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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in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2019.05.22 8시

 

 

 

 

윤공주 안나, 민우혁 브론스키, 민영기 카레닌, 최수형 레빈, 이지혜 키티, 김지강 스티바, 박송권 MC, 김가희 세르바츠카야, 강혜정 패티, 이서준 세료자. 이하 원캐. 이소유 브론스카야, 한지연 벳시. 공주안나 둘공.

 

 

초연을 놓쳐서 아쉬웠던 기억 때문에 재연은 개막하자마자 보고 왔다. 원작 소설의 방대함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는데, 중심을 잃지 않는 깔끔하고 집중력 있는 구성이 만족스러웠다. 여러 인물들을 다루되, 안나의 삶과 선택과 변화에 방점을 두고 그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주의를 환기시키는 기차소리와 주의를 주는 엠씨의 멘트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극의 처음과 끝을 극적으로 연결한다. 드라마틱한 사건들의 연속으로 인해 파국으로 치닫는 방식이 아닌, 감정이 쌓이고 시간이 포개지며 잔잔하지만 중요한 찰나들이 차곡차곡 삶을 그린다. 안나의, 그 시대를 살아낸 여성의, 역사의 변곡점에 놓인 사람의 인생들을, 큰 과장 없이 담백하게 하지만 선연하게 담아낸 극이다.

 

 

무대 연출은 각각 두 개의 직사각형 슬라이딩 스크린이 달린 네 개의 구조물을 이동시켜 각기 다른 공간들을 표현한다. 영상 활용이 주를 이루지만, 구조물이 일직선 뿐만이 아니라 반원형 등 여러가지 배열로 놓이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았다. 무대 가운데의 빈 공간은 앙상블의 군무가 꽉꽉 채우면서 장면에 걸맞는 상황을 묘사한다. 무대는 파티장이자 광장의 스케이트장이자 경마장이고, 동시에 공연장의 무대이자 객석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드넓은 평야가, 때로는 외롭고 황량한 집이 된다. 다만 스탭들이 구조물을 옮기는 모습이 2막에 너무 자주 보여서 약간 아쉬웠다. 무려 대극장극임에도, 무대를 수동으로 옮기고 있는 게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마스트 돈 안 쓰나요.

 

 

 

 

장면마다 앙상블을 잘 활용한 것도 좋았다. 사교댄스나 발레처럼 다양한 동작을 넣은 군무들이 화려했다. 어지럽게 뒤섞이는 군중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동선들이 전혀 겹치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눈보라 넘버에서 펑펑 쏟아진 하얀 눈을 치우기 위해, 청소부로 분한 앙상블 배우들이 직접 무대 좌우를 왔다갔다 하며 눈을 치운다. 그 와중에 서로에게 인사를 나누는 등 깨알 같은 연기를 하며 마치 기차역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 안에 녹아든다. 그들의 뒤에서는 안나의 가족과 브론스키가 대화를 하는 중심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러한 장면 구성은, 많은 이들이 서로 스쳐지나가고 만나고 떠나는 기차역의 공간 특색을 한층 맛깔나게 부각시켰다. 이외에도 2막 브론스키와 카레닌의 듀엣 넘버 중간에 나타나 객석 의자를 치우는 앙상블의 동선도 좋았다. 주연 배우들이 노래에 담아내는 감정을 보다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둘 사이를 통과하며 지나간다. 이처럼 소품을 꺼내고 치우는 앙상블의 행동과 동선을 치밀하게 계산한 연출이 마음에 들었다.

 

 

가장 자주 등장한 조명연출은 좌우를 가로지르고 상하로 내리꽂히는 직선의 하얀 조명들이 만들어내는 격자무늬였다. 마치 새장이나 철창처럼, 자유로운 인간을 규칙과 규범에 가두는 사회의 구속력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혹은 시발역와 종착역을 잇는 기차의 선로 같기도 했다. 때때로 기착지가 있을지언정, 선로는 끊김이나 빈틈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시간을 거스르지 못하고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생처럼. 이외에도 강렬한 색감과 높은 조도의 붉은 조명이 경고등처럼 빛나며 극적 효과를 더했다. 크게 화려하거나 번잡스럽지 않은, 그러나 적절히 필요한 곳에 꽂히는 조명연출이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아쉬웠던 부분은 역시 블퀘 음향. 안나나 키티, 패티의 아름다운 고음은 선명하게 꽂히는데, 저음을 심각하게 못잡았다. 가사가 완전히 뭉개져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사와 일부 대사도 불호였다.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단순한 번역투의 가사가 몹시 이상했다. 멜로디에 얹은 단어의 음절이 너무 많고, 연결되는 발음 또한 매끄럽지 않았다. 키릴문자의 가장 큰 강점이 물흐르듯 유려하게 미끄러지는 발음인데, 번역을 너무 못한 가사가 음악과 어우러지지 못하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치닫다가 흩어져버렸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사랑을 말하는 넘버들에서 이 미묘한 어긋남이 유난히 심하게 느껴져서 몹시 아쉬웠다. 그리고 몇몇 대사들도 거슬렸다. 안나를 향해 극렬한 비난을 쏟아내는 2막 넘버 중간에 남앙들이 안나를 향해 '개 같은 년' 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뱉어서 역겨웠다. 장면에 따라 하느님/하나님 명칭을 통일하지 못한 것도 정말 오랜만에 봤다. 이외에도 초연과 사뭇 달라졌다는, '사랑'을 보다 중시하도록 바꿔버린 안나의 대사들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스포있음※

