장예원 배우가 시에 대한 편견에서 점점 멀어지는 과정을 잔망 넘치는 표정과 동작들로 표현해줘서 자꾸 눈길이 간다. 깃펜 끝에 침을 묻히며 열심히 뭔가를 끼적거리던 류라노는, 라그노가 제 글을 빼앗아가자 타이밍을 잡다가 몸을 푹 숙이고선 날쌔게 되찾아온다. 삼행시나 마저 쓰라며 "마카롱의 마!" 라고 외치는 대사는, 2막 전쟁터를 찾아온 라그노에게 "마!" 라고 마들렌 운을 띄워주는 목소리와 겹쳐진다.

 

 

 

 

경고장으로 흉흉해진 빵집 분위기에 류라노는 무슨 일이냐 묻고선, 시인 한 명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내가 맡을게" 라는 식으로 말해준다. 이날은 초반처럼 "이 들뜬 마음을 잠재우기엔 말이지!" 하면서 편지를 찢었다. 거인을 데려와. 도입부는 보통 르브레에서 시작해서 라그노와 그 옆의 시인들에게 일일이 눈을 맞추곤 했는데, 이날은 라그노를 토닥이고 금세 객석을 향해 몸을 돌려서 얼굴이 잘 보였다. 무대 정가운데에서 부르던 부분을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위치에 서서 진행했는데, 앉은 좌석 시야의 정면이라 좋았다. "미지의 운명이여!" 하고 부르고서는 씩 웃으며 "어서 오라," 하고 손짓한 류라노는, 그대로 오른팔은 무대 안쪽으로 왼팔은 객석 쪽으로 쫙 펼치며 마치 환대하듯 양팔을 크게 벌렸다. 모든 거인들을 향해 어디 한 번 덤벼보라 도발하는 자신만만함이 강하고 선명한 만큼, 운명 앞에 꺾이고 좌절하는 낙폭이 더욱 깊고 묵직했다. 그럼에도 절망을 꾹 밀어 넣고 기어코 일어선 류라노는 또다시 양팔을 벌린다. 자신감과 의지를 담은 이 자세가 장면마다 유난히 자주 반복되면서 이날 류라노의 노선이 보다 견고해졌다.

 

 

반짝이는 눈으로 록산을 바라보는 류라노는 마치 소년 같았다. 버터나이프를 슉슉슉 휘두르며 자신을 지켜주던 록산을 "아주 오래전부터" 동경하고 사랑해왔던 류라노는, 그 마음을 전해볼 용기도 기회도 없이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간다. 편지가 뚝 끊긴 것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 소중한 벨쥐락의 여름은 자연스럽게 지나간 과거로 아득히 멀어져 버렸다. "웃고 울며 함께한" 추억들을 "아름다운" 이라는 형용사로 호명하는 록산의 말에 류라노는 얼굴 가득 기쁨을 담는다. 답신의 편지를 꺼내기 직전에 모자를 다시 쓰는 건 지난 공연부터 고정된 듯하다. 이날도 모자를 쓰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품에서 편지를 꺼내 소중히 키스를 했다. 양손을 번갈아 강조하며 "사랑보다 강렬한, 아름다움보다 진실한," 이라 얘기하는 록산의 손동작을 똑같이 따라 하는 디테일도 지난 공연부터 했다고 기억한다. 왜 나한테 고백을 했냐는 물음에 가스콘 부대 이야기를 꺼내는 록산의 모습에, 류라노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러 온 게 아닌데, 하는 얼굴로 "그 친구 뒤를 좀 봐달라구요?" 하고 진의를 짚어낸다. 그러나 그는 록산을 사랑하기에 대수롭지 않은 척, 가볍고 시원스럽게 약속한다. 이 약속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지 미처 예상하지 못하고.

 

 

