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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19.08.31 7시반

 

 

 

 

류정한 시라노, 나하나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자다섯. 류하나용한 페어 첫공.

 

 

공연 시작부터 끝까지 디테일을 나열하는 후기를 남길 때가 되어 최대한 상세하게 써봤다. 중간중간 초연과의 비교가 들어갔는데, 쓰다 보니 초연의 장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뼈아프게 다가와서 속상하더라. 이러한 성질 때문에 공연예술을 사랑하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공연예술 덕질이 힘들다. 그럼에도 재연 관극을 통틀어 가장 훌륭했던 1막 덕분에 무척 행복하다. 슬슬 디테일이 늘어나기 시작하는 류라노 때문에, 아직 잡지 못한 앞자리 표들이 떠오르며 초조해졌다. 8월의 마지막을 류라노와 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전부 스포, 류라노 위주, 해당 일자 디테일※

 

 

"그저 하찮은 어릿광대일 뿐입니다." 하고 자처하는 시라노의 후드를 벗기자 나타난 거대한 코에 "아이코," 하고 탄식을 내뱉는 발베르. 그에 맞게 바뀐 나의 코 시작 가사. "아이코, 왜 이렇게 놀라나," 하며 시작되는 류라노의 목소리가 마치 17일처럼 풍성하고 묵직하여 이미 대레전을 직감했다. 열띤 호응을 보이는 라그노와 시선을 맞춰주기도 하고, 커다란 코의 실루엣을 일부러 부각하기도 한다. 아첨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연극을 싸그리 잊게 만드는 시라노의 재기 발랄한 무대가 관객들의 흥미를 완전히 사로잡는다. 쏟아지는 박수에 우아하게 왼쪽 오른쪽을 향해 귀족 인사를 건넨 뒤, 벨트 앞에 끼워둔 지폐 두 장을 하나씩 꺼내 자신의 연극을 도운 피에로들에게 건넨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하는 드기슈의 호통에 다섯손가락을 쫙 핀 오른손의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대고서는 "여긴 극장입니다, 연극을 하는 곳이죠. 예의를 좀 갖추," 라고 말한다. 칼을 뽑아든 드기슈의 태도에 화들짝 놀란 척하며 칼자루를 꽉 붙잡은 채 과장스럽게 덜덜거린다. "두운과," 하며 오른손을 "각운의" 하며 왼손을 들어 올린 뒤 양 팔을 그대로 벌린 채 "광채가 번뜩이는 언어의 향연" 을 한층 묵직하게 강조하나. "이 칼을 펜 삼아 써볼까 하는데," 하고서는 부드럽게 웃으며 무대 위 관객들을 향해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며 동의를 이끌어낸다. 닥치라는 드기슈에게 "왜 이렇게 싸가지 없이 말하니, 교양머리 없이!" 하고 화를 내고서는 "시의 제목입니다, 메르시 메르시," 하며 천연덕스럽게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터치. "대단하신 나으릴 위한~" 하는 이 시작 부분이 너무 좋다. 일렬로 세워둔 의자를 밟고 걷다가 "쪼그라들었네" 하며 몸을 낮추고 유쾌하게 귀족을 비웃는다. 추기경 예하께 한껏 예의를 갖춘 인사를 잊지 않으며 비아냥의 정점을 찍는다. "심심한 난 그대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고 노래하면서 마치 지휘하듯 리듬에 맞춰 양팔을 부드럽게 흔든다. "이건 내 마지막," 하고서는 입가에 가져간 손에 훅, 숨을 불어넣은 뒤 그대로 드기슈에게 꿀밤을 놓는다.

 

 

삼촌, 아니 추기경님! 하면서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드기슈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면서 "안녕히 가십시오,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끝까지 우아한 태도로 조롱한다. "고귀하시고 고귀하신," 하며 고개를 든 순간, 시야 가득 록산이 들어온다.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곁에 다가온 라그노가 운율 어쩔 거냐며 "개념 없어, 개탄스러, 개나리," 하고 터치 가사를 한 번 더 강조한다. 르브레는 걱정을 쏟아내지만 시라노는 록산을 봤다는 감격에 젖는다. 록산의 가정교사를 보고 호들갑을 떨다가도 그 앞에서는 세상 우아하게 모자를 벗으며 인사한다. "단 둘이," 라는 말에 휘청인다. 장소를 정해달라고 했던 초연과는 다르게, "아침 일곱 시, 수녀원 앞뜰" 이라 시간과 장소를 통보하고 퇴장하는 가정교사.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코를 만지려는 르브레와 라그노의 손을 뿌리치고 왼쪽 두 번째 의자에 앉는다. 자기는 사랑을 하면 안되냐면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으려는데 피에로가 의자를 치워버려서 휘청, 한다. 오른쪽 끝의 의자에 가서 앉고는 "이런 코를 가지고 어떻게.." 하며 시무룩해진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아. 나 때문에 그녀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하는 대사가 재연에 추가됐다. 르브레와 라그노는 "록산은 자넬 누구보다 잘 아는 아가씨 아닌가," 하며 똑같은 생각의 사랑고백 이리라 바람을 불어넣는다. 자신의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르브레를 찰싹찰싹 때리면서도 한껏 광대를 올리고 있는 시라노.

 

 

 

 

텅 빈 무대에 혼자 남은 시라노는 잔잔하게 시작되는 록산 반주에 한껏 부풀어 오른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체 무슨 일이지," 하고 혼잣말한다. 눈치 없이 끼어드는 라그노에게 손가락을 입가에 대며 쉿, 하는 자세를 취한다. "커다랗고 호기심 어린 눈망울" 하는 지점에서 무대 뒤쪽에 록산이 등장해 별이 수 놓인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다. 크리스티앙과의 만남이 있게 해 준 푸른 가방을 손에 꼭 쥐고 설레어하는 록산과, 그런 그를 향한 기대에 부푼 시라노의 마음이 엇갈린다. "내 겉모습이 아닌 나의 영혼을 봐준 사람" 을 향한 이 마음을 "사랑이라 불러볼까," 하며 벅찬 얼굴로 무대 앞쪽 중앙에 서서 소중하고 조심스럽게 록산의 이름을 입에 머금어본다. "내 사랑," 하는 부름의 끝에 조심스럽게 손키스를 보낸다. 그대로 뒤로 돌아 별이 가득한 무대 안쪽까지 걸어간 그의 뒷모습이 잔상을 남기고,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나며 라그노 빵집 배경이 내려온다.