 

 

1막의 공주안나는 가면을 쓴 듯, 사교계나 귀족층에 잘 어울리는 인위적인 미소를 얼굴에 걸고 있다. 브론스키로 인해 깨닫게 된 휘몰아치는 감정은 굳어있던 그의 표정을 다소 부드러워지도록 만든다. 그러나 카레닌의 부인이자 세료자의 엄마라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모스크바에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안나의 얼굴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 소문이 가득한 사교계에서 추문에 휩싸인 아내를, 카레닌은 책망한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더군! 하며 화를 내는 카레닌에게, 안나는 꼿꼿하게 선 채 유리처럼 투명하고 호수처럼 잔잔한 표정으로 즉답한다. "그게 죄는 아니잖아요."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떳떳한 눈빛과 어조가 안나의 성정과 매력을 단숨에 드러낸다. 그러나 브론스키가 참여한 경마장에서, 안나는 변한다. 급박하게 진행되는 경주와 희비가 교차하는 군중의 분위기에 휩싸인 채 오롯이 브론스키만 바라보고 있는 안나. 그런 그가 지나치게 튀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팔을 잡고 어깨를 붙들며 자제시키는 카레닌. 새하얀 옷에 새하얀 모자를 쓴 안나의 표정은, 생전 처음 제 감정을 드러내는 어린 아이처럼 맑고 순수하며 적나라하다. 마침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가겠노라 선언한다. 자유와 행복. 안나는 "사랑 그리고 삶" 을 꿈꾸고 노래하며, 인형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인생을 추구한다.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는, 뜨거운 사랑을 꿈꾸는 안나를 다시 외롭게 만든다. 자신의 아이를 끌어안거나 바라보지 못하는 삶. 틀 안에 속하지 못해 부유하는 처지. 버려진 것처럼 외로이 방치된 나날들. 주체성과 인간성을 알게 되었기에, 안나는 위태롭게 흔들린다. 2막의 공주안나는 감정기복이 몹시 심하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강하게 드러낸다. 예민하고 날카롭지만, 유약하다. 본질이 단단하기에, 안나는 내면부터 바스라진다. 주위의 시선이 어떻든 그렇게 유명하다는 패티의 노래를 들어야겠으니 공연장에 가겠다는 안나의 결정은, 그저 오기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삶에 떳떳하기에 자신감을 잃지 않는 강인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만하고 단정적인 사회의 비난과 배척은 그의 자존감을 바스러뜨린다. 객석 의자 위에 몸을 웅크리고 홀로 덜덜 떨고 있는 안나에게, 패티의 노래가 들려온다.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 거대한 종소리처럼 깨끗하고 맑은, 모든 번뇌를 잊게 하는, 모든 죄를 사하는 듯한, 영혼을 울리는 목소리. 안나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끌어안는, 음악. 끝내 안나는 기차역으로 향한다. 선로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엠씨의 경고는 삶과 죽음을 향한 조언과 같다. 1막 첫 장면의 사고도, 키티가 몸을 던질 뻔한 절망도, 안나가 양팔을 뻗어 끌어안듯 마주한 결말도, 모두 인생이다. 안나는 마지막까지 스스로 선택하며,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안나와 키티의 2막 듀엣곡이 인상적이었다. 키티는 자신이 가장 빛나야 하는 순간을, 자신이 꿈꿔온 삶을 안나에게 빼앗겼다고 느끼고 상처 입는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된 키티는 성장한다. 과거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던 모든 것들에 대한 회한. 이들의 노래는 단순히 사과와 용서가 아니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아픔을 공감하기에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여성의 연대다. 그래서 안나는 키티를 끌어안고, 키티는 나서서 안나를 감싸준다. 안나와 키티의 관계는 모든 여성들에게 공유된다.

 

 

주조연 배우들 모두 좋았지만, 공주안나가 너무 훌륭해서 관극 내내 행복했다. 넘버들도 취향이고 앙상블 군무와 떼창 많은 대극장도 오랜만이어서 아마 자둘을 하게 될 성싶다. 이번 상반기는 의도적으로 회전 없이 다관람 중인데, 그 기록을 깨뜨릴 가치가 있는 극이다. 여성 개인의 일대기를 다룬 엘리자벳이나, 여성 간의 갈등을 그린 레베카 등의 작품과 사뭇 결이 다른 여주극이어서 신선하고 흥미롭다. 이 극이 꾸준히 올라와서 다양한 여배우들의 안나를 볼 수 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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