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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09.14 3시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송원근 크리스티앙. 류라노 자여덟. 류지연런 페어 둘공이자 자둘.

 

 

※스포있음※

 

 

류라노는 타협이나 비겁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고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 싸우는 전사이자, 날카로운 펜 끝에 재치와 유머를 항상 걸고 다니는 시인이다. 담백하지만 예리한 문장 하나하나에 꾹꾹 눌러 담은 진의가 유난히 곧고 명징한 울림을 남긴다. 거인을 데려와 넘버에서 "그 펜! 절대 내려놓지 말게" 라고 말하는 류라노의 정면이, 광채를 번뜩이는 두 눈과 커다랗고 굴곡진 매부리코 때문에 매서운 독수리와 겹쳐 보인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무대를 "자유로운 불꽃처럼" 일렁이며 누비는 그의 등 뒤로 밝은 조명이 비춘다. 선명한 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높은 조도의 빛은 "독수리 날개짓처럼" 좌우로 펼친 그의 양팔 사이로 굴절되어 번지며 마치 커다란 날개 같은 잔상을 남긴다. 미지의 운명을 향해 어서 오라 외치며 너울대는 안개를 향해 묵직한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이 강건하다.

 

 

그럼에도 그 역시 인간이기에, 고독으로 몸부림치며 괴로워한다. 자신의 입술로 맺어진 열매를 크리스티앙에게 건네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다정함은, 크리스티앙을 부탁하는 록산의 의도치 않은 잔인한 말들로 와르르 무너진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냐는 물음에 비통한 미소를 가까스로 입가에 건 류라노는, 흐느끼며 주변을 망연히 둘러보고서는 세게 모자를 내팽개친다. 슬픔에 짓눌려 무너지듯 무릎을 꿇은 그의 온몸에서 소리 없는 절규가 흘러내린다. "선택하고 믿는 진실하고 강한 빛을!" 하며 꽉 말아쥔 손에 꼿꼿하게 펼친 오른쪽 검지가 선연한 의지를 내보인다. 전쟁터에서도 크리스티앙을 위로하는 동시에 그가 록산을 그리워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공감하고 홀로 아파한다. 특히 "지나간 추억이 될 수 없어" 라는 부분에서, 류라노의 얼굴에 벨쥐락의 여름을 추억하던 기억을 다시 추억하는 허망함이 깃든다.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 망연한 눈으로 뒷걸음질 치며 "안돼," 라고 중얼거린 류라노는 한 차례 더 비틀대며 뒷걸음질 치며 "안돼," 라고 속삭인다. 휘청, 하고 크게 흔들린 뒤 파들거리며 성호를 긋고 툭 떨궈버린 손과 고개에서 온갖 감정이 휘몰아친다. 록산과 약속했기에, 르브레를 비롯한 동료들을 지켜내야 하기에, 반드시 승리하겠노라 선언했기에, 류라노는 끝까지 "오만한 죽음" 에 맞서 "최후의 전투" 를 맞이한다. 이전 공연들에서는 완전히 죽어버린 영혼의 일부를 깊이 묻어버리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날은 돌이킬 수 없이 깊고 커다란 상처를 입은 영혼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도 억지로 붕대를 감아버린 듯했다. 제대로 아물지 못한 상처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고스란히 영혼에 남아 언제라도 다시 피를 토해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는 페어웰 장면으로 이어진다.

 

 

록산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옛 상처의 혈흔에 온전히 파묻힌다. 종이 위에 피어오르는 모든 추억과 감정들을 손끝에서부터 삼켜내며, 류라노는 편지를 소중히 품에 끌어안고 오롯이 홀로 존재한다.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라는 대사를, 이날은 록산을 향해 얼굴을 돌리지 않은 상태로 힘겹게 말했다. 그 자세 그대로 눈을 질끈 감은 채 "그 피는 크리스티앙의 것이었으니까!!!" 라고 외치며 품에 안은 편지를 꽉 쥔다. 록산이 다가오자 그제야 눈을 마주친 류라노는 밭은 숨을 힘겹게 내뱉다가 두 차례 긴 한숨을 토한다. 15년 전의 상처에서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피가 록산의 양손과 영혼마저 적신다. "난 오직 한 영혼만을 사랑해왔고, 그게 바로 당신이었어요" 라는 록산의 말에, 류라노는 "세상에," 라고 탄성을 내뱉으며 그의 손을 천천히 입가로 끌어와 손등에 조심스레 키스한다. 비로소 죽음의 신을 맞이할 준비가 된 류라노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기대듯 록산을 끌어안은 채 시작하는 얼론맆. "이대로 나," 하며 록산의 품에서 벗어나고, "나아가리," 하며 치켜든 지팡이를 내던지고, "나아가리," 하며 그대로 굳어버리는 류라노. 지연록산이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린 채 "제발, 제발" 하고 울부짖듯 속삭이지만, 탁 풀리는 동공에서부터 손쓸 틈 없이 빠져나가는 그 영혼.