위풍당당한 가스콘 부대의 대장은 거리낌 없이 권위와 힘으로 약자를 찍어 누르려는 자를 비웃는다. 돈키호테 이야기에 "풍차의 날개가 달나라까지 날 날려줄 수도 있지요," 하고 능글맞게 대꾸하고서는, 끝까지 몸조심하라 경고하는 드기슈의 뒤에 대고 퉤, 하고 침을 뱉는다. 백 명과 맞서 이긴 무용담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괜히 사양하지만, 그 겸손은 금세 사라진다. 마치 구연동화를 읽어주듯 실감 나게 어젯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끼어드는 목소리. 미쳤나, 하고 중얼대며 탁자를 뛰어내려 가지만, 귀에 익은 이름에 눈에 띄게 당황한다. 크리스티앙 드 뇌빌, 하면서 더듬거리자 런티앙은 성큼 다가서며 "네, 뇌빌레트입니다" 하고 강조한다. 우씨, 하며 두 번 크게 휘두른 칼을 집어넣고서는 "안아주게," 하고 어서, 하며 크리스티앙을 끌어안는다. 그에게 "얼굴 빼고 다" 빌려주겠노라는 약속 또한, 그저 선의이자 호의일 뿐이었다. "아름다운 대리인" 의 뒤에 숨어 "달콤한 말재주" 를 뽐내는 것이 어떠한 결말로 치닫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한 채.

 

 

크리스티앙의 모자와 망토를 뒤집어쓰고 직접 대화를 나누게 된 류라노는, 당신의 진심이라면 어떤 말이든 좋다는 록산의 말에 요동치는 심장께를 꼭 부여잡는다. 이날 "나의 천사 나의 꿈 내 영혼의 숨결 같은 그대여" 라는 찬사는, 아주 어릴 적부터 류라노가 마음속으로 이미 수백 번도 더 불렀던 호칭 같았다.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음성에 얹어 불러보는 사랑의 말. 함께 추억을 나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류라노는 여전히 어리고 수줍고 반짝거렸다. "그대 그 미소가 날 살게해요" 라는 말 역시 오래전부터 품에 안고 살아온 마음이자, 썸원에서 록산이 "그이의 미소는 내 영혼을 위로해요" 라고 했던 말과 맞물린다. 영혼을 공유하는 두 사람의 언어는 유사하게 반복되고 포개진다. 록산의 답가에 불안함으로 흔들리던 류라노의 눈빛은 점차 기쁨으로 차오르지만, "왜 몰랐던 걸까," 하는 말에 완전히 망가진다. 이전 공연들에서는 완벽한 꿈이 산산조각 나며 차디찬 현실로 되돌아왔다면, 이날 류라노는 어, 이게 아닌데, 하는 당혹스러움이 앞선 얼굴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준 것이 어떠한 길로 이어질지 까맣게 몰랐던 류라노는, 비로소 깨닫는다. 오랫동안 제 언어에 담아 소중히 간직해온 제 마음을, 이제는 제 모습으로 직접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입술을 떠난 영혼의 고백은 열매를 맺어 더 이상 제 것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계속 그래 왔던 것처럼 록산을 위해 제 감정을 죽이고 자신을 희생한 류라노는, 절박하게 드기슈를 붙잡으면서도 처절하게 제 감정을 드러낸다. 끝내 록산이 바라던 바를 이뤄주었건만, 운명은 또다시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만다. 비틀거리는 록산에게 바로 달려가지 못할 정도로 망연하게 서있었지만, 그를 위해 잔인한 부탁에도 고개를 끄덕인다. "날 살아 숨 쉬게 하는 단 하나의 운명" 을 입에 올리는 록산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류라노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괴로움에 파들댄다. 짙게 울리는 흐느낌 속에 흘러내리는 절망. 이날 류라노는 Alone 에서 이미 영혼의 일부가 죽어버렸다. 감히 사랑이라 불러보며 진심으로 마주했으나, 잔인한 운명은 기어코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린다. "내가 선택하고 굳게 믿는 진실하고 강한 빛을" 입에 올리며 눈을 번뜩이고, "굳게!" 하며 꾹 누르듯 오른쪽 검지를 바닥을 향해 가리킨다. 짙고 어둡게 빛을 가리던 구름이 점차 흩어지고, 마치 태양처럼 밝고 환한 달이 온전한 자태를 드러낸다. 유약하지만 굳건한 인간을 품 안 가득 채우며.

 

 

 

 