 

 

답답한 남편에게 화를 내는 라그노의 부인을 막아서며 허리 뒤춤에 챙겨 나온 돈주머니를 건넨다. 매번 이러시면 무슈는 뭘 먹고 사냐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라그노에게 손짓하고, 일부러 시인들의 후원자로서 부인을 추켜세워준다. 설레발을 치려는 라그노의 입을 모자로 턱 막은 시라노는 "마음껏 먹고 마음껏 시를 쓰게, 펜을 든 시인들은 그 어떤 거인과도 맞서 싸울 수 있는 최고의 전사들이니까!" 라고 말을 쏟아낸다. 패스트리와 시. 명작이 탄생했노라 호들갑을 떨며 "언어를 버무리는 마법사" 를 둘러싸지만, 시라노는 "삼행시나 마저 쓰시게, 마카롱의 마!" 하며 퇴장해버린다. 시를 쓰고 나누며 들뜬 분위기는 편지 한 통으로 싸늘히 가라앉는다. 펜을 놓고 어떻게 사냐며 탄식하는 거리의 시인들. "시는 영혼의 노래니까 멈출 수가 없다고 시라노가 그랬어" 라고 탄식하는 라그노와 "영혼의 노래고 뭐고, 모가지를 벤다잖아," 하며 현실적인 말을 하는 르브레.

 

 

소년 같이 눈을 반짝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노여움에 이글거리며 "백 명이면 충분하구만, 이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말이야" 하며 경고장을 쫙쫙 찢어버리는 시라노. 살다 보면 더러운 꼴도 보고 굽히기도 하는 거라는 르브레의 말에, 류라노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다. "그 펜! 절대로 내려놓지 말게" 라고 이를 악문 목소리로 말한 시라노가 눈을 번뜩이며 웃는다. "지켜야 할 건 반드시 지켜내야지" 라는 그를 르브레가 다시 한번 설득하려 들지만, 류라노는 꾸깃해진 편지를 바닥에 세게 내팽개치며 "아니!" 하고 화를 낸다. 거인을 데려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시인들에게 "눈치 보며 시를 끄적이며 구걸하듯 살게 두진 않아" 라고 선언한다. "비겁한 족쇄를 벗고 거인과 맞서리라" 는 시라노 홀로 무대에 남겨지고 나머지는 무대 소품을 들고 퇴장한다. "날렵한 펜과 날쌘 칼은" 하면서 양팔을 부드럽게 움직이는 류라노의 주위로 마치 글들이 피어오르는 듯했다. 낮은 조도의 조명 아래에서도 류라노는 "고결한 달빛이 되어 어둔 밤을 밝히" 며 눈부시게 빛난다. "미지의 운명이여" 하는 부분에서 무대 뒤쪽에 안개 같은 영상이 피어오른다. "어서 오라," 하며 눈을 번뜩이는 류라노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건다. 웃어 보이는 류라노. 무대 안쪽으로 걸어가 한가운데 선 그의 발아래에서 회전무대가 움직인다. 검을 뽑아 들고 "백 명이든 천 명이든 고통이든 파멸이든" 하며 강하게 허공을 내리긋는다. "세상 모든 거인들과 맞서리라" 선포하며 마지막 포즈를 취한다. 그대로 뒤로 돌아 적들을 향해 달려드는 순간 암전이 내리고, 비장함과 벅참이 넘실대는 반주가 이어진다.

 

 

만남의 장소가 수녀원 앞뜰로 바뀌면서, 마지막 장면의 비극이 한층 극적으로 부각된다. 수녀원 건물은 동일하지만 푸르렀던 잎사귀는 붉게 물든 채 저물어가는 단풍이 되고, 여기에 조명의 색감이 더해지며 계절의 변화이자 세월의 흐름이 명확히 대비된다. 모자를 벗고 "좋은 아침입니다" 하고 인사하던 시라노가, 동일한 위치에서 같은 동작을 취하며 "좋은 저녁입니다" 라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 또한 시간을 거슬러 포개진다. 예고 없이 자신을 끌어안는 록산의 태도에 화들짝 놀라는 시라노. "록산이 부른다면 수천 개의 별똥별처럼 날아와야죠.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에게 두 다리와 두 팔을 다 물어뜯긴다해도!" 라는 자신의 말을 똑같이 따라 하는 록산을 기쁨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달나라 코쟁이 삐리빠라 삐리빠라" 하고 놀림을 당할 때 록산이 "무시무시한 버터나이프로, 쇽쇽쇽" 해치워줬던 이야기를 꺼낸다. 여성 문학지를 만들고 있다는 록산의 말에 박수를 치는 디테일이 새로 생겼다. 벨쥐락의 여름. 이전 공연에서는 록산에게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만들려는 의도가 선명했는데, 이날은 시라노 본인이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에 푹 빠져든 모습이 강했다. "잊지 못할 꿈이죠" 하는 마지막 가사의 끝에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민 채 키스를 기다리는 시라노.

 

 

 

 

한여름의 꿈에서 깨어난 그는 고백할 게 있다는 록산의 말에 비틀댄다. 황급히 벤치에 앉아 다리를 꼬며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포즈를 취한 시라노가 "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긴장한 록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데, 이날은 습-하 하며 심호흡을 같이 하는 손동작을 취했다. 누군가. "내 마음에 자꾸 떠오르는 사람이 생겨버렸죠" 하는 록산의 말에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난가봐," 하고 기뻐 어쩔 줄 모른다. 가사 하나하나에 한껏 몰입하며 공감하다가 "그이의 미소는 내 영혼을 위로해요" 하며 록산이 돌아보자 황급히 다시 다리를 꼬며 애써 여유 있는 척한다. "자상하고, 선하고, 용감한 남자. 당차고 고귀한 신사" 라는 칭찬에 그 정도는 아니라며 겸양을 떨면서도 점차 자신감이 생긴다. 결론을 향해 치닫는 고백에 자리에서 일어난 시라노는 품에서 준비해온 편지를 꺼낸다. 꼬깃해진 편지를 탁탁 터는데, 29일에는 편지에 키스를 했지만 이날은 하지 않았다. 록산의 입에서 나올 제 이름을 기대하며 우아하게 편지를 건넬 포즈를 취하지만, 들려오는 타인의 이름에 황급히 편지를 다시 품에 밀어 넣으며 고통의 탄식을 길게 내뱉는다. 왜 고백을 자신에게 한 거냐는 물음에 실망과 원망이 묻어난다. 그럼에도 사랑하는 록산이 기뻐하기 때문에 시라노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도와주겠노라 약속한다.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지나치게 앞서가는 친구들의 설레발에 휙 몸을 돌려 성큼성큼 퇴장한다.

