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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09.08 2시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자일곱.
※스포있음※
재연 들어 가장 좋았던 마지막 독백 장면 덕분에 커튼콜까지 눈물을 펑펑 쏟고도 주체가 되지 않아서 다시 자리에 주저 앉아 엉엉 울었다. 록산에게 다정한 미소조차 지어주기 힘들 정도로 위태롭게 삶의 끝에 서있던 류라노가 지독히 처절해서,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아프고 아프고 아프고 아팠다. 돌이켜 곱씹는 이 순간에도 가슴이 미어진다. 1열 정중앙에서 마주하는 거인을 데려와 넘버나 얼론 넘버가 너무 좋아서, 독백씬에서 이토록 오열하게 될 줄은 미처 각오하지 못했다.
15년 간 깊이 묻어두었던 제 진실한 영혼이 꾹꾹 눌러담은 글자 위로 피어오르는 것을 마주하며 류라노는 소중히 크리스티앙의 피가 묻은 자신의 마지막 편지를 부여잡는다. 이전 공연들처럼 온전히 편지만을 바라보는 류라노의 눈빛. 죽음을 목전에 둔 자의 마지막 반짝임은 시간을 거슬러 삶에서 가장 찬란했던 순간으로 그를 이끈다. 자신이 사랑한 영혼이 누구였는가를 비로소 깨달은 록산에게 제 표정을 감추려는 류라노의 표정이 고통스러웠고, 애써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걸며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라고 건네는 말도 애처로웠다.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마주쳐버린 운명" 이라며 그들의 관계를 반추하는 류라노의 온몸이 파들거린다. 비틀대며 록산을 끌어안고서는 "곁에 있어요," 하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음정을 내리면서 대사처럼 속삭인다. "그대 곁에," 하며 록산과 눈을 마주치던 류라노가 영혼이 새어나가는 헐떡이는 한숨을 두 차례 토해낸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 고귀한 영혼이 선연하게 시야에 밟히는 듯하다. "아주, 잠시, 안녕," 을 속삭이며 무너지는 류라노.
의자에 다시 앉은 류라노는 "주간 소식을 마쳐야겠죠?" 하는 대사를 빼고, 바로 "지난 토요일," 하며 자기자신의 사망 선고를 내린다. 울고 있는 록산의 눈물이 더없이 값지고 소중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조심스레 만지며 "크리스티앙을 위해 눈물 흘려" 달라 말한다. "예의를 갖춰야" 한다며 주섬주섬 지팡이를 주워든 류라노는 평소보다 더욱 꺼져가는 음성으로 독백을 이어간다. "내 말이 들리는가아," 하며 끄으윽, 신음을 섞어낸다. "내 코가 보이는가!" 라는 외침 역시 공허할 정도로 절박하고 처참하다.
"오늘밤 내가 달나라로 들어갈 때 날 위한 축포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휩쓸 것이다. 월계관도 장미꽃도 내게서 다 빼앗아가도 내가 가져가야 할 단 한 가지. 티끌 한 점 없는, 얼룩 한 점 없는, 나의 영혼."
록산과 얼굴을 맞대며 파스스 웃어보인 류라노는 떨리는 음성으로 마지막 노래를 시작한다. "나아가리," 하며 높게 치켜들어 하늘을 겨누던 지팡이를 던지듯 내팽개치고, "나아가리" 하면서 뻣뻣하고 꼿꼿하게 선 채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정적. 시간마저 멈춰버린 찰나 데구르르 눈이 돌아가며 서서히 바뀌는 류라노의 표정. 아주 느리게 감겨돌아가는 필름처럼 천천히 변화하며 풀어지는 얼굴의 근육.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완전히 멈춰버린 찰나 오른손으로 꼭 쥔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고 하늘을 겨누던 채 높이 치켜들어 하늘을 겨누던 지팡이를 내팽개치고 "나아가리," 하면서 꼿꼿하게 선 채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정적.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멈춰선 그대로 서서히 바뀌는 표정. 천천히 무너지듯 툭 쓰러지는 몸뚱아리. 애써 미소를 걸으려 노력하면서도 결국 암전 직전 치밀어오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일그러지는 록산의 얼굴이 결말의 감정을 극적으로 마무리하게 돕는다.
독백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관극이 유의미했으나, 소소한 디테일 역시 사랑스러웠기에 기록용으로 남겨본다. 추기경이 후원하는 연극을 비웃는 비아냥의 정도가 갈수록 높아진다. "극장 공기가 너무 추잡해서요," 하고서 크게 웃는 류라노의 입모양이 두건 아래로 보이는데 엄청 귀엽다. 터치 직전 칼에 쥐가 났다며 칼자루에 손을 얹고 덜덜거리는 장면에서, 평소처럼 몸을 떨어대다가 어깨 웨이브를 넣는 애드립을 처음 했다. 패스트리와 시. 설레발을 치려는 라그노의 얼굴을 모자로 턱 틀어막고 "마음껏 먹고 마음껏 시를 쓰게!" 라고 외친 류라노가, 0831과 0906 공연에서는 라그노의 양뺨을 꼬집었는데 이날은 뽀뽀라도 해줄듯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대며 웃었다.
