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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in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2019.04.06 2시

 

 

 

 

김선영 호프, 고훈정 K, 유리아 마리, 이윤하 과거 호프, 김순택 베르트, 이승헌 카델.

 

 

현대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의 미발표 원고를 끌어안고 사는 노인. 무려 30년 간 법정에서 국가와 싸우며 원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그의 사연은 무엇일까. 꼬장꼬장하고 괴팍한 70대의 노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동네마다 미친년은 하나 있어서 기준이 되어줘야 한다며 자신은 그 역할을 잘 하고 있노라 개의치 않는 에바 호프. 의인화된 원고는 호프의 곁에서 그를 보듬고 위로하는 동시에, 그가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어하는 진실을 마주하도록 만들기 위해 애쓴다. 재판 중의 법정과 호프의 인생사가 교차하며 쌓이고 '읽히지 않은 책' 에 집착하는 '읽히지 않은 인생' 은 처음으로, 읽힌다.

 

 

 

 

아주 매끄럽게 전환되는 장면 연출이 극의 몰입을 높였다. 법정을 구성하던 칸막이의 이동 및 재배치가 때로는 수용소의 강제노동처를, 때로는 기차역을 만들어낸다. 조명연출은 전혀 다른 시간대와 장소의 차이를 확실하게 구분짓고, 적절한 텀으로 엇갈리며 포개지는 대사들은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맞물린다. 극 초반의 대사는 극 후반에서 반복되며 서사의 완결성을 더한다. 내용과 연출이 짜임새 있게 구성된, 여러모로 완성도 있는 창작뮤지컬이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인생은 일상이다"

 

 

언어유희적 요소가 많은 가사와 귀엽고 앙증맞은 안무의 넘버들이 극의 재미를 끌어올린다. 경매장 장면 연출은 마치 쇼뮤처럼 화려하고,  호프와 K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의 1인다역은 마치 책 속의 책처럼 이야기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좋은 사람들 참 많이 만났었는데 얼굴이, 기억나질 않아" 라는 호프의 말에서, 현재 호프의 재판정에 실재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과거 호프의 인생에 존재했던 사람들에게 덧입혀질 수밖에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호프의 현재와 과거가 중첩되는 연출은, 여전히 옛 고통에 파묻혀 살아가는 그의 아픔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는 효과도 냈다. 마치 지컬 프랑켄슈타인에서 주연 배우들의 1인2역이 괴물의 악몽을 표현하기 위한 장치였던 것처럼 말이다.

 

 

"나의 글 나의 문장 빛나던 나의 세상이 사라진다 나라서 내가 나라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기에,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한 경계인이기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작가 요제프 클라인과 그의 글. '절망을 살고 희망을 쫓던' 그는 자신이 '남긴 삶의 기록' 을 불태워달라 친구 베르트에게 부탁한다.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의 작품을 사라지게 만드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 요제프의 인생. 그가 남긴 원고에게 평생 붙들려 살아간 호프의 인생. 그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세상이 틀린 것이다.

 

 

 

 

"빛나잖아"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원고를 '버리지 않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내던 호프는, 비겁하게 도망치던 자기자신을 비로소 똑바로 마주한다. 유일하게 남은 것에 매달리며 살아온 그의 인생을 함께 읽다보면 깨닫게 된다. 모든 인생은 그 자체로 빛이 난다고. 극 속에 등장하는 모든 삶들이 가치 있고 유의미하다고. 빛나잖아, 에바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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