 

 

신참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칼싸움과 사격연습으로 떠들썩한 가스콘 부대. 높으신 백작의 등장에도 눈앞의 주먹다짐에 집중하던 부대원들은 시라노 대장의 등장에 비로소 대열을 갖춘다. 대원 하나가 둘러주는 벨트를 차면서 "어이구 좋으시겠습니다," 하고 드기슈에게 비아냥거리고, 생경한 얼굴의 크리스티앙에게 워, 하고 발을 구르며 씩 웃어보인다. 건네받은 칼을 허리춤에 넣으며 "정확하게 백 명은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도망간 놈들이 많아서요" 하고 무대 오른쪽 대원에게 다가간다. "체력을 더 키워야죠," 하며 대원의 칼을 뽑아 들고 그대로 드기슈에게 겨누며 "어디에 있든 삶은 전쟁터니까" 하고 눈을 번뜩인다. 대원 하나가 한뭉치의 모자를 끼워넣어준 그 칼을 그대로 들고 "여긴 용맹한 자들만 모이는 곳인데, 백작님께선 무슨 일이십니까?" 하며 비꼰다. 그걸 크리스티앙에게 건네고는 그의 칼을 대신 빼서 "넣어두시죠" 하며 돈뭉치를 칼끝으로 툭툭 친다. "내 펜 끝이 종이와 입을 맞추는 순간 단어들이 태어나고, 그 단어는 모여서 시가 되고, 그 시는 내게 영혼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보다 값진 보상이 어디있겠습니까?" 라는 시라노의 말에 대원들의 탄성이 쏟아진다. "나 그냥 막 던진건데," 하며 깔깔 비웃던 시라노는 떠나려는 드기슈에게 모자를 끼운 칼을 내던진다. 왼손을 탁 튕겨 신호를 주자, 크리스티앙도 드기슈를 향해 모자가 끼워진 나머지 칼 하나를 던지는 패기를 보인다. 드기슈의 비난에 "기억 좀 나게 해 드려요, 예?" 하는 원래 대사 대신, 이날은 "보여드릴까요?" 하면서 더욱 맹렬한 색감의 분노를 내뿜었다.

 

 

가스콘. 29일 공연에서는 중간중간 추임새를 많이 넣었는데, 이날은 거인을 데려와 넘버에서 그러던 것처럼 "하하하" 하는 낮고 묵중한 웃음소리를 많이 넣었다. 대원들과 눈을 마주치고 어깨를 붙들기도 하는데, 르브레에게 주먹을 내밀어서 맞부딪히는 디텔이 이날 처음 있었다. 후반부에 앙 한 명에게 하이파이브하는 건 29일부터 있었고. 무대 앞쪽 가운데에 서서 "든든한 어깨" 하며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를 툭 친다. "의리를 빼면 다 죽은 시체" 라는 초연 대사가 "싸늘한 시체" 로 바뀌었다. 오른쪽 책상 위에 올라가서 "용맹한 사내들," 하고 꾸욱 눌러 부르는데, 29일 공연에서는 자신의 대원들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인상이 강했다면 이날은 시라노 본인의 감정에 보다 몰두하는 느낌이었다. 초연에서는 무대 중앙에 서서 박자에 맞춰 춤을 췄는데, 재연에서는 왼쪽 책상 위에 올라서서 스탭을 밟는다. 넘버 중반의 반주 부분도 초연에서는 뒤쪽 탁자에 올라가 모자를 던지고 사람들의 호응을 한 몸에 받으며 스탭을 밟았는데, 재연에서는 원형으로 대열을 맞춘 가스콘 부대원들의 한중간에 서서 칼을 휘두르고 자세를 취하며 긴장감을 높인다. "쓸 땐 팍팍 써" 하면서 드기슈와 발베르를 향해 강한 제스쳐를 취한다. "낮일도 밤일도" 하면서 손가락 화려하게 움직이는 디테일 몹시 좋아합니다. 도발을 하고 태연하게 등을 돌려 무대 왼쪽으로 걸어가는 시라노와, 그의 뒤를 든든히 지키며 드기슈 쪽으로 달려들듯 움직이는 가스콘 대원들. "우리는 가스콘 끝이란 없다" 하는 떼창 끝에 "영원히 살리라" 라는 류라노 목소리가, 정말로 이 모든 것이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확신을 준다. "배짱도 좋고 머리도 좋고 사랑도 좋고 술이 젤 좋고" 하며 박자에 맞춰 크게 걸음을 떼며 무대 앞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가스콘 어디든 함께" 하며 무대 가운데 쪽에 시라노를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 선 가스콘은 "간다-" 하며 객석을 향해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적극적인 자세로 마무리한다.