2막 첫 넘버 중에도 그 넘버가 끝나고 나서도, 시라노는 품 안의 편지를 꺼내 읽어본다. 초연부터 가끔 궁금했던 질문이 있다. 록산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크리스티앙에게 자연스럽게 안주머니에서 꺼내 건네는 편지는 대체 언제 쓴 것인가? 매일매일 쓰고 부친 편지들 중에서도 하필 '마지막' 이 된 그 편지가, 록산의 집 앞에서 건넨 최초의 고백과 동일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건 우연이라 생각해야 하는가? 재연에서는 커다란 전투를 앞에 두고 있다는 상황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마지막으로 쓴' 편지라는 개연성을 남기긴 했다. 그런데 이날 류라노의 노선은, 새로운 해석을 하게 만들었다. 그건 바로 시라노가 이미 다 작성해두었으면서도 전쟁 내내 가슴에 품은 채 부치지 않았던 편지라는 것이다. 마치 유언장인 것처럼, "어느새 부자연스러운 일부로 느껴지" 는 죽음을 대비한 시라노 본인의 마지막 편지.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 죽음을 뿌리치고 달려와 그 편지를 록산 앞에서 읽은 것이다. 한참 전부터 준비해왔으나 "엉망진창인 죽음" 앞에서 비로소 제 입으로 전할 수 있게 된 마지막 편지를.

 

 

그 소중한 편지를 선뜻 크리스티앙에게 건넨 것마저 류라노 다운 행동이어서 마음이 찢어졌다. 록산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지만 그를 "품에 가득 안" 을 수 없음에 자조하면서도, 전쟁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크리스티앙을 위해 기꺼이 편지를 건네주는 따뜻함이 무척 인간적이다. "편지에 담긴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말을 직접 듣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크리스티앙에게는 록산에게 진실을 이야기했다며 거짓으로 그를 보호하려 든다. "미친 듯 요동치던 마음" 은 크리스티앙의 죽음이자 자신의 마음을 전할 방법의 종언 앞에서 깊이 침잠한다. 절반 넘게 불타버린 가스콘 부대의 깃발을 직접 들고 "최후의 전투" 앞에 맞선다. 깃대를 바닥에 쾅, 내리치는 동작도 평소보다 많았는데, 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팡이를 바닥에 쿵 내리찍는 습관으로 이어졌다. 위에서 언급한 양팔을 벌리는 자세가 2막에서도 많았는데, 슬픔도 고통도 고독도 모두 끌어안은 채 죽음과 운명에 당당히 맞서는 류라노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류라노는 록산에게 건네받은 마지막 편지를 소중히 손바닥 위에 올린 채 온몸으로 끌어안는다. 육체의 고통과 영혼의 기억으로 힘겨워하면서도, 늘 품에 안고 있던 제 영혼의 고백을 직접 말로 내뱉는다. 록산이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눈치챘지만,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최후의 절규를 막을 수 없다. 다정한 미소를 가까스로 입꼬리 끝에 걸어보지만, 차마 록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한다. 편지를 록산을 향해 들어 보이며 "그 피는 크리스티앙의 것이었으니까!" 하고 외치며 비로소 록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과거의 아픔을 통감한다. "그의 입술이 되어준 것뿐" 인 제 행동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가를, 그 선택들이 "이렇게 마주쳐버린 운명" 으로 이어지고 말았음을. 무너지듯 록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댄 류라노는, 가쁜 숨을 토해내며 영혼이 새어나가는 목소리로 "아주, 잠시, 안녕" 을 선고한다.

 

 

오직 한 영혼만을 사랑해왔다는 록산의 말에, 류라노는 소중하게 그러쥔 그의 양손 위에 입을 꾹 가져다단다. 마치 순앤가스콘맆에서 성호를 긋고 제 오른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최후의 전투를 위한 마지막 기도를 했던 것처럼. 록산, 이라 소중하고 애틋하게 그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입에 올린 류라노는 문득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성가신 손님인 죽음의 신을 향한 불신과 경계로 가득하던 눈빛이 순간 일렁인다. 얼굴 가득 희미하게 퍼져가는 미소와 함께 그가 말한다. "내 친구 달이 마중 나오고 있" 노라고.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서는 지팡이를 주워 들고 비척대며 일어난다. 밤하늘을 휩쓸 "날 위한 축포" 를 말하며 지팡이를 하늘 높이 치켜든다. 마치 스스로 축포를 쏘아 올리듯이. "나아가리, 나아가리" 하며 무대 정가운데로 나온 류라노는 일순 굳는다. 슬로우모션이 걸린 것처럼 천천히 빠져나가는 세포 하나하나에 깃든 영혼. 바닥으로 무너지기 직전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가 지난번보다 오래 유지됐다. 거대한 코 너머의 반짝이는 두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찰나가, 죽음의 신과도 맞서며 올곧게 제 영혼을 지켜낸 류라노의 마지막을 한층 극적으로 드러냈다.

