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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bbch홀, 2019.09.06 8시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류라노 자여섯.
※스포있음※
이날 류라노는 초연의 느낌이 많이 묻어나왔다.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홀로 사무치게 고독한 사람. 지도자의 강건함 너머에서 외롭고 지친 영혼이 고통스럽게 울고 있었다. 소외 받는 약자들을 돕는 것이 제 사명이라는 듯, 스스로 상처 입는 길을 자처하면서까지 타인을 돌보는 사람.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영혼이 뭉텅뭉텅 죽어가면서도 삶의 끝까지 거인들과 맞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마지막 순간 죽어버린 영혼까지 고스란히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온전하게 달나라로 돌아간 사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을 살아낸 이 고귀한 영혼의 귀천에 어찌 별들을 휩쓸 축포를 쏘아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캄캄한 세상 속에서도 혼자 고결하게 빛나던 시라노의 일생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시라노가 록산을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동질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드러내는 류라노의 사소한 표정들이 평소와 약간 느낌이 달랐다. 마치 소년 같은 해맑은 얼굴로 오랜만에 만난 록산을 바라보던 류라노는 "이건 비밀인데," 하는 말에 눈을 반짝인다. 이어 "여성문학지를 만들고 있어요," 하는 록산의 고백을 들은 그의 얼굴에 순간 빛이 스쳐지나간다. 이미 사랑하고 있던 상대에게 새삼스럽게 재차 반하고 마는 그 찰나의 표정이 너무나 생생해서, 록산을 향한 시라노의 자기희생적 사랑에 한층 설득력이 부여됐다. 평소에는 찬사를 보내듯 "정말 대단해요," 하고 감탄하며 박수를 쳤지만, 이날은 새로이 반한 감정에 흠뻑 젖어 박수 없이 그저 록산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정말 대단해요!" 하고 탄성처럼 속삭였다. 어둠에 모습을 숨긴 채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어떤 말이 좋아요. 당신의 진심이라면," 하는 록산의 말을 들은 류라노의 맑은 얼굴에 감정이 일렁인다. 너무나 듣고 싶었지만 감히 꿈꾸지 못했던 그 말이 두 귀에 닿는 순간, 마치 잃어버린 자신의 또다른 영혼을 만난 듯 그의 두 눈 가득 기쁨의 눈물이 차오른다.
내일이 없음을 두려워하던 크리스티앙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에 류라노는 고통스럽게 절망한다. 성호를 긋다 말고 그대로 말아쥔 주먹을 심장께에 올려놓으며 비통하게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제는 말할 수 없음을. 그토록 사랑하는 동질의 영혼을 향한 고백을 앞으로는 결코 행할 수 없음을. 전하지 못하는 감정을 한데 끌어모아 꾹꾹 밀어담으며 "이 마음을 잠재워야겠지," 라고 낙담한다. 아끼고 사랑하던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그 죽음으로 인해 죽어버린 자신의 사랑 앞에서, 시라노의 영혼은 더 이상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록산이 깃대에 묶어준 하얀 손수건을 바라보며 "내 심장아," 하고 호명하고, "힘을 다오," 하며 꺼져가는 마지막 불꽃에 풀무질을 한다. 이미 바닥난 영혼의 부재에도 운명을 향해 "날 바라" 보라 선언하며 마지막 걸음까지 기꺼이 걷겠노라 선언한다.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은 뒤 크리스티앙의 죽음 앞에서처럼 왼쪽 가슴에 오른쪽 주먹을 올린 류라노는, 그대로 그 주먹을 입가로 가져가 후, 하고 숨을 불어넣는다. 자기자신의 영혼을 향한 애도이자, 그럼에도 삶을 끝까지 불사르겠노라는 의지의 표명. 그대로 박제된 그들은 실루엣으로 침잠한 채 천천히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받아든 류라노는 그 글자들을 통해 죽어있던 제 영혼과 재회한다. 록산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편지 한 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찬란한 과거만을 마주하며 온몸으로 전율한다. "안녕 그대 영원한 내 사랑," 을 소중하게 입에 올리던 류라노는 문득 꿈에서 깨어나며 감정을 추스른다. 이러면 안되지, 하는 얼굴로 록산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다정하게 미소지는 순간, 붉은 조명이 넘실대던 무대가 푸른 톤의 조명으로 바뀐다. 뜨겁고 찬란하던 시절에 빠져들었다가, 세월의 흐름에 깊고 푸르스름하게 침잠한 현실로 돌아온 듯이. "록산,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라는 그의 말이 지나치게 따스해서 아프다. "그대 곁에," 하며 록산과 얼굴을 마주한 류라노는, 하하하 웃음을 토한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혹은 행복인지 절망인지 단언할 수 없는, 허망하고 아련한 웃음. "아주, 잠시, 안녕," 하며 동질의 영혼을 향해 찰나의 작별을 고하는 류라노의 얼굴은 온갖 감정이 휩싸여 엉망진창으로 빛난다.