 

 

"풍차의 날개가 저 하늘에 있는 달을 향해 날 날려 줄 수도 있죠," 하고 자신감 있게 맞대응한 류라노가 평소에는 흥, 하고 비웃었는데, 이날은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퉤, 하고 침을 뱉었다. 감히 시를 억압하려 드는 권력을 향한 경멸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강한 디테일이라서 이날 노선과도 정말 잘 어울렸다. 대원이 건넨 술병을 받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입 안에서 술을 머금고 굴린다. "아 대장님 코 말씀이십니까?" 하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제 칼자루를 붙들고 과장스럽게 뭐야 코? 뭐 누구야? 이런 표정으로 씩씩거리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묘하게 입으로만 숨 쉬는 대원들 가운데 서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본인도 입으로 숨 쉬는 디테일도 좋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와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대원. 아이 됐어, 하면서 무대 왼쪽 책상 위에 올라가 서는 시라노. 얘기, 얘기, 하는 열띤 호응에 "그만해 좀!" 하고 괜히 화를 내는데, 이날은 그 말 끝에 "피곤하게," 하는 애드립을 추가했다. 손을 만지작거리면서 멋지게 내리 깐 목소리로 "어젯밤 그곳엔," 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시라노의 주변으로 대원들이 쿠당탕 소리를 내며 다시 황급히 모여든다. "새카만 하늘에 노란 마카롱 같은 달이 둥그렇게 떠올랐다" 하고 운을 떼는 류라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류배우님 음성으로 풀어내는 오디오북을 너무너무너무너무 가지고 싶어 졌다. "유유히 걷고 있는데," 라고 느긋하고 점잖게 목소리를 내리깔다가, "스스슥," 하고 몸을 확 숙이며 긴장감을 조성하는 완급조절이 이야기의 재미를 극대화한다.

 

 

그 순간 끼어드는 크리스티앙의 코그로. 초연에서는 "저 놈 누구야?" 라고 묻고선 신입이라는 대답을 듣고 "오늘 의가사하겠군!" 하며 달려들었는데, 재연에서는 바로 칼을 빼어들며 테이블 아래로 뛰어내려 가고 그 앞을 르브레가 막아섰다. 그대로 크리스티앙을 겨눈 채 "누구지?" 하고 묻던 시라노는 익숙한 이름에 당황한다. 주위의 눈치를 보다가 슬그머니 다시 칼을 차며 "환영하네," 하고 말하는 대장의 태도에 놀란 대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지만, 금세 코를 가리면서 하하하하 웃으며 애써 분위기를 푼다. "어쨌든 그 순간!" 하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지만, 코-옹닥, 코-옹닥, 하는 크리스티앙의 재난입에 공기가 다시 얼어붙는다. 시라노는 "괜찮아, 괜찮아" 하고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면서 "나 진짜 괜찮아, 집중해," 하고 스스로 진정하려 든다. 눈치를 보면서 "그중에 한 놈의 목을 잡고 비트" 는 중간에 "아이코!" 하고 추임새가 들어오자 눈을 꽉 감고 애써 무시하며 "새벽닭처럼 비명을 지르는데!" 하고 이어가지만, "코끼오 코코코" 하는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빼어 든다. "다 나가, 다 나가, 저 놈 빼고 다 나가!" 하고 씩씩거리다가 허공에 칼을 서너 번 휙휙 휘두르며 울분을 온몸으로 내뿜는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던 시라노는 양팔을 활짝 벌리며 "안아주게," 하고 말한다. "대단한 배짱이야," 하면서 감정을 실어 가슴을 퍽 때리지만, "대단히 잘생겼어, 록산이 대단히 좋아할만" 하다며 시무룩해진다. "이러니까 한 번도 연애에 성공한 적이 없지!" 하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나도," 하고 중얼거리고서는 괜히 그에게 뭐왜뭐 하면서 역정을 낸다. "나한테 달콤한 말재주가 있으면 좋겠다" 라는 크리스티앙의 말에, "달콤한 말재주!" 하고 그 말을 반복하는 디테일이 이날 공연에 생겼다. 띠링, 하는 효과음과 함께 "빌려주겠네. 얼굴 빼고 다! 자넨 잘생김만 보태게." 하며 시작되는 완벽한 연인.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로맨스" 하며 품 속에서 꺼내 드는 편지가 재연 첫 주에는 두 장이었는데 지난주부터 한 장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 편지 한 장이 록산에게 고백하기 위해 준비했던 바로 그 편지였음을 이날 공연에서 깨달았다. 아름다운 대리인을 통해서라도 록산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는 시라노의 감정이 더 명확하게 보여서 울컥했다. 초연에서는 넘버가 끝나고 크리스티앙이 먼저 뛰쳐나가고 시라노는 반대쪽으로 퇴장하면서 여운을 남겼다. 공연 후반부에 "달이 떴네," 하는 디테일도 이 부분에서 생겼던 거고. 반면 재연에서는 검을 들고 무대 안쪽에서부터 걸어 나오는 록산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빠르게 말을 주고받으며 무대 안쪽으로 걸어가다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퇴장한다. 이러한 동선 변화는 여백을 남기던 초연과 다른, 마치 영화를 빠르게 앞으로 감기듯 압축적으로 시간 흐름을 담아낸 연출이다.

 

 

 

 

시라노는 좌절해있는 크리스티앙을 이끌어 똑바로 세운다. 똑바로 서라고 시킬 때도 있는데, 이날은 이렇게 안 되냐, 하면서 살짝 짜증을 더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앙에게 "명심해, 자넨 멍청하지 않아." 라고 말해준 뒤 "록산을 불러, 부드럽게." 하고 지시한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대사 전달에 답답해하던 류라노가 지난주부터인가, 모자를 바닥에 아예 내팽개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백 이후에 크리스티앙에게 옷을 입히고 빛 아래로 내보낸 뒤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모자를 직접 주워 들게 됐는데, 이것이 시라노의 쓸쓸함과 절망을 배가시킨다. 황급히 크리스티앙의 모자를 쓰고 망토를 두른 뒤 직접 록산의 앞에 나선 시라노가 말한다. "록산, 난 지금 당신과 처음으로 말하고 있는 기분이에요." 라고. 내려가겠다는 록산의 말에 몸을 확 낮추고 왼팔을 뒤로 뻗으며 제지하려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안녕 내 사랑.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간절하게, 영혼을 담아 전하는 고백. "그이의 미소는 내 영혼을 위로" 한다던 록산의 고백처럼, 시라노 역시 록산의 "그대 그 미소가 날 살게" 하노라 고백한다. 다발로 엮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한 자신의 마음이 록산에게 제대로 닿았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 불안하게 눈을 굴린다. 마침내 사랑이. 온전히 전해진 제 마음에 대한 록산의 답가에 얼굴 가득 벅찬 감격이 피어오른다. 제 입으로 직접 전한 사랑이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환희에 담뿍 젖은 채 눈가에 눈물이 글썽인다. 그러나 "왜 몰랐던 걸까 이토록 진실한 그대" 라는 가사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다. 록산의 사랑고백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슬픔 이상으로, 스스로 사랑받지 못하는 씁쓸함이 짙게 배어있는 허탈한 표정. 산산이 깨져 흩어진 마음을 추슬러 주워 담으며, 크리스티앙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본인이 내팽개쳤던 모자를 주워 들고서는 문 앞에 선다. 록산을 향해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이는 크리스티앙의 인사는 시라노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에 맞춰 같이 고개를 숙이는 시라노의 인사 역시, 크리스티앙을 향한 것이자 크리스티앙의 위치에서 록산을 향하고자 했던 것이다. 크리스티앙에게 길을 안내하는 시라노의 주변 가득 쓸쓸함이 흘러내린다. 제 입술로 맺어진 열매를 직접 확인해야 했기에, 시라노는 무대 가운데로 나와 두 사람의 키스를 바라본다. 초연에서 이 장면은 달이 크게 떠있고 록산의 발코니가 선연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기에 빛과 어둠의 구분이 확실했다. 그래서 그늘 속에 가리워진 채 남겨져 있던 시라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빛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감정이 더 극적으로 표현됐다. 그러나 재연의 무대나 연출 변화는 침잠해버린 시라노의 마음에 더 방점이 찍히도록 했다.

