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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in 광림아트센터 bbch홀, 2019.08.25 2시
류정한 시라노, 박지연 록산, 김용한 크리스티앙. 재연 류라노 3차 관극. 류지연용한 페어 자둘.
시라노 프레스콜이 있었던 날, 백스테이지 투어 이벤트도 짧게 진행되었다. 주변 분들의 친절 덕분에 처음으로 이런 특별한 기회를 경험할 수 있었는데, 류라노가 서서 연기하는 바로 그 무대를 두 발로 밟아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객석, 그 객석에서 체감한 것보다 훨씬 좁은 무대의 깊이와 넓이 등이 생경하고 놀라웠다. 특히 좋았던 것은 사방에 가득한 조명들과, 무대 위쪽에 준비되어 있는 무대 막들이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바로 그 공간 안에 잠시나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데굴데굴 굴러와 커다랗게 가까워진 노란 달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영광도 누렸다. 1막 엔딩 장면의 시라노처럼 포즈를 취해보았지만, 생각보다 밋밋했다. 차라리 류라노처럼 달을 향해 안녕, 하고 오른손을 들어 인사하는 포즈가 나았을 듯하여 조금 아쉬웠다. 불과 며칠 전에 눈앞에서 보고 온 이 영상이 공연 안에서 바뀐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본공의 영상 속 달은 노란기가 많이 빠진 창백한 색으로 모습을 처음 드러낸 뒤 점차 앞으로 나오며 커진다. 계속 어두침침한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은, Alone 마지막 부분에서 구름이 확 걷히는 순간 휘영청한 자태를 드러낸다. 커튼콜 영상도 바뀐 건가 했는데, 이건 또 예전 영상 그대로였다. '벨쥐락의 여름' 넘버의 영상도 조금 바뀐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다. 이것 말고는 삐리빠라뽕 전에 빵 가면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라그노와 르브레의 설명이 추가된 게 있다.
※스포있음※
일주일 전과는 또다른 류라노의 노선과 연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자첫, 자둘 공연에서는 굳건하고 묵직했다면, 조금 더 어려진 이날 공연에서는 꼿꼿한 패기가 넘쳐흘렀다. 귀족과 위선자들을 모두의 앞에서 웃음거리로 만들며 공간을 온전히 제 것처럼 장악하는 류라노는 한층 가볍고 유쾌했다. 호기와 장난기로 반짝이던 두 눈은, 록산을 다시 발견한 순간 불안하게 흔들린다. 걱정과 기대, 설렘과 벅찬 전율로 가득 채워진 눈망울이 넘실대듯 일렁인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기쁘기에, 입가에는 미소가 걸리고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뚝뚝 묻어난다. 초연에서는 동경을 담은 찬사에 가까웠던 '록산' 넘버가, 재연에서는 르브레와 라그노의 설레발 때문에 한층 현실감 있는 기대이자 착각으로 표현된다. 첫사랑을 향해 반짝이던 소년 같은 눈빛은 냉정한 현실 앞에서 빠르게 빛을 잃는다. 자신을 도와주겠다는 시라노의 다친 손을 덥석 붙잡은 록산은 그의 탄식에 화들짝 놀라며 말한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의도치 않았으나 중의적 의미가 담긴 록산의 말에, 몸과 마음이 다 아픈 류라노는 결국 울상 짓는다.
시라노는 비록 사랑 앞에서는 어설프고 여리지만, 권력과 억압 앞에서는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맞서 싸운다. 초연에서는 찌그러진 동료들을 일으켜 세우는 권유의 어조였던 '거인을 데려와' 넘버가, 재연에서는 시라노 본인의 다짐을 굳건히 하는 단언으로 바뀌었다. "당하고 또 당해도 눈을 감고 모른 척하면 끝인가 (초연) / 눈 감고 귀를 막고 숨 막힌 채 모른 척할 순 없다네 (재연)" 라거나 "가식뿐인 시를 끄적이며 구걸하듯 살아갈 텐가 (초연) / 눈치 보며 시를 끄적이며 구걸하듯 살게 두진 않아 (재연)" 라는 어미변화가 있었다. 이렇게 가사와 장면이 초연과 사뭇 달라짐으로써, 재연의 시라노는 든든한 동료를 넘어 강건한 리더로 가스콘의 중심에 선다. 낭중지추 같은 자유분방한 검객도 매력적이지만, 모두를 이끄는 동시에 보듬어야 하는 지도자의 직책이 가미됨으로써 비장미가 더해진다.