평소에는 "백 명이면 충분하구만!" 라고 크게 외친 뒤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말이지!" 하면서 경고장을 찢었는데, 이날은 종이를 그대로 들고 있다가 "그 펜! 절대 내려놓지 말게!"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찢었다. 거인을 데려와. 무대를 비추는 조명의 조도가 눈에 띄게 낮은데도 불구하고, 일렁이는 표정과 벅찬 반짝임이 넘실대는 목소리 만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류라노 덕분에 매번 눈물 쏟는다. 넘버 중간에 "날 아는!" 하고 강조를 넣는 디테일을 가끔 하시는데, 이날도 강하게 불러주셔서 좋았다. "내 영혼만은," 하는 부분에서는 눈을 감은 채 칼을 들고 있지 않은 왼손을 머리 근처에 가져다댔다. 움직이는 회전 무대 위에 서서 박자에 맞춰 칼을 휘두르는 류라노의 모습이 이야기의 공간감을 한층 끌어올린다.
여성 문학지를 만들고 있다는 록산의 말에 류라노는 0906 공연처럼 박수 없이 감탄했다. 벨쥐락의 여름. "들판으로 끝없이 달렸죠," 하는 록산을 바라보며 "맞아요!" 하고 웃음 섞은 목소리로 추임새를 넣는 건 0906 만 했다. 누군가. 록산에게 진정하라는 듯 양손바닥을 아래로 내리며 침착해요, 등을 말하는 것이나, "내 마음에 자꾸 떠오르는 사람이 생겨버렸죠," 하는 록산 말에 얼굴이 밝아지며 "나?" 하고 본인을 가리키는 건 고정적인 디테일이다. "용감한 남자," 라는 말에 양주먹을 꽉 쥐는 디테일은 이날 처음 했다. 록산의 고백이 끝나갈 무렵 본인도 결심했다는 듯 품에서 제가 써온 편지를 꺼낸 뒤 입을 맞추는 디텔을 이날 했다. 아아악, 하는 과장스런 비명의 객석 반응이 좋아서 0906과 0908 모두 일부러 두 차례 했는데, 이날 지연록산이 좀 빨리 돌아봐서 편지를 허둥지둥 품에 구겨 넣었다. 뒤쪽 완벽한 연인 넘버 중간에 이 편지를 꺼내들고 쫙쫙 펴서 다시 읽어보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왜 사랑 고백을 나한테," 하느냐는 물음에 크리스티앙의 이야기가 나오자, 록산의 의중을 깨달은 류라노는 순간적으로 왼손 주먹을 꽉 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뭐든 하겠다는 다짐이 서리는 순간. 비록 이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여긴 용맹한 자들만 모이는 곳인데 백작님께선 무슨 일이십니까?" 하는 대사를 "백작님 같은 분이," 라고 호명하며 한층 비꼬는 말투로 묻는다. "내 펜 끝이 종이와 입을 맞추는 순간 단어들이 태어나고, 그 단어들이 모여 시가 되고, 그 시는 내게 영혼의 노래를 불러줍니다. 이보다 값진 보상이 어디있겠습니까~?" 하는 대사도 "이보다 값진 보상은 없습니다." 라고 단정형 어미로 끝내며 단언했다. 가스콘. 돈키호테를 읽어보라는 드기슈의 말에 "아니면! 풍차의 날개가 저 하늘에 있는 달을 향해 날 날려줄 수도 있지요," 하는 대사를 하는데 살짝 멈칫 하며 말을 먹어서 "하늘의 별까지 날 날려줄 수도 있죠," 이런 식으로 초연처럼 바꿔서 말했다.
코그로 장면에서 크리스티앙에게 뛰어드는 시라노를 르브레가 막아서는데, 0906과 0908 모두 류라노는 칼을 뽑아들지 않았다. 대신 크리스티앙에게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제 목을 뒤로 확 꺾으며 자신과 크리스티앙의 체격 차이를 강조했다. 심지어 이날은 까치발까지 들며 키차이를 강조했고, 용티앙이 무릎을 살짝 굽히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하게 만들었다. 정가운데 자리에서 볼 땐 류라노가 크리스티앙의 등을 붙잡으며 눈치를 준 것 같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괜찮아, 괜찮아," 하다가 "쟤 뭐지?" 하고 갸웃거리는 디텔 좋았다. "나가, 저 놈 빼고 다 나가!" 하면서 칼을 휘두르는데, 재연 들어 처음으로 앙상블이 들고 나가는 책상의 다리를 칼로 쳤다. 후우, 후우, 하면서 숨을 고르다가 씩씩거리며 칼을 두 번 크게 휘두르고서는 칼을 집어넣은 뒤 팔을 벌리며 "안아주게" 라고 말한다. "나한테 달콤한 말재주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이날 류라노는 "달콤한 말재주!" 하고 단어를 반복했다.