 

 

그녀의 입술에 닿는 나의 이야기. "패배뿐인 승리인가" 하고 자조하며 고개를 떨군다. 왼쪽으로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던 시라노는 문득 록산 집 앞에 있던 구조물을 바라본다. 드기슈의 눈을 피해 크리스티앙이 숨었던 그 장식품은 왼손에 들고 있는 잔을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다보는 인영의 형태다. "쓰디쓴 잔 공허한 축배" 라는 가사와 맞아떨어지는 소품이었음을 다섯 번째 관극만에 깨닫다니. 회전하는 무대 위에 올라선 시라노는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잔인한 영광이로다 / 내 말을 품은 입술에 / 나의 그녀가 입 맞출 때" 하며 록산 넘버 마지막에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럽게 손가락 끝을 입술에 가져다댄다. 아련히 스러지는 그 마음은 두 뺨에 얼룩진 눈물자국으로 흔적을 남긴다.

 

 

크리스티앙을 찾는 가스콘 부대원의 목소리에 황급히 눈물을 닦아낸다. 신부님의 등장에 직접 문을 두드려 록산을 불러낸다. 드기슈의 편지를 읽은 록산은 "모두 잘 들으세요!" 하고 내용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강인하던 그 모습이 드기슈의 목소리에 무너지자, 시라노는 곁으로 다가와 편지의 진짜 내용을 확인한다. 다정하게 록산을 부르며 다녀오라 말해주는 시라노. 초연에서는 허리가 굽고 눈이 어두운 신부님이 시라노를 향해 당신이 크리스티앙이냐 묻는데, 훤칠한 크리스티앙이 자신이라며 앞에 나서자 그럼 그렇지, 뭐 이런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는 대사가 있었다. 재연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서 훨씬 좋다. 시라노에게 고마워요, 사랑해요, 하고서는 크리스티앙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나는 록산. 이 진실을 이제야 알게 된 르브레와 라그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라노 옆에 선다. 괜찮냐는 물음에 허탈한 미소를 걸며 "달에서 추락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재차 들려오는 드기슈의 목소리에 "달!" 하고 힌트를 얻은 시라노는 황급히 라그노의 빵 봉투에서 빵 가면을 꺼내 든다. 모자를 건네고 빵 가면을 뒤집어쓴 시라노는 무대 왼편으로 뛰어와 쭈그려 앉는다. 가면 너머로 입을 풀듯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류라노의 작은 행동이 잘 보여서 귀여웠다. 삐리빠라 삐리빠라 삐리빠라, 하며 여러 번 반복하고서는 양손 검지를 들어 본인의 관자놀이를 짚은 채 삐리빠라, 라고 한 번 더 하는 디테일도 귀여웠다. 그 와중에도 슬픔을 고스란히 안고 있기에, "정말 미쳐버리겠어" 하고 어린애처럼 아아앙, 하고 울먹거린다. 드기슈의 어깨를 턱 붙들고선 발을 땅에 그대로 고정한 채 몸통만 박자에 맞춰 흔들대며 시작하는 달에서 떨어진 나. 달나라인인 본인과 못생긴 지구인을 구분 짓는 가사 변화가 인상적이다. "미치고 팔짝 뛰겠네!" 하며 양팔을 들고 양발을 들며 폴짝 뛰는 동작을 두 번 한다. 넘버 중간에 록산과 크리스티앙이 황급히 지나가는 장면이 추가되어 상황의 긴박감이 한층 강조된다. 무대 안쪽의 성혼선언 모습을 본 시라노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감싸 쥐며 "안돼-" 하고 절규하는 부분이 생김으로써 그 아픔이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초연의 달떨나가 그저 귀엽고 사랑스럽고 유쾌했다면, 재연은 발랄하고 어지러우며 몹시 절망적이다. "정신이 번쩍 날 텐데" 하며 울먹이는 류라노의 목소리에서 지금 당장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고 달나라로 가고 싶다는 감정이 뚝뚝 묻어난다.