이는 시민들의 호응을 없애고 고스란히 가스콘의 군무와 열기에만 집중한 재연 '가스콘' 넘버의 연출 변화와도 일맥상통한다. "건방지기 짝이 없군! (초연) / 품위라고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망나니들! (재연)" 이라는 드기슈의 비난에 시라노는 당당하게 맞선다. "말씀드렸을 텐데요. 건방지지 않으면 가스코뉴 출신이 아니라고! 안 그런가! (초연) / 가스콘이 어떤지 잊으셨습니까. 기억 좀 나게 해 드려요? 예? (재연)" 하며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초연에서는 동등한 위치의 대원들에게 동의와 호응을 유도하며 함께 나아갔다면, 재연의 시라노는 먼저 앞장서며 모두를 이끌어간다. 순앤가스콘맆 마지막에 "간-다," 하고 선창하는 부분의 박자가 약간 짧아진 점이 곡의 속도감을 더했는데, 이건 추후 리뷰에서 다시 얘기해야겠다.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채 고백하기 직전의 시라노와 록산의 대화도 초재연이 많이 다르다. "왜 당신의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지죠? (초연) / 왜 당신의 말속엔 슬픔이 가득하죠? (재연)" 라는 록산의 물음에, 시라노가 답한다. "인생에서 한 번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온다고 하죠. 그 사랑을 겪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슬픔이 아닐까요? (초연) / 내 말들이 재주를 부려 혹여 다른 빛깔을 낼까 봐. 내가 다듬고 골라 그대에게 바친 언어들이 꽃다발처럼 시들어버릴까 봐 정말 두려워요. 그러니 다발로 엮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할게요. (재연)" 라고. 그러자 록산은 "만약 그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온 거라면 제게 어떤 말을 들려주시겠어요? (초연) / 어떤 말이든 좋아요. 당신의 진심이라면. (재연)" 이라 말한다.
재연의 록산은 "사랑보다 강렬한, 아름다움보다 진실한 운명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라" 던 시라노의 조언을 잊지 않는다. 그렇기에 직접 운명을 개척하려 노력하고, 나아가 스스로 알아보았노라 믿는 그 운명을 향해 능동적으로 대응한다. 이러한 록산을 너무나 잘 알기에, 재연의 시라노는 운명 같은 사랑을 언급하는 대신 그대에게 전할 고백의 언어를 고르고 추리며 고뇌했음을 고해한다. 제 영혼을 담은 이 마음이 혹여라도 빛 바래기라도 할까 걱정하면서. 그래서인지 "나의 천사, 나의 꿈, 내 영혼의 숨결 같은 그대여" 하며 소중하게 전하는 시라노의 고백이 초연과 아주 미묘하게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초연의 고백은 제 입으로 직접 마음을 전한다는 벅찬 설렘으로 눈부시게 일렁였다. 재연의 고백에도 이러한 떨림이 넘실댔지만, 동시에 이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못한다거나 영혼이 공유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아슬한 두려움이 깔려있었다. 조심스럽고 애틋한 그의 언어들이 마치 내 마음과도 같아서, 아련한 시라노의 아픔이 새삼 절절했다.