0831 후기에서 적은 록산 집앞 구조물을 쳐다보는 것을 0906에는 안하고 0908에서는 했다. 달에서 떨어진 나. 빵가면을 쓰고 드기슈 뒤쪽으로 가서 쪼그려 앉고는 양손으로 가위를 만들어 검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짚었다. 일어나서 "삐리빠라삐리빠라삐리빠라삐리빠라뽕" 하며 양검지를 그대로 드기슈에게 찌를 듯 향해 있다. 넘버가 끝나고 무대 왼쪽에 선 류라노는 라그노의 걱정스런 눈을 마주하고 애써 웃어보인다. 8월까지는 자기 감정에 많이 짓눌려 있었는데, 0906과 0908에서는 급변하는 상황에 더 주의를 기울였고, 그에 비례하여 드기슈에 대한 분노도 더 크게 표현했다. 소중하다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다며 "이해할 수 있나요, 시라노" 라고 묻는 록산을 시야 가득 담는 류라노. 자신에게는 록산이 바로 그 대상이기에 더욱 사무치는 표정으로 눈을 글썽거린다. 록산이 키스한 제 손을 내려다보던 류라노는 고개를 떨군 채 일어나 객석을 등지고 선다. 이날 반주가 흐르자 오른쪽과 왼쪽을 한 번씩 둘러보는 디테일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대로 흐느끼면서 시작하는 1막 마지막 넘버, 나 홀로.
2막. 계급장도 내던지고 도망친 드기슈에게 스카프 묶음을 던질 때 평소에는 하나씩 펼쳐보이다가 "남기고 간 것들의 무게가!" 하면서 바닥에 세게 내팽개쳤는데, 이날은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 스르륵 손에서 스치듯 떨궈버렸다. 크리스티앙에게 "낚시대 들고 '날' 따라와" 라고 하는 대사가 좋았고, "나도 싫어. 삶은 전쟁터니까." 라고 어미를 바꿔말하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부자연스러운 일부로 존재하게 돼. 이 코처럼 말이야," 하면서 보통 코를 손으로 가리켰는데, 이날은 그러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의 이별 편지. "난 이렇게 지난 추억이 될 수 없어," 라는 가사에서 변하는 류라노의 표정이, 록산과 벨쥐락의 여름을 추억하던 장면과 이어지며 강한 동요를 드러냈다.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 성호를 긋던 류라노는 오른쪽 어깨에 닿은 손을 그대로 블라우스의 가슴팍을 꽉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0906과 0908 모두, 다른 가스콘 부대원들과 같은 추모의 동작을 지어보였다. 순앤가스콘. 무릎 꿇고 성호를 그은 뒤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훅, 숨을 불어넣는 모습이, 마치 페어웰 넘버 마지막에서 록산의 양손을 소중하게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제 입술을 가져다대며 숨을 내뱉는 류라노의 동작과 이어졌다. "자 오만한 죽음아," 라고 호명한 뒤 "어서 멋대로 몸부림쳐봐 최후의 전투다" 하는 부분을 평소와 다른 박자로 부른 부분도 있었다.
2년 전 엘아센 실1열 정중앙에서 류라노를 만났고, 1년 전 대구 계명에서 류빅터를 만났었다. 운명 같은 우연처럼 동일한 일자에 류라노를 다시 만날 수 있어 기쁘다. 개인적인 덕심을 담아, 광고 모델인 뎅옵의 얼굴이 박혀 있는 제품을 굳이 골라서 편지와 함께 류배우님께 전달해드렸다. 작년 이날 대랑켄 퇴근길에서도 편지와 선물을 드렸었구나. 여러모로 0908은 유의미한 날짜가 될 듯하다. 부디 내년 이날도 무대 위의 류배우님을 마주할 수 있길 바래본다.
PS. 선물을 드린 0908 바로 다음 회차인 0910 류라노 공연을 뎅라노가 보러 갔다는 소식을 듣고 우는 중이다. 덕계못을 이렇게까지 뼈저리게 느끼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 이런 우연이 겹치니 괜히 더 속상하네. 그럼에도 뎅옵이 재연 시라노를 재미있게 관극하길 바라는 바람이 앞설 수밖에 없는 건 이 묵직한 팬심 때문이겠지. 뎅옵이 부디 인별에 류배우님과의 투샷을 올려주시길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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