 

 

넘버를 시작했던 그 무대 왼편에 쓰러진 시라노에게 르브레가 다가와 모자를 건넨다. 힘든 표정으로 가면을 벗은 시라노는 지금 막 결혼식이 끝났을 거라며 드기슈에게 사실을 밝힌다. 첫날밤은 조금 미뤄야겠다는 초연 드기슈의 대사가 재연에서 빠진 것도 좋다. 대열을 갖춘 가스콘 부대가 전부 무대를 떠나자 슬픔에 가득 찬 록산이 비틀거리며 주저앉는다. 그를 부탁해요. 황급히 자신을 부축하는 시라노의 손을 꼭 붙들고 록산이 부탁한다. 이 넘버도 초연과 가사가 사뭇 달라졌다. "적군과 맞서 싸울 때 위험하지 않게 / 방패가 돼줘요 당신이" 하는 록산의 말에 "그래요," 하고 약속해준다. 끼니를 거르거나 말을 타지 못하게 해 달라는 부탁 대신, "그이의 웃는 표정과 떨리는 몸짓들 / 소중하단 말론 충분하지 않은데 / 날 살아 숨 쉬게 하는 단 하나의 운명 / 이해할 수 있나요 시라노" 라고 묻는다. "그럼요" 라고 대답하는 시라노. "제발 그 사람이 변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라는 말에 초연에서는 "노력해볼게요 허나 전쟁에선 어떨지" 하고 여지를 남겼지만, 재연에서는 "아무 걱정 마요 몇 밤 자고 나면 올 테니" 라고 안심을 시킨다. 그래서 록산은 "무사히 돌아오겠죠 당신이 있으니" 하고 스스로를 다잡는다. 꼭 붙든 시라노의 손에 키스를 한 록산은 비척대며 가정교사와 함께 퇴장한다. 고개를 푹 떨군 채 시라노는 제 손을 내려다본다. 록산이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했던, 그 손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반주 위에 류라노의 흐느낌이 얹힌다. 세게 모자를 왼쪽으로 내팽개치며 시작되는 나 홀로. "내가 뭘 바랬나" 하며 눈을 번뜩이며 하늘을 노려보지만, "그저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도우려 했잖아," 하는 목소리 가득 울먹임이 실린다. "아프고," 하는 말에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고통이, "아프고," 하는 말에 전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인한 절망이, "아프고" 하는 말에 사랑하는 이의 행복조차 건네주지 못한 아득함이, 그대로 무너지듯 무릎을 꿇으며 "아파도" 하는 말에 가혹한 운명에 대한 찢어지는 슬픔이 실린다. "아무도 없는 이 길" 하고 이어나가는 시라노의 뒤편으로 일렬로 서서 출전하는 가스콘 부대의 실루엣이 지나간다. 지치고 아프지만, "승리도 패배도 다 내 몫" 임을 너무나 잘 아는 시라노는 "늘 그랬듯 기꺼이 맞서리라" 선언한다.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홀로" 라는 선고와 함께. "거친 광야 속에서" 하며 뒤로 돌아 무대 안쪽으로 걸어간 시라노는 "날 할퀴는 사랑도 전쟁과 운명도 난 두렵지 않" 노라 말한다. 오른 주먹을 꽉 쥔 채 그대로 아래를 향해 내리꽂으며 고개를 숙이는 류라노의 마지막 실루엣.

 

 

 

 

2막. 파리의 추억. 장면 연출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검은 장막의 붉은 수평선을 배경으로 전투가 실루엣으로 표현된다. 앞쪽으로 좁아지는 세모난 붉은 조명을 따라 르브레가 총을 겨눈 채 천천히 걸어 나오며 넘버가 시작된다. "혀 끝에는 와인의 향기 / 어머니의 스튜와 바게트" 가사가 "피가 되어 빨갛게 번지네" 로 변경됐고, 행복했던 과거 파리의 단편을 보여주는 장면도 삭제되었다. 발베르 파트가 없어지고, 르브레에게 다급한 상황을 전해 들은 시라노가 총을 맞고 쓰러진 병사가 들고 있던 깃발을 주워 들고 적군을 유인하는 장면이 새로 생겼다. 지난 두어회차 동안 깃발이 깃대에 휘감겨서 제대로 펄럭이지 않았었는데, 이날은 류라노가 흔들기 전에 깃발을 툭 털어서 제대로 휘날리게 만들었다. 회전무대가 돌아가면서 창 무더기들 사이로 힘겹게 걸음을 떼는 병사들 동선도 추가되었다.

 

 

고작 편지 한 통 때문에 매번 전선을 들락날락하는 시라노를 걱정하던 르브레는 "고작 나 하나 죽는 거 갖고 왠 호들갑이야" 하며 타박하는 고집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초연의 드기슈의 스카프 넘버가 빠지고 대사로 처리됐다. 초연에서는 시라노가 품에서 드기슈의 스카프만을 꺼내 흔들었는데, 재연에서는 "백작님 같은 귀족들이 도망치면서 남기고 간" 대여섯 장을 하나로 길게 묶은 스카프를 상자에서 꺼내 바닥에 던졌다. 드기슈 개인을 비웃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살겠다고 도망치는 계급 높은 분들 전체에게 커다란 분노를 쏟아낸다. 상황을 파악하고 상대의 전략을 가늠한 시라노 대장은, 백작의 군대가 퇴각한 걸 알았으니 적군이 반드시 여기를 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다. 오늘 밤의 전투를 준비하도록 명령을 내리고서는, 식량이 없어 밧줄 튀김을 먹는 병사들을 위해 낚싯대를 들고 강가로 향한다.

 

 