거인을 데려와 넘버에서 류라노는 "내 영혼만은," 하며 오른손을 관자놀이 옆에 가져다대며 눈을 감았다. 뽑아들고 있는 칼이 수직이 되어 마치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솟은 모습이 단단하고 굳건한 그의 영혼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는 오른손에 든 깃발을 굳건히 치켜들고 형형한 눈빛을 쏘아내는 순앤가스콘 넘버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오른손에 꽉 쥔 지팡이로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처절하게 얼론맆을 시작하는 모습까지 연결된다. 시라노의 정체성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이 넘버들에서 유사한 자세를 취하는 류라노의 디테일 덕분에, 극을 관통하는 그의 성정이 한결 선명해졌다. 비록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칼과 깃발과 지팡이로 전부 다르지만, 그 수단들로 겨냥하고 있는 건 늘 같다. 거짓, 오만, 위선, 편견, 허영, 그리고 자만심. 칼로 펜을 꺾으려는 거인들을 향해 끝없이 도전하고 맞서 싸웠던 시라노는,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리라 외치며 쓰러진다.
이날 첫 장면에서 소매치기 앙이 록산의 가방을 뺏지 못하는 실수가 있었고, 터치 넘버에서 드기슈가 결투 도중에 칼을 떨어뜨리는 참사도 있었다. "네 관상이 진상이니," 하면서 이어가던 류라노가 한 박자 늦게 현웃이 터져서, 이미 웃고 있던 관객은 또다시 풋, 하고 터질 수밖에 없었다. "요기 요기 아님 요기" 하며 장난스럽게 웃다가, 무대 오른쪽에서 일부러 자신의 칼을 떨어뜨리고 다른 손으로 받아내며 드기슈를 대놓고 조롱하는 류라노의 애드립 덕분에 광대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다들 퇴장하는데 칼 하나가 무대에 뒹굴고 있어서 르브레가 주워들고는 "가스콘 저 떨거지들 가만 안두겠다고 하는 드기슈 못봤" 냐며 칼을 들어보이는 애드립 한 것도 좋았다. 애드립은 좋았는데 소소하게 실수가 잦으니 산만했다. 게다가 음향이 정말 역대급으로 안좋았다. 가스콘 도입 MR 음량이 갑자기 음소거 수준으로 잠깐 줄어서 내심 철렁했고, 2막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 넘버 후반 크리스티앙 솔로 파트에서는 MR이 아예 사라졌다가 다시 켜졌다. 공연 중반부 접어들었다는 거 이렇게 티내실 겁니까. 스탭분들의 열일은 잘 알지만, 그래도 본공이 가장 중요하니 끝까지 집중 떨어지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애드립 늘어난 앙상블들 디테일도 좋은 게 훨씬 많긴 함에도, 산만한 지점이 꽤나 있어서 아쉽다.
커튼콜에서 "백 명이든, 천 명이든!" 하며 관객석을 가리키는 류배우님 모습에 초연 생각이 많이 났다. 객석에 안녕, 하고 손을 흔들어주는 대신 양손으로 손키스를 날려주셨다. 그리고 뒤로 돌아 무대 안쪽으로 뛰어가며 달을 향해 손을 뻗는데, 인사라기 보다는 붙잡아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묻어나왔다. 그리하여 본공 얼론보다 더욱 상체를 숙인 마지막 포즈가 보다 강건하고 극적인 여운을 남겼다. 커튼콜까지 극을 곱씹을 수 있어서 매번 마음이 벅차다. 이날 용티앙이 자리를 잘 선택해준 덕분에 시라노 소설책을 받는 이벤트에 당첨됐다. 그래 예매표라서 전차스도 받았고, 2차 프로그램북이 나와서 예쁜 공연 사진들도 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 소소하게 행운이 따라주는 시라노 재연 회전 관극이 너무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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