그래서 삐리빠라뽕 가사도 많이 달라진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정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니?" 하는 한탄과 탄식에 그의 절망이 뚝뚝 묻어난다. 초연의 '달에서 떨어진 나' 가사는 드기슈를 붙잡아 놓기 위해 혼을 쏙 빼놓는 내용이었다면, 재연에서는 혼란스러운 시라노의 감정 묘사에 보다 치중한다. "지금 당장 보내달라 달나라로" 라거나 "어쩌다 이렇게 뒤통수 맞고 궤도이탈" 이라는 표현, "내 고향 생각하면 복받쳐서 눈물 콸콸 / 미치고 팔짝 뛰겠네" 하는 직설적인 가사들이 고통을 제대로 삼키지도 토해내지도 못하는 시라노의 감정을 여실히 담아낸다. 초연 달토끼들의 가사나 안무, 연출 등이 더 세련되고 매력적이긴 하지만, 다소 번잡스럽고 정신없는 재연의 변화는 시라노에게 한층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재연 2막에 추가된 낚시터 장면과 '크리스티앙의 편지' 넘버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관계성을 한층 공고히 만든다. 1막에서 고백 때문에 얼어있는 크리스티앙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자넨 멍청하지 않아" 라고 말해줬던 류라노는, 2막에서도 따뜻하게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며 든든하게 의지가 되어 준다. 영혼만을 사랑한다는 록산의 말에 "세상에, 영혼만을??" 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크리스티앙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고 그를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거짓말을 입에 올린다. "아니야! 이런 날 사랑 할리 없어" 하며 번뇌하던 시라노는, 죽음을 마주한 크리스티앙에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록산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자네라고 말해준다. 자신은 멍청해서 그렇게 말하면 믿고 싶다는 그의 말에, 시라노는 그의 손을 꽉 붙들며 "제발 내 말을 믿어" 라고 속삭인다. 이젠 절대 전할 수 없게 된 마음을 잠재우던 류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이름을 흐느낌처럼 입에 올린다.
15년 뒤. 낙엽을 바라보는 시라노의 감상도 달라졌다. 초연에서는 낙엽이 아름답다는 록산의 말에 "아름다운 죽음이네요. 하늘에서 땅으로 여행하는 짧고 부드러운 비행." 이라고 답했는데, 재연에서는 록산의 대사 없이 "낙엽들이 아름다운 비행을 하네요. 땅에 떨어지는 순간 썩어가리란 걸 알면서도. 그 추락이 비상처럼 우아하길 바라는 거겠죠?" 하고 자조한다. 초연에서는 '안녕 내 사랑' 넘버의 끝에 록산이 시라노의 입가에 키스를 해줬지만, 재연에서는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가까이 한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초연에는 동화 속의 한 장면 같네요, 라고 했던 대사가 재연에서는 사라졌다. "난 평생 인생이 엉망이었는데 이제 죽음까지도 엉망진창이네요" 라던 초연의 대사가, 재연에서는 "난 내 삶도 죽음도 언제나 진실되길 바랬어요. 그런데 이 코처럼 엉망진창이네요." 라고 바뀌었다. 2막 낚시터에서 "죽음은 말이야, 언제나 부담스럽고 불편하게만 느껴지지. 그러다 어느새 부자연스런 일부로 존재하게 돼. 이 코처럼 말이야." 라고 크리스티앙에게 말하는 대사와 함께, 코에 컴플렉스를 지닌 시라노의 성향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재연에서는 대사나 가사 등이 반복되고 누적되면서 한층 의미를 강조하는 연출이 많아졌다. 초연에서는 록산이 라그노의 빵집으로 찾아왔지만, 재연에서는 록산이 시라노를 기다린다. 약속시간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는 록산의 말과 이를 이행하는 시라노의 모습은, 2막 마지막 장면에서 15년 만에 처음으로 늦은 그의 변화를 부각한다. "록산이 부른다면 수천 개의 별똥별처럼 날아와야죠.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에게 두 다리와 두 팔을 다 물어 뜯긴다해도" 라는 대사도 두 번 반복된다. "어디든 삶은 전쟁터" 라는 시라노의 말버릇을 닮아버린 록산의 모습은 크리스티앙에게 큰 힌트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텍스트로써 개연성을 강조한 변화가 재연의 이야기를 보다 공고하고 짜임새 있게 구축해냈다. 매끄럽고 우아한 문장들이 너무 단순해지고 담백해진 점은 재연 관극을 거듭할수록 더욱 아쉬워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재연이 여전히 사랑스럽고 만족스러운 이유다.
초연 류라노는 이렇게까지 앓지 않았는데, 재연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매 순간 갈망하고 있다. 류배우님의 공백기가 컸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만큼 재연의 개연성과 설득력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러다가 초연보다 많이 보게 될 것만 같아서 걱정이다. 시라노 재연 총막 전에 류배우님 차기작도 나와야 할텐데. 일단 류라노 자넷을 얼른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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