 

 

 

 

페어웰과 독백 씬이 갈수록 좋아져서 매번 여운이 길다. 덕분에 자꾸 앞부분의 디테일이 휘발되어 버리지만, 그럼에도 몇몇 장면은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나의 코 넘버에서 "차원이 다른 남자야" 부분을 살짝 변주했고, 칼에 쥐가 났다며 흔들어대는 동작을 무대 한가운데로 나와서 한 번 더 했다. 터치 넘버 직후 우아하게 인사한 다음에 앙상블을 향해 손키스를 두 번 날렸다. 록산 넘버가 유난히 좋았다. 류라노가 모자로 턱 틀어막았던 라그노의 입가 옆에 쪽, 하고 닿을 듯 아닐 듯 뽀뽀를 해주자, 라그노가 "아이 부끄럽게," 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그대로 성큼성큼 무대 오른쪽으로 걸어 나가면서, 반주에 맞춰 고개를 양옆으로 가볍게 까닥이며 흥겨워하는 류라노는 너무 귀여웠다. 브링미자이언트 시작 전, 자신을 설득하며 왼쪽 어깨에 손을 얹는 르브레를 뿌리친 류라노는, 경고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읽으며 한층 미간을 좁힌다. 재차 어깨에 올리는 르브레의 손을 또다시 뿌리치고서는, 0908 공연처럼 펜을 내려놓지 말라고 외치면서 편지를 찢었다. "내 영혼만은," 하는 가사에서 칼을 수직으로 곧게 세운 채 오른손을 머리 쪽에 가져다 대는 디테일이 이날 또 있었다. 왼손으로 영혼을 가리키는 것도 좋고 이 동작도 좋아서 매번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이 됐다. 이 넘버는 들을 때마다 벅차올라서 매번 제대로 숨도 못 쉬고 압도당한다.

 

 

벨쥐락의 여름 넘버도 새로이 반짝거리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고백을 하겠다는 록산의 말에 "준비가 다 되어 있" 다며 다리를 꼬고 앉은 류라노가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는 디테일이 새로 생겼다. 0910 공연부터 하신 것 같은데, 크리스티앙의 고백을 기다리며 "시작하세요," 하고 기다리는 록산의 대사를 그대로 가져온 문장이어서 너무 좋았다. 텍스트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디테일을 매번 새로이 추가해주시는 덕분에 극이 한층 풍성해진다. "긴장하지 말고," 하며 록산에게 다정히 말해준 류라노는 한껏 설레발을 치며 헛된 꿈에 부풀어 오른다. 이 장면에서 원래 모자를 다시 안 쓰는데, 이날은 누군가 넘버가 끝날 무렵 모자를 집어 다시 머리에 쓰고서는 품에서 편지를 꺼내고 가볍게 키스했다. 우아하고 정중하게 자세를 취한 류라노는 제 것이 아닌 이름에 비명을 지르며 편지를 바로 집어넣고서는 다시 크게 비명을 토했다. 그대로 계속 모자를 쓴 채 장면을 이어나가다가 퇴장하면서 벗었다.

 

 

가스콘 부대에 찾아온 드기슈가 깽판을 부리는 것을 발견한 류라노가 입구 기둥에 손을 턱 얹은 채 기대서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 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여유롭게 한 바퀴 크게 돌며 대원들을 둘러보는데, 동경의 눈빛을 반짝거리는 런티앙의 연기가 좋았다. 호오오, 하고 탄성을 내뱉으며 첫 번째 대원의 칼을 뽑은 류라노는 "어디 있든 삶은 전쟁터" 라며 드기슈를 비웃는다. 그대로 다시 반바퀴 돌아 르브레와 눈을 맞추며 칼에 꽃힌 모자의 챙을 들추면서 "하나, 둘, 셋, 넷" 하고 숫자를 세는 디테일도 얼마 전에 생겼다. 오른팔을 들어 르브레와 탁 맞부딪히면서 인사하는 류라노를 본 런티앙이 당당하게 제 팔도 내미는 디텔도 좋더라. 그대로 런티앙을 먹금한 류라노는 제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건네고 그의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든다. 가스콘. 류라노 본인의 패기가 강하게 드러나는 날도 있고 대장으로써 가스콘 대원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날도 있는데, 이날은 후자였다. 오른쪽 탁자 위에 선 류라노는 무대 중앙에서 춤을 추고 칼을 휘두르는 부대원들을 선보이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껏 드러낸다. 왼손으로 얼굴가에 흐르는 "붉은 땀, 붉은 피" 를 표현하고, "죽음이 불러도 쉽게는 안가지" 하며 단언한다. 넘버 중간 군무를 추고 "호오~" 하는 추임새를 넣을 때가 몇 번 있었는데 이날도 해주셨다. 드기슈를 조롱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대 왼쪽으로 걸어가는 류라노를 비호하듯 덤벼드는 가스콘 부대가 든든하다. 퇴장하는 드기슈를 향해 퉷, 하고 침을 뱉는 디텔이 이날도 있었다.