내일이란 게 없어지는 거네요, 하는 크리스티앙에게 "오늘 밤부터 없어질지도 몰라, 워!" 하는 시라노의 농담이, 1막 가스콘 첫 만남과 겹쳐 보이는 동시에 이어질 비극의 복선이기도 하다.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크리스티앙에게 죽음은 제 코처럼 부자연스러운 일부로 존재하게 된다고 위로한다. 전쟁터가 너무 싫다는 탄식에 "어디든 삶은 전쟁터" 라고 말한다. 크리스티앙의 이별 편지. 그럼 나한테 말해봐, 라고 크리스티앙을 독려한 시라노는 "보고 싶어 안고 싶어 내 품 가득 너를 안고 떨어지지 않을 거야 두 번 다시는" 이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같은 마음으로 젖어든다. 이미 써둔 편지를 건네받은 크리스티앙이 눈물자국을 발견하고 왜 울었느냐 추궁하자 당황하다가 뭘 그렇게 따지냐며 되려 화를 낸다. 수레를 향해 정체를 밝히라는 드기슈의 말 뒤에 "밝히지 못하고 있군" 이라는 류라노 대사가 29일부터 추가됐는데 이유를 잘 모르겠다. 초연에서는 록산이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시라노였는데, 재연에서는 크리스티앙에게 먼저 달려간 뒤 시라노에게 잘 있었느냐 안부를 묻는 것으로 바뀌어서 아쉽다. 극 초반부터 르브레의 최애 빵이 마들렌임을 강조한 이유는, 이 장면에서 라그노가 절친을 위해 마들렌으로 삼행시를 지으며 빵 수레를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수레에 올라탄 채 크리스티앙의 모자를 건네받은 록산이 다른 부대원들과 함께 오른쪽으로 먼저 퇴장하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불러 세운다. 록산이 편지 얘기를 꺼내도 너무 놀라지 말라며, 생각보다 자주 썼노라 고해한다. "매달요? / 더 / 매주요? / 더 / 매주 두세 번? / 더 자주 매일매일 썼다네" 하고 진행되는데, 이날 류라노가 "더 자주" 가사를 빠뜨리고 바로 "매일매일 썼다네" 라고 해버려서 한 마디 정도가 가사 없이 반주만 흘렀다. 용티앙이 본인 파트에 맞게 들어가서 크게 티 나는 실수는 아니었다. 하루 또 하루. 회전무대 위에 서서 모자를 벗고 무대 왼쪽을 향해 선 류라노의 옆모습 실루엣이 다분히 극적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 당신이 오늘도 기다릴 테니" 하는 초연 대사가 "당신을 위해 난 편지를 써요" 로 재연에서 바뀌었다. 이는 1막 그를 부탁해요 넘버에서 록산이 "편지를 쓰도록 해줘요 / 날 위해" 라고 부탁했던 가사와 연결된다. 두 개의 회전무대가 동시에 돌아가면서 세 사람이 무대 가운데에 일열로 배치된다. 그대로 시라노는 왼쪽으로 퇴장하고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편지에 담긴 영혼에 대해 대화한다.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고백에 크리스티앙은 절망한다. 쾅, 하며 전투를 예고하는 소리가 들리고, 크리스티앙이 대장을 부른다. 겉옷을 벗고 하얀 셔츠만 입은 채 돌아온 시라노는 "나도 방금 들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말한다. 그녀는 당신을 사랑해. 넘버 자체가 초연과는 완전히 달라져서 넘버 제목이 이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주 앉아서 노래만으로 팽팽하게 맞서며 감정 대립을 했던 초연과는 다르게, 재연 연출은 긴박한 전투 장면을 삽입하며 극적 긴장도를 높였다. 크리스티앙이 퇴장하고 록산이 등장하여 시라노와 대화를 나누고 다시 크리스티앙이 등장하는 등 동선이 다소 복잡해지면서 산만하게 느껴진다. "영혼만을?!" 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시라노의 모습이 부각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티앙을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하는 책임감이 드러나는 연출 의도는 알겠지만. 적군과 싸우면서 "총탄이 울부짖는 소리 (크리스티앙) / 미친 듯 요동치는 마음 (시라노) / 뜨겁게 기어코 폭발해 (함께)" 하고서는 "아니야!!" 절규하는 시라노. "이런 날 사랑할 리 없어 (시라노) / 거짓된 사랑할 수 없어 (크리스티앙) / 그녀의 진심을 알아야 해 (함께)" 라며 감정과 전투가 최고조로 치닫는 순간, 한 발의 총성과 함께 새빨갛고 곧은 조명이 크리스티앙을 비춘다.

 

 

누가 좀 도와줘, 크리스티앙이 다쳤어!!! 하고 외친 시라노는 황급히 크리스티앙에게 달콤한 거짓을 속삭인다. 모든 걸 밝혔지만 록산이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자네라고. 황급히 달려온 록산에게 자리를 내어준 시라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크리스티앙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젊고 아름다운. 스러진 크리스티앙을 향해, 가스콘 부대원들은 오른 주먹을 심장 위에 올리며 고개를 숙여 추모한다. 류라노도 원래 같은 포즈를 했었는데, 이날은 망연한 표정으로 성호를 그었다. 지치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읊조리듯 입을 뗀다. "이젠 말할 수 없어 절대 절대" 하며 일렁이는 마음을 깊이깊이 잠재운다. 혼이 쏙 빠져버린 얼굴로 멀리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를 듣는 텅 빈 류라노의 눈. 불타고 찢겨버린 깃발을 건네받으며 시라노는 드기슈에게 록산을 부탁한다. 부디 버텨달라는 드기슈의 말에, "버티는 건 힘듭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라고 이를 악문다. 그런 시라노에게 다가온 록산은 제 팔에 묶고 있던 하얀 손수건을 풀러 깃대에 꽉 묶는다. 살아서 돌아와 달라는 록산의 부탁에 "록산이 부른다면 수천 개의 별똥별처럼 날아와야죠.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에게 두 다리와 두 팔이 다 물어 뜯긴다해도!" 라고 말해준다.

 

 

가스콘 부대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시라노는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리며 "아듀 록산!!!" 이라 외친다. 르브레, 하는 시라노의 부름에 "가스콘!!! 가자!!!" 하며 뛰쳐나간 가스콘 부대는 그대로 정지한다. 순앤가스콘맆.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하는 회전 무대 위의 시라노가 모두에게 둘러싸였지만 고독히 홀로 남겨진 채 노래를 시작한다. 공허한 꿈처럼 텅 비어버린 눈빛은 운명을 향해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초라하고 어리석은 죽음 따윈 사치라고" 읊조린 시라노는 "자 친구들, 오늘 이 자리에서 두 죽음에 대한 복수를 치른다. 크리스티앙의 죽음, 나 시라노의 죽음!!!" 라고 선언한다. "자 오만한 죽음아 어서 / 멋대로 몸부림쳐라 / 네 실력 좀 보자" 하는 초연 가사가 "최후의 전투다" 라고 바뀌었다. "내 심장아" 하면서 깃대에 묶은 록산의 손수건을 내려다보다가, "힘을 다오" 하며 그대로 그 부분을 가슴팍으로 끌어안으며 눈을 꽉 감는다. 다시 나아가야만 하는 삶의 의미를 붙들어맨다. 오른손에 들고 있던 창을 던지듯 왼손으로 바꿔 쥐면서 창 무더기 사이에 무릎을 꿇는다. 꾹꾹 눌러 기도하듯 단호한 동작으로 성호를 긋고서는, 그 오른손을 그대로 들어 입가에 가져다단다. 훅, 하고 숨을 불어넣으며 의지를 굳건히 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허망함 뿐이던 눈빛이 형형하게 이글거리고, 가스콘 한가운데에서 시라노가 깃발로 세게 바닥을 내리친다. 동적인 안무가 극적 효과를 부각하고, 마지막 포즈 그대로 얼어붙은 가스콘 부대가 서있는 천천히 회전무대가 돌아가며 붉은 배경의 새카만 실루엣을 만들어낸다.

