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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in 샤롯데씨어터, 2018.10.11 8시 공연

 

 

 

 

김선영 프란체스카, 박은태 로버트, 황만익 버드, 유리아 마리안/키아라, 혁주 마지, 이하 원캐. 여왕프란, 은버트. 여은 페어. 매다리 재연 자둘.

 

 

작년 이 극의 초연을 관극할 때는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공유하는 사랑에 방점을 뒀다. 어떠한 수식어를 붙이든 불륜이라 비난 받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의 감정을, 이해는 가능했으나 공감은 쉽지 않았다. 아름다운 넘버들만 기억에 남긴 채, 올해 재연으로 이 극과 재회했다. 연출이 다소 수정되었을 지언정 이야기 자체는 그대로임에도, 재연 관극은 초연과 다르게 다가왔다. 사랑보다는 삶에, 특히 프란체스카의 인생에 보다 깊이 몰입하며 넘실대는 마음을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생경하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에 사로잡혀 일렁이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본질을 다시 마주하며 흔들리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 순간 운명이 손을 내민다면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지 함께 고민에 빠졌다.

 

 

※스포주의

 

 

익숙하지만 벗어나고 싶었던 나폴리를 떠난 여왕프란은, 오하이오에서 맞닥뜨린 새로운 삶에 녹아들듯 적응한다. 납작한 일상에 파묻힌 차프란의 색은 무력감으로 뿌옇게 덧칠됐다면, 정신 없는 일상에 휩싸인 여왕프란의 색은 시간으로 퇴색되어 흐릿해졌다. "잊었다는 것조차 잊고 살았던" 고향의 사진을 마주한 순간, 차프란은 잃어버렸던 그리움이 치밀어올라 사진마다 울먹이고, 여왕프란은 까마득해진 기억을 하나씩 되짚으며 애써 웃다가 마지막 안젤로를 기다리던 벤치 사진에서 둑이 터지듯 울음을 토한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단 한 번의 순간" 앞에서, 차프란은 온 마음으로 운명을 느끼면서도 힘겹게 부정하고, 여왕프란은 명확히 운명을 인지하면서도 아프게 도망친다. 그래서 "어떻게 떠나요" 라고 절규하듯 묻는 프란체스카를 설득하는 은버트의 노선도 달라졌다. 꾹꾹 눌러 감정을 숨기려는 차프란은 부드럽고 간절하게 끌어당겼고, 뒷걸음질치며 마주한 감정에서 멀어지려는 여왕프란은 단단하고 힘있게 이끌었다. 결국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감정은, 무채색이던 차프란을 형형색색의 빛으로 물들였고, 빛 바랬던 여왕프란을 눈부시게 밝은 섬광으로 비췄다.

 

 

습관에 젖은 스스로를 인식한 차프란은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통감하고 아득한 절망에 망연해진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던 여왕프란은 이 모든 걸 한 순간에 버릴 수 없음을 깨닫고 휘청이며 무너진다. 특별함으로 물들었던 익숙한 공간에, 다시 일상이라는 현실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마주한 프란과 로버트가 마지막으로 내뿜는 강렬한 환희. 떠나자는 그의 손을 끝내 맞잡지 못하고 침잠하는 목소리로 제 삶을 선택하는 프란체스카. 그 특별한 나흘의 시간을, 차프란은 끌어 안은 채 잊지 않았고 여왕프란은 기억 한 켠에 소중히 간직한다. "기나긴 시간을 건너" 걸려온 침묵의 전화를 받은 차프란은, 다 이해한다는 듯 담담하게 수화기를 붙들고 있다가 천천히 내려놓는다. 반면 잔잔한 수면 아래 고요히 간직했던 여왕프란의 기억은, 그 정적 하나로 한순간에 흘러 넘친다. 꿈 같던 나흘 동안 느낀 모든 감정들이 하나씩 생생하게 차오르는 표정의 여왕프란은, 한참 동안 귓가에 대고 있던 수화기를 덜덜 떨리는 손으로 떨구듯 내려놓았다. 차프란의 마지막은 애틋하게 아름다워 여운이 길었고, 여왕프란의 마지막은 눈부시게 반짝거려 잔상이 짙었다.

 

 

 

 

디모인의 카페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프란체스카가 맞잡은 손을 놓으려하자, 은버트는 자신 쪽으로 손을 더 끌어당기며 껴안듯 따뜻하게 다독인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가족을 돌아본 프란이 뒷걸음질 치자, 은버트는 제발 그러지 말라는 듯 절실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한층 더 꽉 끌어쥔다. 그러나 마지막 설득을 끝내 거절하는 프란의 선택에, 은버트는 슬프지만 이해한다는 미소를 입꼬리에 걸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그리고 그의 손을 놓아준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은버트의 따뜻한 미소와 격려. 시간이 흘러 삶의 끝자락에서 자신을 찾는 전화가 있었는지 마지막으로 묻던 은버트는, 그 전화가 온다면 연락처를 알려드리냐는 말에 "이젠 안돼요." 라고 답한다. 그가 프란에게 약속했던 미래는 몰랐던 세상을 보여주고 자유로운 인생이라는 꿈을 이뤄주는 것이었기에, 그렇게 해줄 수 없는 지금은 만날 수 없다고 말하는 은버트가 살짝 미소를 얹는다.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봐 남겼던 그의 번호가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움 없이 프란도 인생을 잘 살아냈음을 반증한다는 듯이. 자신의 모든 흔적을 나눠주고 불사른 은버트는,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마지막 사진 한 장을 소중하게 품에 껴안는다.

 

 

 

 

나폴리의 어린 소녀는 "나의 꿈을 제발 당신이 이뤄줘" 라고 비명처럼 외치며 하얀 제복을 입은 미군에게 매달렸다. 그렇게 버드는 프란체스카를 품에 안고 그를 머나먼 타국으로 데려온다. 버드는 프란에게 해주고 싶은 건 많지만 형편이 안된다는 핑계를 대고,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시간을 낭비라고 표현하는 프란의 말에 되려 상처받고 화를 낸다. 삶을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버드는 프란에게 말한다. "당신 꿈을 이뤄주지 못해 미안해" 라고. 이 극에 등장하는 두 남성은, 모두 한 여성의 꿈을 이뤄주지 못했다. 한 남성은 그의 꿈을 이해하지 못했고, 다른 남성은 그의 꿈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너무 늦었다. 두 남성을 만나고 시간을 공유한 한 여성은, 자신의 현실을 올곧게 마주하고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을 내리며 자신의 삶을 살아낸다. 비록 어린 시절 바라던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프란체스카는 끝까지 인생을 일궈냈고 그것이 또다른 형태의 꿈이 되어 마침내 완성형으로 맺음지어졌다.

 

 

사랑, 관계, 삶, 인생, 꿈. 곱씹을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짙어진다. 불륜이라는 소재보다는, 공감 가는 여러 인생들이 담긴 이야기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닌 극이다. 가족이 잠시 집을 비우고 은버트를 처음 만난 날 밤. 쏟아질 듯 수많은 별이 수놓인 새카만 하늘 아래, 위스키 한 잔을 손에 들고 숄을 어깨에 걸친 채 발코니의 흔들의자에 앉은 여왕프란. 경험해보지 못한 다채로운 감정들에 휩싸인 채 홀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던 그 모습이 내뿜는 애틋함이 짙은 잔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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