 

 

 

 

지난밤의 이야기를 해달라며 앙상블 배우가 "봉쥬르!" 하고 외친 뒤 귀족 인사를 하는 디테일은 0908 공연에서 봤는데, 이날은 주변의 다른 배우들도 함께 귀족인사를 하더라. "남자답게!" 하는 대사만 빼주면 참 좋을 거 같다. 크리스티앙의 겁 없는 코그로에 "저게 미쳤나," 하고 중얼거리며 우당탕탕 달려드는 류라노. 용티앙과의 회차와는 다르게 약간 거리를 두고 섰는데, 런티앙이 제 이름을 밝히며 두차례에 걸쳐서 가까이 들이대니까 류라노가 오히려 거리를 두려고 했다. 결국 거의 붙어선 채로 런티앙의 가슴을 팡팡 두 번 친 류라노가 다시 이야기를 하러 왼쪽 테이블 위로 올라선다. 이어지는 코그로에 멈칫하다가 "뭐지?" 하며 갸웃거리던 류라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폭발한다. 크게 칼을 두 번 휘두르고서는 칼을 그대로 든 채로 양팔을 벌린 류라노가 "안아주게," 하고 말한다. 런티앙이 계속 거리를 두자 "이리 와 봐," 하면서 억지로 그를 꽉 끌어안고서는 칼을 다시 집어넣는다. "록산의," 하고 잠시 망설이던 류라노는 "오빨세" 하고 자신을 소개한다.

 

 

완벽한 연인 넘버 시작 전에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이 각자의 마음을 중얼거리며 교차하듯 동선을 쌓는 장면이 있다. "나한테도 저런 얼굴이 있었다면 정말 많은 게 변했을 텐데, " 하고 중얼거리며 시라노가 왼쪽으로 이동하면, "이 감정을 우아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하고 크리스티앙이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런티앙은 이동 없이 그대로 무대 왼쪽 끝에 서서 대사를 이어가더라. 이어 "저런 아름다운 대리인이 내 영혼을 전달해줄 수만 있다면," 이라 말하며 시라노가 다시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아름다운 말로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한테 달콤한 말재주가 있으면 좋겠다." 라고 중얼대며 크리스티앙이 왼쪽으로 움직인다. 띠링 소리가 나면 "달콤한 말재주!" 하고 크리스티앙의 말을 반복하는 류라노 디테일이 9월 초부터 고정됐다. 효과음의 임팩트를 대사로 재차 강조하는 디테일이어서 마음에 든다.

 

 

록산에게 크리스티앙 대신 고백하는 장면에 "내 말들이 재주를 부려 혹여 다른 빛깔을 낼까봐" 라는 대사가 있다. 이날 류라노가 "혹여" 를 "혹시" 라고 잘못 말했는데, 의미가 비슷해서 그대로 이어갈 줄 알았는데, "혹여" 라고 정정하며 다시 이어나갔다. 이외에도 누군가 넘버 이후에 지연록산이 "드기슈와의 정략결혼으로부터 날 구해줄 운명," 이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여기를 살짝 씹은 것도 아쉬웠다. 큰 실수는 아닌데 두 부분 모두 항상 매끄럽게 이어나가던 부분이어서 기억에 남아 기록해둔다.

 

한껏 행복한 얼굴로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록산의 고백을 듣던 류라노는 "왜 몰랐던 걸까 이토록 진실한 그대" 라는 말에 꿈에서 깬다. 이 장면에서 용티앙은 시라노의 모자를 손에 쥐고 등을 돌리고 있는데, 런티앙은 시라노의 모자를 머리에 쓰고 객석을 향해 표정을 보여주더라. 초연에서는 표정이 전부 보였기 때문에 록산과 크리스티앙과 시라노의 감정을 뚜렷이 지켜보고 공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크리스티앙들도 록산의 집 뒤에 몸을 숨길 지언정 표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고맙다는 런티앙의 말에 미소로 답하던 류라노는 망연한 얼굴로 두 사람의 키스를 시야 가득 담는다. 그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천천히 무대 오른편으로 걷던 류라노는, 록산네 구조물 앞에 잠시 머무르며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부분까지 다 부른 뒤에야 돌아서서 회전 무대 위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달떨나 넘버 시작 전에 양 관자놀이에 검지를 올리는 디텔이 유지되어 행복한데, 이날은 그 자세에서 손목까지 돌리며 한층 업그레이드된 달나라인을 표현했다. "못쉥긴 지구인" 이라 드기슈를 지칭하는 류라노의 발음은 귀엽지만, 평생을 안고 사는 상처와 자괴감이 담뿍 묻어있는 호명이기에 마음이 아프다. 록산이 대신 버터나이프로 슉슉슉 혼내주기까지, "달나라 코쟁이" 라는 놀림과 배척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 것인가. 평생 달나라를 동경했고 끝내 죽음 앞에서도 달나라로 돌아가리라 외치는 시라노의 삶에서, 달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만으로도 아득하다. 관극을 마치고 공연의 여운을 곱씹으며 가장 크고 밝고 둥그런 보름달을 마주하면서, 불과 수시간 전에 만나고 온 시라노가 또다시 보고 싶어 졌다. 커다란 한가위의 달과 달토끼를 향해 마음속의 소원을 조심스레 빌어보며, 행복이 넘실대던 연휴를 마무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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