 

 

회전무대가 반 바퀴 돌고 막이 내려온다. 가을의 나날들. 넘버의 끝에 나무가 자라나고 잎이 피어나는 영상이 떠오른다. 두 개의 빵 봉지를 들고 찾아온 라그노가 작은 봉지는 록산에게 수녀님들과 나눠먹으라고 건네고, 훨씬 큰 봉지는 시라노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모습에서 그가 시라노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다. 여섯 시를 알리는 종이 다 울렸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시라노가 나타나지 않자, "시라노는 올 거야 한 번도 약속을 어긴 적 없어" 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록산. 최고의 남자. 넘버의 끝무렵에 무대 안쪽 오른편에서 시라노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 나온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좋은 저녁입니다" 하고 인사한다. 15년 만에 처음으로 늦은 이유가 인생 최고의 불청객에게 된통 붙잡혔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자에 앉는다. 죽기 전에 자수 끝내는 걸 볼 수 있냐는 농담에 록산이 꼭 완성시켜서 보여주겠다고 하는데, 초연에서는 시라노가 "서두르세요," 라고 했지만 재연에서는 "그래요," 하며 그저 다정하게 바라본다. 이미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끌어안기 시작한 모습은 낙엽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시라노의 신문. "니들이 하는 건 정치가 아니야. 코미디야. 도저히 못 봐주겠어. 제발 정신들 좀 차리게나" 하고 감히 왕 앞에서 한 마디를 던진 시인은 분명 시라노 본인이리라.

 

 

 

 

언젠가 크리스티앙의 마지막 편지를 보여주겠다고 한 약속을 오늘 지켜달라 록산에게 청한다. 건네받은 편지를 소중히 왼손에 펼쳐 든 류라노는, 오른손을 그 위에 펼친다. 15년 동안 고이 묻어둔 과거가 빛바랜 종이 위의 글자를 매개체로 점차 피어오른다. 안녕 내 사랑. 마치 처음 고백했던 그 날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이전 공연들에서는 중간중간 록산을 바라봤는데, 이날 공연에서는 오롯이 편지에만 집중하며 크리스티앙의 죽음과 함께 깊이 묻어버렸던 제 감정에 몰두했다. 그대로 편지를 끌어안는 시라노를 보며, 록산은 그 모든 것이 다 당신이었노라 깨닫는다. "난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해주는 류라노의 목소리가 한없이 깊고 짙고 다정하여 한층 비극적이다. "이렇게 마주쳐버린 운명" 에게 "아주, 잠시, 안녕" 작별을 고한다.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해왔고 그게 바로 당신이었다는 록산에게 웃어주며, 류라노는 그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초연에서는 "저길 봐요. 성가신 손님이 오고 있어요." 라고 당당히 죽음의 신과 마주했는데, 재연에서는 "저길 봐요. 내 친구 달이 마중 나왔어요." 라며 아련하지만 반가이 운명을 마주한다. 비겁하게 숨는 것이 아니라 예의를 갖춰야 하노라 말하며 지팡이를 주섬주섬 주워 든다. 이 어미를 계속 바꾸고 있는데, 초반에는 "예의를 갖춰야지" 라고 했던 거 같고, 29일에는 "예의를 차려야지, 예의를," 하고 말했다. 그리고 이날은 록산을 바라보면서 "예의를 차려야죠," 라고, 마치 1막 초반 극장에서처럼 어조를 바꿔 말했다. 초연에서는 "거짓된 자, 오만한 자, 위선과 편견, 그리고 허영과 비겁함" 이라 자신이 싸워야 할 적들을 나열했다. 재연 초반 공연에서는 "그리고 허영심" 이라고 끝냈는데, 29일부터였나, "허영과 자만" 이라 선언했다. 자만, 이라는 단어가 이번 류라노에게 어떠한 의미인가는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른 리뷰에서 남겨볼 생각이다.

 

 

재연에서는 마지막 대사를 계속 "오늘 밤 내가 달나라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가야 할 단 한 가지. 티끌 한 점 없는, 얼룩 한 점 없는, 내 영혼." 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날!!!! 초연 대사가 돌아왔다!!!!!! "오늘 밤 내가 달나라로 들어갈 때 나에 대한 축포가 하늘에 있는 모든 별들을 휩쓸 것이다. 월계관도 장미꽃도 내게서 모든 걸 빼앗아가도," 라는 초연 대사와 정확하게 동일했는지는 확언하지 못하겠지만, 월계관과 장미꽃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이것도 다음 리뷰에 써야지. 나 홀로 리프라이즈.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마지막 절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마지막 순간, 시라노는 록산의 손에 편지를 쥐여준다. 시라노의 눈물과 크리스티앙의 피와 록산의 상처가 남아있는 종이 한 장. 배경의 나무가 사그라들고, 시라노의 언어가 담긴 글자들이 반짝인다. 마치 축포처럼. "그래도 별들은 아름답잖아" 라며 올려다보던 밤하늘의 별처럼.

 

 

커튼콜 마지막에, 류라노는 객석을 향해 양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서는 뒤로 돌아 달을 향해 뛰어간다. 달 가까이까지 가서 오른손을 들어 올리는데, 평소에는 안녕이라 인사하는 것 같았던 그 동작이 이날은 달을 붙잡으려는 손짓 같았다. 끝까지 달을 쫓았던 사람. 끝까지 혼자였던 시라노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푹 숙여 마지막 실루엣을 남기고, 관객은 이 감정을 가득 끌어안은 채 길고 아득한 여운을 간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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