 

 

 

 

음향이 재연 들어 최고로 좋아서 깜짝 놀랐다. 자리 덕인가 싶긴 한데, 비슷한 자리에 앉아보지 않은 게 아니라서 음향이 좋아진 것이라 믿어본다. 위에 적지 못한 사소한 디테일 몇 개만 더. 터치 마지막에 몽플뢰리에게 망토를 뒤집어 씌우는데 천이 계속 꼬여서 거의 목을 조르듯 얼굴만 칭칭 감쌌다. 브링미자이언트 "내 영혼만은" 하는 부분에서 눈을 감은 채 검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머리께를 가리켰다. 여성 문학지를 만든다는 록산의 말에 박수를 치지 않는 것과, 썸원으로 고백을 하려는 록산에게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는 디테일이 계속 유지되어 좋다. 라그노와 르브레의 설레발에 아니라고 정정을 해주려고 했으나, 아이를 몇 명이나 낳을 거냐 묻기까지 이르는 망상 때문에 뭐래는 거야 하는 입모양으로 투덜거리더니 성큼성큼 퇴장한다. 가스콘 부대를 찾아온 드기슈에게 "백작님 같은 분이" 하고 대사 살짝 바꾼 거 두 번째로 봤다. 가스콘 넘버에서 "실패가! 뭐냐" 하면서 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대낮에 록산의 집을 찾아온 크리스티앙을 구박하며 똑바로, 우아하게 서보라고 요구하지만 여전히 뻣뻣한 자세를 보며 류라노는 "좀 자연스럽게 못하나," 하고 투덜거렸다.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날 조롱하고 비웃나," 까지 무대 정중앙에 서서 그대로 굳어버린 채 부르다가, 터벅터벅 걸어 구조물을 응시하며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에 씁쓸해한다. 록산 넘버 직후 소중하게 꾹 눌러 보냈던 손키스와는 다르게, 애틋하고 조심스럽게 입술 끝에 손가락 끝을 얹고서는 나비를 허공으로 날리듯 가볍게 손을 뗀다. 그리고 놓쳐버린 열매를 붙잡으려는 듯 손가락을 모으며 애절한 마음을 어두운 밤하늘로 띄워 보낸다. 다가오는 드기슈의 목소리에 달, 달! 하면서 황급히 모자를 벗어 르브레에게 건네는데 마이크가 걸려서 뻑, 소리가 났다. 순간 현실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양 검지를 관자놀이에 얹는 디테일은 똑같은데, "나 달나라인," 하면서 절반만 일어나고 "여긴 지구, 너 지구인," 하면서 마저 일어나는 건 지난 0914 공연부터 했다. 손목을 요리조리 비트는 것도 얼마 전부터 계속 하시는 디테일이고.

 

 

재연 초반 후기에 적었던 내용인데, 2막에서 전쟁터에 도착한 록산이 크리스티앙을 먼저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초연에서는 시라노를 먼저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먼저 부르고 나서야 록산이 크리스티앙을 향해 달려갔다. 개인적으로 이 변화가 다소 아쉬웠는데, 8월 말 즈음부터 크리스티앙이 눈에 띄게 뒤로 물러난 위치에 서있어서 록산이 시라노를 먼저 발견하는 것으로 동선이 바뀌었더라. 착각인가 싶어서 매번 유심히 봤는데, 이날 공연까지도 반복되는 걸 보니 연출이 바뀐 게 맞는 것 같다. 이외에도 1막 첫 넘버의 마지막 포즈도 달라졌다. 재연 초반에는 "시작해-" 하고 떼창의 화음을 마무리하면서 앙상블 배우들이 객석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무대 위의 무대를 바라봤다. 그런데 이 연출의 경우 객석에서 박수가 잘 안 나오더라. 그래서인지 객석을 향해 짠, 하고 양팔을 벌린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달라졌다. 소소하게 바뀌는 부분들을 기억하는 바람에, 재연 개막이 새삼 아득한 과거로 느껴진다.

 

 

 

 

무대 위에서 가장 거대하게 존재하는 배우를 만날 수 있음이 매번 경이롭고 감사하다. 동시에 무대 아래에서도 다양하게 존경할만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점이 감탄스럽고 고맙다. 류배우님이 진행하시는 객석 나눔 회차의 관극이 처음이어서 영광이었고, 매번 더 깊게 고민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시는 공연 덕분에 심장이 뛴다. 짙은 여운을 길게 남기고 싶어서 거의 빠짐없이 가던 퇴근길마저 생략하고 귀가할 정도로 벅찬 관극이었다. 일요일 커튼콜은 좀 더 잘 찍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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